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ditor M Dec 26. 2022

"그녀가 말했다"의 저널리즘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1976)” 
“업 클로즈 앤 퍼스널(1996)”
“인사이더(1999)”
“굿 나잇 앤 굿 럭(2005)”
“스포트라이트(2015)”
“트루스(2015)”
“더 포스트(2017)”
“그녀가 말했다(2022)”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저널리즘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들입니다. 특히 로버트 레드포드는 40대일 때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에, 60대에는 “업 클로즈 앤 퍼스널”에, 그리고 80대에는 “트루스”에 기자 역할로 등장해 눈길을 끕니다. 


로버트 레드포드 외에도 더스틴 호프만, 미셸 파이퍼, 알 파치노, 러셀 크로우, 조지 클루니, 마이클 키튼, 마크 러팔로, 케이트 블란쳇, 메릴 스트립, 톰 행크스 등 당대의 명배우들이 이 언론 영화들의 주연을 맡았습니다. ‘의회는 언론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 수 없다’는 미 수정 헌법 1조를 향한 미디어·엔터테인먼트업계의 존경심을 보여준다고 하면 과잉 해석일까요? 


이 영화들의 배경이 되는 언론은 신문과 방송을 망라하는데,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과 “더 포스트”는 워싱턴포스트를, “스포트라이트”는 보스턴글로브를, “인사이더”와 “굿 나잇 앤 굿럭”, “트루스”는 CBS에서 벌어진 실화를 소재로 합니다. 


이 영화들 중 개인적으로 ‘저널리즘 3부작’으로 꼽고 싶은 영화들이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유명한 탐사 보도들을 소재로 하고, 가장 근래에 개봉했던 영화들이기도 합니다. 보스턴 지역에 만연한 카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다룬 “스포트라이트”, 부시 대통령의 군 병역 특례 의혹을 소재로 한 “트루스”, 그리고 지난달 말 개봉한 “그녀가 말했다”가 바로 그 영화들입니다.

  

그녀가 말했다의 주인공인 메건 투히와 조디 캔터 (제공: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


“그녀가 말했다”는 다른 두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배우들이 영화를 이끌어가지만, "스포트라이트"와 "트루스"가 다룬 사건보다 훨씬 더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저널리즘을 다룹니다.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수십 년 간에 걸친 성폭력 사건을 폭로해서 '미투 운동'을 촉발한 뉴욕타임스의 탐사 보도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애슐리 쥬드, 귀네스 팰트로 같은 유명 여배우부터 무명의 배우 지망생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제작사 임원부터 말단 직원까지. 이들을 대상으로 수십 년 동안 성폭행과 성추행을 일삼던 ‘하비’에 대한 이야기는 할리우드에 쉬쉬하며 널리 퍼져 있었고 많은 언론인들이 이를 보도하기 위해 애썼지만 하비의 집요한 (법률적·경제적) 방해와 협박 속에서 묻혀 있었습니다. 


언론을 다룬 많은 영화들이 극적 긴장감을 위해 설탕을 한 스푼씩 넣기도 하지만, ‘저널리즘 3부작’ 중 “스포트라이트”와 “그녀가 말했다”는 에스프레소 같은 영화입니다. 특히 “그녀가 말했다”는 주어+서술어로 간단하게 구성된 제목처럼 건조하게 현실 언론의 세계를 핍진성있게 펼쳐나갑니다. 그것은 이 영화가 뉴욕타임스 탐사보도 기자인 조디 캔터, 메건 투히의 하비 와인스타인 취재기인 동명의 책을 거의 그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와 책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사실의 언어’를 이끌어내기 위한 뉴욕타임스의 팀 플레이와 진실을 이끌어내기 위한 두 여기자의 ‘설득의 언어’였습니다. 조디 캔터와 메건 투히 두 기자는 ‘보도할만한 이야기(publishable story),’ 즉 사실의 언어를 이끌어내기 위해 실명 증언과 서면 증거들을 수집하면서도, 진실을 이끌어내기 위해 누구보다 뜨겁게 취재원들에게 설득의 언어를 펼쳐 나갑니다. 그리고 뉴욕타임스라는 조직은 기자와 에디터, 경영진이 마치 한 몸처럼 똘똘 뭉쳐 거물 ‘적폐’에 맞서 나갑니다.  


1. 사실의 언어


- 여배우들이 기사화에 동의할 가능성은 있나?
- 지금은 운만 떼놓은 상태예요. 
- 아직은 호텔방 사건에 관한 진술만 있지 그걸 뒷받침할 증거가 없잖아.
- 혼자가 아니라는 걸 다들 입을 열 거예요. 뭉치면 안전하니까. 
- 서면 증거는 없고? 이대로는 기사 낼 수 없어(We do not have a publishable story). 


서로 거의 몰랐던 조디와 메건 기자를 한 팀으로 묶어준 뉴욕타임스의 탐사보도 에디터인 레베카 코벳은 기자들에게 냉정하게 말합니다. 피해자들의 증언이나 증거 같은 ‘사실의 언어’가 없다면 기사는 낼 수 없다고 말입니다.


논픽션 책 “그녀가 말했다”에 나오듯이 저널리즘의 영향력은 '특정성'에서 나옵니다. 취재하는 사건에 관련된 ‘이름, 날짜, 증거, 그리고 패턴’을 기사에서 밝히는 겁니다. 코벳은 피해 여성들이 기사화에 동의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이 필요하냐고 기자들에게 계속 묻습니다. 하비 와인스타인과 그의 호텔방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실명 증언과 증거를 요구하는 겁니다. 


성폭력 사건 피해자들의 실명 증언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아는 코벳은 조디와 메건의 취재가 끝내 엄청난 양의 호텔방 이야기만 남기고 기사화가 되지 못할 것을 걱정합니다. 또 기자들이 한두 명의 여성을 설득하더라도 ‘그는 이렇게 말했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거죽만 불편부당한 보도로 흘러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코벳은 하비 와인스타인 사건을 넘어 미국 사회에 성폭력을 만연하게 하는 시스템을 찾아보는 데까지 나아가 보자고 기자들을 독려합니다. 


코벳이 ‘사실의 언어’를 위해 기자들을 쪼기만 한 건 아닙니다. 기자들이 어느 날 와인스타인컴퍼니에 재직했던 한 목격자가 쓴 내부고발용 메모를 입수합니다. 목격자와 그의 변호사에게 연락하자 그들 역시 익명을 요구합니다. 코벳은 기자들을 대신해 직접 그들과 통화하면서 익명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합니다.


“죄송해요, 힘드신 거 압니다. 내용을 모두 기사화하진 않을 거예요. 당신이 어떤 정보도 제공한 적 없다는 것도 명확히 할 거고요. 하지만 신뢰성을 위해 이름은 넣을 생각입니다. 성폭력 피해자시면 당연히 익명으로 해야겠지만 목격자 입장이라면 메모 작성자의 이름을 밝히는 게 기사의 신뢰성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취재기자, 편집자, 편집국장, 법무실장이 함께 모여 하비 와인스타인 측과 통화하는 장면 (제공: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

코벳 외에도 당시 뉴욕타임스 탐사보도 전체를 담당하던 에디터인 맷 퍼디와 편집국장 딘 바케이도 수시로 기자들에게 하비 와인스타인과는 절대 '오프 더 레코드'로는 만나지 말라는 등 주의해야 할 점을 조언하는가 하면, 변호사들을 잔뜩 대동하고 회사에 찾아온 하비 와인스타인 일행을 함께 상대하며 기자들을 지원합니다. 부사장이자 법무실장인 데이비드 맥크로 역시 소송하겠다는 하비 측의 법률적 협박에 "법정에서 보자"며 강력하게 맞대응합니다.


뉴욕타임스의 이런 팀플레이는 영화의 마지막, 마침내 기사를 출고하는 장면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조디와 메건 두 명의 취재 기자와 딘 바케이 편집국장을 포함한 세 명의 에디터가 모두 모니터 앞에 모여 서서 3천 3백 단어의 최종 기사를 함께 검토합니다. 헤드라인부터 마지막까지 다 훑어 내려간 이들은 서.로.의. O.K.를. 받.은. 뒤. 담당자가 발행 버튼을 클릭하는 장면을 지켜봅니다. 전세계적인 미투 운동을 몰고 온 기사가 출고되는 순간이었습니다.  


2. 설득의 언어


-아무래도 그에게 당한 여자들이 꽤 여러 명인 것 같은데 다들 쉽게 그 얘기를 못해. 나한테 얘기한 사람은 비공개를 원했고. 네가 (성폭력을 다룬) 예전 기사를 쓸 때는 어떻게 취재원들을 설득한 거야?

-그게 참, 쉽지 않지. 다들 겁에 질려있잖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  “과거에 겪으신 일을 제가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함께 다른 피해자가 나오는 걸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냥 솔직하게 말한 거지.


하비 와인스타인은 귀네스 팰트로, 맷 데이먼, 제니퍼 로렌스 같은 젊은 배우들을 발굴해서 스타덤에 올리고 ‘아카데미 작품상 트로피를 자기 몫으로 다섯 개 거머쥐었을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까지도 한아름 안겨 준’ 할리우드 거물이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미국에 배급하기도 했습니다) ‘하비’의 피해자들, 즉 조디와 메건의 취재원들은 공개적으로 증언하거나 실명으로 인용되는 것을 특히 극구 꺼려했습니다. 


다른 사건의 성폭력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하비의 피해자들이 더욱 그러했던 것은 하비가 이들에게 합의금을 주고 어떠한 경우에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계약서로 입막음하는 '시스템'을 유지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코벳이 기자들에게 파헤쳐 보라고 지시했던 이른바 ‘시스템’은 수십 명에 이르는 피해자들의 변호사들마저 합의금을 받고 마무리하는 게 최선이라고 자신들의 의뢰인을 설득하게 만들었습니다. 


조디와 메건은 필사적으로 피해자들을 설득해 나갔습니다. 뭐든지 한번에 설득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사실의 언어로 가는 길은 설득의 언어로 포장돼야만 했습니다. 거절당하고, 쫓겨나고,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할 때가 훨씬 많았지만 두 기자는 언제나 예의를 갖추고 상대편의 입장을 이해한다며 설득했습니다.

     

-괜히 개입해봤자 변하는 것도 없잖아요. (피해자)

-저는 아마존, 스타벅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성차별 문제를 고발했고 그 후 많은 게 변했어요. 타임스의 기사 때문에 그들이 정책을 바꿨습니다. 하지만 (인터뷰를) 거절하신다면 그것도 이해합니다. 책 출간 잘 되길 바랍니다.(조디)


이후 이 피해자는 생각을 바꿔 조디를 만납니다.


한편 16년 여 전 하비가 운영하던 미라맥스사에서 성추행 신고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 낸 메건은 겨우 겨우 캘리포니아주 담당 기관에 전화하지만 ‘내부 규정’이라는 벽에 부닥칩니다. 메건은 포기하지 않고 심드렁한 담당자를 설득합니다. (이 부분은 책보다 영화가 더 잘 묘사했습니다)

       

-2001년 이후 미라맥스에 대한 소송 건이 한 건 있었는데 당일에 종결 됐어요. 고소인이 소송을 제기했다고 써 있는데 서류는 없어요. 뭔가 앞뒤가 안 맞죠. 혹시 아시는 거 없나요?
-없어요. 기록이 파기됐을 거예요. 
-진짜요? 왜요? 
-저희 규정이 그래요. 3년 뒤에 모든 기록을 파기합니다. 
-왜죠? 
-말씀드렸잖아요. 규정이 그렇다고.
-성폭력으로 고소한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있을까요?
-그건 말씀 못 드려요. 
-그건 또 왜죠?
-규정이 그래요. 이름을 못 밝히게 되어 있습니다. 더 궁금하신 거 있나요?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가해자는 지금도 막강한 지위를 이용해서 누구를 괴롭히고 있을지도 몰라요. 혹시 도와 주실 방법은 없을까요?

(메건은 담당자의 양심에 설득의 언어로 호소했고, 담당자는 도와 달라는 기자의 호소를 끝까지 나몰라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건을 맡은 정부 측 조사관의 이름을 물어보신다면 그건 알려드릴 수 있죠. 딱 이름만요.
-네, 감사합니다.


이처럼 뉴욕타임스 기자들이 구사한 설득의 언어 없이는 사실의 언어들로 이루어진 탐사 보도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진심과 진실에서 말미암지 않고서는 사실은 다가갈 수 없는 그 무엇이었던 겁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실을 통해 진실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통해 사실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설득의 언어는 취재 과정에서만 중요한 건 아닙니다. 기사에서도 설득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독자를 설득하는 언어 말입니다. 건조하게 팩트만을 육하원칙에 따라 늘어놓는다고 좋은 기사가 되지는 않습니다. 


실명으로 피해자임을 증언하는 것을 오랫동안 망설이던 스타 배우 애슐리 쥬드가 조디에게 전화를 걸어옵니다. 그녀가 기사화에 동의한다고 말하자 조디와 메건은 감격해 합니다. 이제 기사가 탄력을 받습니다.


에디터는 기사의 리드는 베버리힐즈의 페닌슐라 호텔방에서 애슐리가 겪은 일로 시작하고, 기사의 마무리도 애슐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끝내라고 기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지시합니다. 잘 써보라고 덮어놓고 채근하는 게 아니라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에 대해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명확하게 구성 방향을 제시한 겁니다. 기자와 독자의 접점에 있는 에디터들이 잘 하고, 잘 해야 하는 일입니다. 


기사 출고 전날 밤, 녹초가 된 조디와 메건, 두 기자를 집에 보내고 날밤을 새며 기사를 손 본 것도 에디터인 코벳이었습니다. 또한 이튿날 기사 출고 직전에 도착한 와인스타인의 성명서를 받아 기사를 수정 보완한 것도 60대 나이인 은발의 코벳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조디와 메건은 “그녀가 말했다” 책에서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와인스타인 사건을 세상에 알린 것이 2명의 여성이라고 말하게 되겠지만 사실 이는 3명의 여성이 한 일이었다’고 씁니다. 또 ‘타임스 편집자 리베카 코벳은 우리의 북극성이다(Rebecca Corbettour editor at the Timesis our true north)’라는 감사의 말도 남깁니다.


'회의적이고, 주도 면밀하며, 번지르르함이나 과장은 질색하는(skepticalscruplousand allergic to flashiness or exaggeration)' 저널리스트 레베카 코벳. 2019년 엘르지와 인터뷰에서, 그녀가 말했습니다.


“최악의 저널리즘 실수들 중 어떤 것은 기자들이 쓴 글에서 틀린 팩트가 하나도 없을 때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기자들이 기사에 자꾸 뭔가를 더할 때 나오지요. 편집자로서 제가 가장 두려운 건 기사에서 본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한 것에 있습니다.”


손쉽게 무수한 정보 더미를 얻을 수 있어서 사실만큼이나 거짓으로 가는 길도 뻥 뚫려버린 소셜 미디어의 시대에 "그녀가 말했다"는 사실로 다가가는 과정은 멀고도 험한 여정이라는 이야기를 사실의 언어와 설득의 언어로 129분 동안 차분하게 쌓아 올립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저널리즘 성공담인 “스포트라이트”와 실패담인 “트루스”도 함께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 ‘언론 3부작’을 보고 나면 현대 저널리즘을 구성하는 사실과 진실의 세계에 대한 시야가 한층 넓어져 있을 겁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바타, 제임스 카메론의 '스펙터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