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ditor M Oct 17. 2022

양자경의 에브리씽

 ‘대혼돈의 멀티버스’(in the Multiverse of Madness)라는 부제는 “닥터스트레인지”가 아니라 이 영화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이하 “에에올원”) 말입니다. 미국에서는 지난 3월 고작 10개 상영관에서 시작해 입소문을 타고 한 달 만에 개봉관이 3천 개로 늘었고, 14주 연속 박스오피스 톱10에 들어 미국 독립예술영화의 명가 A24의 역대 최고 흥행작이 됐습니다. 팬데믹 와중에도 제작비의 4배인 1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저예산영화의 돌풍에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았던 터라 저도 이 영화의 국내 개봉을 손꼽아 기다려왔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국내 팬들에게는 주로 액션 배우로 알려진 양자경. 할리우드 진출 이후 그녀의 첫 주연작입니다. 그러나 “에에올원”은 액션뿐 아니라, 코미디, 어드벤처, SF, 드라마가 뒤섞인 하이브리드 장르 영화로, 액션 배우에서 시작해 폭넓은 배역을 소화하며 경륜이 무르익은 배우 양자경의 매력을 십분 보여줍니다. 



Part1. Everything


미국으로 이민 와서 빨래방을 운영하며 사는 에블린(양자경)은 글자 그대로 ‘사면초가’에 처했습니다. 사람만 좋지 물러 터진 남편(키 후이 콴)은 이혼 서류를 내밀고, 비딱선을 탄 딸(스테파니 수)은 백인 여성과 사귀는 중입니다. 중국에서 방문 온 아버지는 아침밥을 빨리 안 준다고 성화고, 국세청에서는 빈틈없는 조사관 디어드리(제이미 리 커티스)가 증빙서류가 이상하다며 빨래방을 압류하겠다면서 압박해옵니다. 게다가 빨래방에서는 이용자들의 불평과 말썽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국세청으로 조사를 받으러 간 에블린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갑자기 다른 평행 우주에서 온 전사로 바뀐 남편으로부터 이상한 얘기를 듣습니다. 조부 투파키라는 빌런 때문에 멀티버스의 안정이 무너지기 직전인데, 이걸 막을 사람이 바로 양자경이라는 겁니다. 이때부터 영화는 두 시간여를 미친 듯이 멀티버스를 넘나들며(in the muitiverse of madness) 질주합니다.


  끝도 없는 멀티버스로 ‘버스 점프’를 하는 양자경은 아버지가 반대하던 남편과 결혼해 중국을 떠나던 시절로 돌아가기도 하고, 어린 딸과 행복하게 살았던 세계를 보기도 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화려한 은막의 스타가 된 자신이 살고 있는 멀티버스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인생의 작은 선택이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 것을 안 양자경은 “아버지 말대로 남편을 따라가지 말 걸”하는 후회를 하기도 하지요. 이 대목에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란 시가 떠올랐습니다.  

       

지금부터 오래오래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지나간 길 택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가지 않은 길-미국대표시선>(손혜숙 옮김, 창비, 2014)


     “에에올원”에서 양자경의 남편 역으로 나오는 키 후이 콴은 “인디애나존스:마궁의 사원(1984)”과 “구니스(1985)” 등에서 큰 사랑을 받은 아역 배우 출신입니다. 지금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지만 당시 할리우드는 아시아인에게 배역이나 캐릭터 등에서 차별적이었죠. 그는 배우로서 미래를 포기하고 스태프로 직업을 바꿔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수십 년 동안 무대 뒤에서 활약하다 앙자경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을 보고 영화배우로 복귀를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에에올원”의 성공으로 디즈니의 “로키 시즌2”에 캐스팅됐죠.   


Part2. Everywhere


"에에올원”의 멀티버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 있습니다. 바로 생명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멀티버스, 제가 이름 붙이길 ‘황야와 바위의 멀티버스’입니다.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메마른 대지의 절벽 위에 바위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릅니다. 하나는 에블린(양자경)이고 하나는 딸 조이입니다. 이 평행 우주에서는 두 사람이 무생물로 존재한다는 발상이 신선합니다. 서양의 멀티버스와는 다르겠지만 동양의 윤회도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에서 눈 달린 두 바위는 자막으로 이야기합니다.  

  

에블린 바위: 모든 걸 망쳐 놔서 미안해
조이 바위: 여기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그냥 바위가 되는 거야
에블린 바위: 내가 바보처럼 느껴져.
조이 바위: 새로운 발견을 할 때마다 알게 돼. 우리는 모두 작고 어리석다는 것을. 그게 인간이야. 


기법도 비주얼도 영화 전체의 톤앤매너와는 다르게 설계된 이 장면과 대사가 이상하게도 얼마나 위안이 되던지요. 맞습니다. 잘난 우리 인간은 때로는 모두 어리석습니다. 인스타그램에는 바로 이 장면에서 쓰고 있던 마스크가 묵직해지도록 오열 수준으로 울었다는 관객도 있더군요. 이 황량하지만 아름답고 홀가분한 장면에서는 유치환의 ‘바위’라는 시가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수많은 멀티버스 속 지지고 볶는 개개의 생에서 벗어나(개개의 생 하나하나만도 얼마나 복잡한지요) 묵묵한 바위의 생이 우러러 보였달까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精)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生命)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이 영화의 중요한 미덕 가운데 하나는 양자경의 재발견입니다. 1985년 “예스마담”으로 데뷔한 이래 “폴리스 스토리3(1992)”, “007 네버다이(1997)”의 본드걸, “와호장룡”(2000), 마블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에 이르기까지, 저는 그녀를 백허그한 악당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머리 위로 뻗는 180도 발차기로 그대로 두부를 강타해 물리칠 수 있는 쿵푸 액션 배우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생활에 찌든 중년 여성, 화려한 배우, 무림 고수 등의 다양한 배역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며 그야말로 ‘인생 연기’를 펼칩니다. 특히나 종종걸음과 굼뜬 몸짓, 어수룩해 보이는 표정으로 생활 연기를 펼치다가도 어느 멀티버스에서는 단련된 동작과 선이 돋보이는 자세로 액션 배우의 본색을 보여주는 데에서는 온갖 풍파를 겪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원숙한 여배우의 풍모가 드러납니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처럼 말이죠. 그녀는 올해로 환갑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실제로 홍콩에서 활약하던 배우 중 거의 유일하게 할리우드에 착근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녀도 할리우드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털어놓았습니다. 할리우드 동료들이 자신의 연기를 고려 대상으로조차 생각하지 않아 상처를 받기도 했다는 겁니다. 


““에에올원”의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그 오랜 시간 내가 기다려온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주로 아시아에서 온 전문 액션배우로 여겨졌지만 난 웃긴 사람이 될 수도, 진지한 사람이 될 수도, 슬픈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영화는 마침내 내가 이 모든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라고 누군가 이해해주는 기분이었어요."  


Part3. All at Once


살짝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어서 정체를 밝히지는 않겠지만 “에에올원”의 빌런인 조부 투파키는 세상의 진실을 알아버린 빌런입니다. 그 진실은 다름 아닌 “아이고 의미없다(“The truth is that nothing matters”)입니다. 그래서 “희망은 결국(eventually) 사라진다”며 모든 것을 베이글 블랙홀로 빨아들이려 하죠. 꿈과 희망, 성적표 등 인생에서 추구한 모든 것 뒤에는 결국 허무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보는 쪽이죠. 이 주제 역시 유사 이래 반복되고 있는 철학적 이슈입니다. 저 역시 끊임없이 뇌리 깊숙한 곳에서 구역질하듯 시시때때로 올라오는 저 질문에 시달릴 때가 적지 않습니다.


      최근 9년 만에야 단편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을 낸 소설가 김연수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10월 7일 자) “40대의 10년가량 비관에 휩싸였다”고 말했습니다. ‘더 나빠지는 세계’를 버텨야 할 까닭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고요. 그래서 북에 남았으나 차마 시를 쓸 수 없었던 백석처럼 한동안 소설을 쓰지 않는 쪽을 택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김 작가는 신작 속 단편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에서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50대에 접어들어 변신한 듯한 자신을 이렇게 대변합니다. 


“하지만 난 비관주의자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가 도움이 돼. 비관적이지 않으면 굳이 그걸 이야기로 남길 필요가 없을 테니까…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것도 자주.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 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P.120-121)


     “에에올원”에서 철 없이 사람만 좋은 양자경의 남편 레이먼드(키 후이 콴)도 말하죠. “모든 실망과 전전긍긍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사람들은 무섭고 혼란스러워서 싸우려고 하는 거야”, “내가 세상을 밝게 보는 건 전략적인 거야. 이게 내가 살아남은 방식이야” 남편의 이 얘기를 들은 양자경의 액션 씬이 얼마나 유머러스하게 연출됐는지 스크린에서 확인해 보셨으면 합니다. 


     이 영화를 오랫동안 기다려왔지만 저도 처음엔 생각만큼 재밌지도, 멀티버스를 따라가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한 줄 평처럼 “야단법석 왁자지껄 아수라장 대환장 파티”에 끝내 정신줄을 잡지 못해 뭘 보고 나온 건지도 헷갈릴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2시간 20분에 이르는 영화를 다시 봤습니다. 이 글을 읽으셨다면 아마 조금은 따라가기 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딱 제목 같은 영화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양조위의 화양연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