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이지 않는 마음' 이라는 말이 인기 절정이다. 원래는 지난 달 열린 롤드컵(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챔피언십)에서 약체팀 DRX가 우승까지 가는 과정에서 주장인 데프트(김혁규)가 한 말에서 비롯됐는데, 카타르 월드컵에서 주장 손흥민이 이끄는 한국팀이 선전하면서 더욱 널리 퍼졌다.
'꺾이지 않는 마음'이 '불굴의 마음', '포기하지 않는 마음'과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과거에 많이 쓰던 '불굴의 마음'은 굳센 의지로 무조건 돌파하고 말겠다는 투지가 강조된 걸로 들리는 반면, '꺾이지 않는 마음'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뉘앙스가 많이 느껴진다. 휘어지더라도 꺾여서 부러지지는 않겠다는 마음, 지더라도 지지 않겠다는 역설적인 심정이 담겨있다고나 할까.
'꺾이지 않는 마음'을 담은 영화라면, 개인적으로는 우선 두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먼저 "쇼생크 탈출(1995)". 주인공인 앤디(팀 로빈스)는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악명 높은 주립교도소 쇼생크에 종신 수감된다. 화이트 컬러 출신으로 감옥 안에서 온갖 험한 일을 당하는 그는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음악과 자유를 위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이십 년 가까이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는 아주 자그마한 망치로 조금씩 조금씩 감옥 벽을 파내고 결국 탈옥에 성공해 교도소의 비리를 세상에 알린다.
또 한 편은 윌 스미스 주연의 "행복을 찾아서(2007)"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주인공 크리스는 지긋지긋한 가난에 지친 아내가 떠난 후 혼자 어린 아들을 돌보며 직업도 구해야 하는 무일푼의 가장이다. 노숙자 쉼터조차 구하지 못하는 날에는 공중 화장실에서 아들과 잠을 청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크리스는 6개월 동안 무급인턴으로 주식중개일을 배워 결국 취직에 성공한다. 고객에게 전화 한 통을 더 돌리기 위해 화장실 갈 시간마저 줄이려고 물 한잔도 마시지 않으려는 장면 등은 눈물 겹다. 그의 '꺾이지 않는 마음' 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성공을 위해 남을 짓밟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려는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번 월드컵은 적어도 나에게 '손흥민의 그 순간'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 같다. '그 순간'은 물론 '꺾이지 않는 마음'의 순간이기도 했지만, 나는 약간 다르게 느꼈다.
포르투갈의 코너킥을 수비수 김문환이 머리로 걷어 낸 공을 잡은 손흥민은 특유의 드리블로 약 70m를 질주하면서 총 3번을 뒤돌아 본다. 우리 진영에서 한 번, 중앙선 부근에서 한 번, 그리고 마지막 상대 진영 페널티박스 바로 앞에서 한 번.
나는 거기서 망설이는 마음, 머뭇거리는 마음, 그리고 끝내는 헤.아.리.는. 마.음.을 본다. 조별 리그 베스트 어시스트(폭스 스포츠)로도 뽑힌 손흥민의 최후의 패스는 '위대하고 단호한 결단'이었지만 (오른발 인사이드 킥으로 결연하게 스타카토 리듬으로 찔러주는 장면을 다시 확인해보시길) 나는 그 짧은 순간에 펼쳐지는 여러 개의 평행우주를 느꼈고, 그걸 하나의 우주로 통합해낸 축구 장인의 모습에 전율했다. 그 순간만큼은 축구의 신이 손흥민에게 재림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BBC스포츠에서 이 경기를 중계하던 잉글랜드 국가대표 출신의 리오 퍼디난드와 전 토트넘 감독 포체티노도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 완벽한 세기로 패스할 곳을 찾아냈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라고 극찬했다.
16강 진출이 거의 좌절되기 직전인 후반 추가 시간- 적진에 혼자 뛰어 들어간 손흥민은 앞 뒤로 7명의 수비수에 둘러싸여 사실상 고립무원(孤立無援) 상태였다. 이 순간 손흥민의 머리 속에는 온갖 상념들이 스쳐 갔을 것이다. 공을 키핑하면서 시간을 끌 것이냐, 한번 더 돌파를 시도할 것이냐, 아니면 어떻게든 슛을 때릴 것이냐 (그 위치는 ‘손흥민 존’과 비교적 가까웠고 그는 ‘킬러’다. 그 자신도 알고 있다)
마스크를 써서 시야도 불편했을 손흥민은 마지막으로 힐끗 뒤를 돌아봤다. 황희찬이 달려오고 있었다. 황희찬이 달려오는 타이밍에 맞는 패스를 할 수 있을지도 불분명했지만, 세 명의 수비수가 앞에서 가로 막고 있었기 때문에 전진 패스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잠시 볼을 잡고 기다리던 손흥민은 수비수 다리 사이로(!) 정확한 타이밍에 황희찬에게 패스를 연결했다. 그것은 16강을 향한 꺾이지 않는 마음이기도 했지만 끝내는 '헤아리는 마음'이었다.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인 자신도 직접 해결할 수 없는 상황임을, 동료를 믿고 반드시 이 볼을 전달해야 할 상황임을, 이것이 사실상 한국팀의 마지막 기회임을, 손흥민은 찰나의 순간에 헤아렸다. 그 패스는 그래서 실력과 인품을 겸비한 선수만이 해낼 수 있는 패스였다. ‘고트(Greatest Of All Time)’를 노리고 메시를 제칠 욕심만 가득 했던 호날두는 할 수 없는 패스였다.
ESPN은 이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순간 역습을 이어 나가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축구 지능, 어떻게든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밀려올 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침착함, 수비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그 사이로 패스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거기까지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전부라는 동료들에 대한 신뢰. 바로 그 순간이 훌륭함과 위대함을 가르는 짧은 순간이었다." (The footballing intelligence to understand that there was only one possible way he could continue this counter and that it necessitated waiting. The calmness to do nothing when the overwhelming urge must have been to do something, anything. The belief in himself that even if surrounded by defenders, he would be able to thread that ball through. The faith in his teammate that that's all he had to do. It's the kind of small moment that separates the very good from the great)
스포츠는 종종 '각본없는 드라마'로 불린다. 그런데 2022년 카타르 월드컵 H조 조별예선 3차전 포르투갈 전에서 나온 손흥민의 인사이드 킥 패스는 정말이지 '영화적인 순간'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그 미장센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그 순간이 영웅적인 순간이어서가 아니라 헤아리는 마음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