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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itor M Mar 12. 2023

기술자를 욕되게 하지 말라

어른들은 “사람은 자고로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기술을 배워 놓으면 굶어 죽진 않는다는 얘기였다. 시대가 바뀌어 상황은 좀 달라졌지만 지금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국제기능올림픽이란 게 있다. 세계 각국의 청소년들이 직업적 기술과 기능을 겨루는 대회인데 과거에는 여기서 우승하면 영웅 대접을 받고 귀국할 때 김포공항에서 광화문까지 카퍼레이드도 했다. 기술자들이야말로 한국을 일으켜 세운 산업 역군이었다.


삼성전자는 국내외 기능올림픽을 지난 16년 동안 후원해왔다. 지난해 10월에는 이재용 회장(당시 부회장)이 국제기능올림픽 특별대회 폐회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 넉 달 전에 이 회장은 유럽 출장을 다녀오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2022 국제기능올림픽 폐회식에서 메달을 수여하는 이재용 회장 / 삼성전자 뉴스룸


‘기술자(technician)’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인 ‘테크네(tekhnē)’이다. 테크네는 예술(art), 공예(craft), 기술(skill)의 뜻을 갖는다. 희랍 철학자들은 테크네(기술)를 에피스테메(지식. epistēmē)와 대응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파악했다. 이 단어들은 라틴어에서 각각 아트(artis)와 사이언스(scientiae)로 번역됐고 결국 근대 일본을 통해 ‘술(術)’과 ‘학(學)’ 즉 ‘학술’이란 단어로 정립된다. 우리가 운동선수의 뛰어난 기술에 대해 종종 “그 선수 스윙이 예술이야”같은 표현을 하는 건 기술과 예술이 결국 한 뿌리의 개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사이 기술자를 폄하하는 조어가 유행이다. 바로 ‘법 기술자’란 단어이다. 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부장검사와 인권감독관을 지냈던 정순신 변호사가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되면서, 과거 아들이 가해자인 학교폭력 사건에 대해 그가 온갖 현란한 법적 대응술을 펼쳤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많은 언론들이 '법 기술자'란 단어를 상용(常用)하고 있다. 2016-17년 국정농단 사태 때 김기춘, 우병우 씨 등 검사 출신의 전 청와대 실세들에게 자주 붙여졌던 ‘법 기술자’라는 말이 다시 한번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언론진흥재단의 뉴스데이터베이스를 보면 ‘법 기술자’라는 말이 쓰인 기사의 개수는 2019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 올해는 이제 시작일 뿐이고 ‘정순신 사태’가 벌어진 지도 얼마 안 됐으니 가장 많았던 지난해를 추월할지도 모른다.



  

빅카인즈 '법 기술자' 기사의 연도별 추이


   사실 ‘법 기술자’는 신조어도 아니고 새로운 개념도 아니다. 33년 전인 1990년 대법원 및 법원행정처 국정감사에서 당시 검사 출신의 민자당 강재섭 의원은 “오늘날 법관들은 법률조문을 단순히 해석해내는 한낱 기술자 집단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1990년 11월 30일 자)


1991년 11월21일 자 문화일보는 ‘법학교육 달라져야 한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法기술자」양성에 치중, 기능교육으로 전락해버린 한국 법학교육의 근본적 개혁을 촉구하는 심포지엄이 학계와 법조계의 비상한 관심 속에 열린다.”라고 리드를 뽑았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법 기술자’라는 말은 상대를 낮춤으로써 자신을 올리는 수사이다. 기술자를 은연 중에 낮잡아봄으로써 법조인은 기술자 이상의 집단이라고 주장하는 말이다.


어차피 직업에 귀천도 없지만,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엔지니어와 기술자의 역할과 중요성은 증대해왔다. 오히려 최근에는 너무 일방적으로 기술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그 위험성이 지적되고 인문학적 가치를 돌아봐야 한다는 읍소에 가까운 흐름이 있을 정도다.


기계, 도구, 물건, 상품, 각종 콘텐츠를 만드는 기술자들도 자신의 일과 업을 잘하기 위해서 온갖 철학적 고민, 윤리적 고민, 기술적 고민, 직능적 고민을 하고 그런 것들이 결과물에 반영된다. 그들의 설계와 솜씨와 만듦새로 우리는 풍요로운 문명을 누리고 살며, 단순한 도구의 실용성을 뛰어넘는 예술성에 감탄하기도 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아무 잘못 없는 기술자를 왜 법 뒤에 붙여 소환하는가.


그렇다면 ‘법 기술자’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먼저 특정 직업군이나 직능군을 언급하는 우리의 언어 습관과 수사를 들여다보자. 한국어에는 직업이나 직능군, 또는 집단의 특성을 다루는 다양한 가치개입적 접미사들이 발달해 있다.


먼저 법률가, 건축가, 예술가, 사업가처럼 ‘-가(家)’자가 붙는 직업군이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직업군을 가장 높이 쳐주는 말이다. 그리고 의사, 약사, 변호사처럼 ‘사(師,士)’가 붙는 직업군도 있다. 다음으로 비교적 가치중립적인 표현인 ‘인(人)’과 ‘자(者)’가 있다. 대선이 끝날 때마다 당선자가 맞냐, 당선인이 맞냐 하며 약간의 시비가 따라오기는 하지만 말이다. 기술자, 기자, 학자, 정치인 등이 이에 속한다.


-가, -사, -인, -자를 지나면 이제부터 폄하의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들이 따라온다. ‘-장이’, ‘-꾼’, ‘-(아)치’, ‘-배(輩)’ 등이 그것이다. 대장장이, 노름꾼, 장사치, 벼슬아치, 불량배 같은 용례가 있다. 일상에서 쓰이는 말의 뉘앙스에 따라 굳이 위계를 나누자면 '가>사>인>자(그렇다고 주장한 분들의 주장에 따르자면)>장이>꾼>치=배'쯤 될 것이다.


   포털에서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이게 병원입니까, 장사치입니까?”라는 한 시민의 하소연을 보게 됐다. 의료인, 의사라는 존재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군인만큼 다른 직업보다 더 엄격한 직업 윤리와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는 인식이 있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소위 법조계라고 하는 곳도 마찬가지다. 의사처럼 사람의 생물학적 생명의 다루지는 않지만 검사나 판사 등 법조인은 개인의 사회적, 경제적 생명을 다룬다. 그들의 말 한마디가, 판단 하나가, 다른 직업에 비해 막중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엄격한 윤리 의식과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그들은 어쩌면 근대적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다. 전근대에는 왕만이 그런 권한을 가졌던 것처럼.


그래서 근대 법치국가에서 법을 다루는 직업인들에게 의식(儀式)적으로든, 마음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경의를 표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만큼 그들도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요즘은 오히려 세간의 지탄을 받는 천덕꾸러기가 된 것같다. 대놓고 사익을 위해 법을 이용한다. 딱 ‘모리배’의 사전적 정의와 같다.


[모리배: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사람. 또는 그런 무리]


이런 행위는 국가대표 복서가 깡패짓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더욱이 지금은 ‘사법 만능주의’ 세상이다. ‘사법 만능주의’와 ‘법 기술자’는 동전의 앞뒷면이다. 끌어주고 밀어주는 관계다. 정치인들은 정치의 영역을 포기하고 툭하면 사안을 검찰과 법원의 판단으로 넘기고, 더 웃긴 건 판결이 나와도 인정도 잘 하지 않는다. 이 무슨 국가적 낭비인가?


국회의원들의 구성을 들여다보면 그럴 만도 하다. 21대 국회의원 여섯 명 중 한 명은 법률가 출신이다. 20대 국회도 그랬고 19대 국회도 그랬다. 심지어 지금은 대통령도, 대통령실 인사 상당수도, 여당 대표도 야당 대표도 모두 법률가 출신이다. 대통령실 비서관급(1급) 이상 보직에만 인사기획관, 공직기강비서관 등 7명의 검찰 출신이 있고(검사 출신 4명, 수사관 출신 3명), 정부 장 차관급에도 한동훈 법무부 장관, 권영세 통일부 장관,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등 상당수 검사 출신들이 포진해 있다.

 



   그리하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법 기술자'를 굳이 써야 한다면, 사라져가는 풍부하고 적확한 언어의 결을 가진 우리말도 되살릴 겸 애먼 기술자 욕보이지 말고 ‘법률아치’ 또는 ‘법률모리배’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기술자는 무슨 기술자인가, 그들이 한 기만적 행동은 얌체, 사기꾼, 극단적 이기주의자의 그것일 뿐이다.


1933년 불과 스물여섯살의 나이에 예일대 로스쿨 교수가 되어 40년간 헌법학 교수를 역임하며 형식주의 법학의 추상성과 폐쇄성을 비판한 미국의 법학자 프레드 로델은 “부족 시대에는 주술사가 있고, 중세에는 성직자가 있고, 오늘날에는 법률가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법의 훈련을 받는다고 해서 사람이 더 훌륭한 정의의 판단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사실은 더 나쁘게 될 가능이 크다”라고 책을 써서 주장했다.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1939)” 그의 주장이 80여 년이 지난 뒤에도 검증되고 있는 현실에 우리는 서 있다.


‘법률가, 법관, 일반인도 신중히 고려해야 할 중대한 질문을 던졌지만’..... ‘부정적인 내용들만 두드러져 보이게 하고’, ‘극단적이다’라는 동료 법학자의 비판을 서문에 싣고 있는(중요한 것은 이런 비판까지도 서문에 실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프레드 로델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일반인이 오늘날의 법 제도에 대해 존경심을 품고, 그의 삶을 법률가가 신비한 방식으로 다스리도록 기꺼이 내맡기는 이유는 법의 원리에는 전혀 오류가 없고 그것이 법률가의 손에 가면 정의로운 결과를 낳는다는 세심하게 양육된 신화에 완전히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잘못된 신화다. 그것은 맹목적 믿음으로, 그 기반은 이해가 아닌 공포다. 그리고 공포의 기반은 무지다.

만약 일반인이 법률가와 그들의 법에 대한 냉엄한 진실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지에 사로잡히면 공포를 갖게 된다. 공포를 갖게 되면 경외심을 품게 된다. 이리하여 진실로 의심할 바 없이, 저주받으리라, 법률가들이여!(Woe Unto You lawy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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