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의미 없다…"
2014년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에서 웃자고 시작한 이 유행어 워너비는 금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 다양한 상황과 맥락에서 밈과 짤로 쓰일 정도로 유명해졌다. 특히 인생사에서 '지금 그걸 해봐야 무슨 큰 의미가 있겠냐'는 자조와 허탈, 체념, 달관이 섞인 밈으로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사는가?
어쩌면 이 말 자체가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애초에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 어쩌면 살아지기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유수의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작품들은 결국 이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그들이 내린 답은 다 비슷하다. '인생은 계속된다. 어쨌든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다면 수상작의 기준은 이미 나와 있는 이 답을 얼마나 창의적인 이야기로, 영화적인 비주얼로 그려내느냐에 있다고 하겠다. 아니면 이 답 자체를 뒤집어 버리든가.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말했다.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단 하나, 자살뿐이라고.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라고.
"이니셰린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rin)"는 "쓰리 빌보드(2018)"로 성가를 높인 마틴 맥도나 감독의 신작이다. 생경한 외국어 제목을 대놓고 그대로 갖다 쓰는 요즘 추세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 영화는 어쩔 도리가 없어 보이긴 한다. 글자 그대로 이니셰린이라는 섬의 밴시라는 뜻이다.
오스카 8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고, 영국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에서 작품상과 각본상을 받은 이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 드라마'로 분류됐다. 이 어둡고 기괴하기까지 한 드라마에 코미디라는 레테르를 붙인다면 필연적으로 이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의 말이다. 조금은 낯선 스타일의 블랙 코미디를 구사하는 이 영화에 딱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1923년, 아일랜드의 아름다운 섬 이니셰린.
30대 중반의 파우릭(콜린 파렐)과 50대 후반의 콜름(브랜던 글리슨)은 매일 낮 두시면 동네 펍에서 만나 한잔 땡기며 잡담을 즐기는 절친 사이다. 그러던 어느 날, 콜름이 느닷없이 파우릭을 소 닭 보듯 외면한다. 사실상의 절교 선언.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파우릭은 환장할 노릇이다. (관객들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다)
- 콜름, 내가 혹시 술 취해서 말 실수를 했다면 얘기해줘요, 사과할게요.
- 그런 거 없어. 그냥 더 이상 너를 좋아하지 않는 것 뿐이야. (헐…)
- 어제까지도 나를 좋아했잖아요!
그러나 콜름은 파우릭을 한번 흘낏 쳐다보고는 자리를 떠나 버린다.
사람은 좋지만("nice") 고지식한 데다 약간은 모자라 보이는 양치기 파우릭. (파우릭이 양만 치는 건 아니다. 다양한 동물을 자식처럼 키우는데 그게 나중에 이 영화의 전개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한다) 다음 날에도 끈덕지게 콜름에게 화해 아닌 화해를 시도한다.
드디어 콜름이 입을 연다. 콜름은 바이올린을 켜고 작곡을 할 줄 안다.
"어제 이 부분을 작곡했어. 내일은 두 번째 파트를 쓸 거고, 그 다음 날은 세 번째 파트를 생각해낼 거야. 수요일이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곡이 탄생하는 거야. 그런데 내가 일주일 내내 네 헛소리나 듣고 있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콜름은 갑자기 파우릭이 지루해졌고("dull"), 그와의 '목적 없는 잡담(aimless chatting)'이 '아이고 의미 없어'진 모양이다. (파우릭은 자신이 기르는 당나귀 똥 얘기만 두 시간 동안 콜름에게 늘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파우릭은 그 잡담이 '일상적이고 좋은 수다(good normal chatting)'라고 생각한다,는 게 문제다.
친절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파우릭은 말 시키지 말고 제발 좀 내버려 둬 달라는 콜름에게 이후로도 눈치 없이 줄기차게 접근을 시도한다.
- 콜름, 당신 원래 친절한(nice)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알아요?
- 친절함은 오래 가지 않아 파우릭. 오래도록 지속되는 게 뭔지 아나?
- 빌어먹을 음악은 아니겠죠.
- 음악이지. 그림도 그렇고. 시도 오래도록 살아남지.
- 친절함도 마찬가지라구요!
- 이봐 파우릭, 17세기에 친절한 걸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은 사람 있나?
- 글쎄요.
-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 당시 음악과 모짜르트는 기억해.
아하, 이제 콜름의 본심이 드러나는 건가.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인생의 허무를 느낀 콜름은 후대에 기억될만한 무언가를 남기고 싶을 걸까.
콜름의 결심은 결연하다. 한 번만 더 말을 걸면 양털 깎는 가위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버리겠다고 선언한 콜름은 -도무지 콜름을 이해할 수 없는 데다 눈치마저 없는 파우릭이 기어이 말을 걸어오자-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잘라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점점 위기를 향해 치닫는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엄청난 이야기를 펼쳐낸 마틴 맥도나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관객들이 둘 중 어느 쪽과 자신을 동일시하는지 보는 것이 흥미롭다. 공감되는 캐릭터도 있고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캐릭터도 있을 것이다 (…) 두 주인공의 갈등에 대하여 공동체가 어떻게 반응하고 어느 편을 드는지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밴시(Banshee)'는 아일랜드 전설에 나오는 정령 또는 요정이다. 밴시는 구슬프게 울어서 가족 중 누군가의 죽음을 예고한다. 밴시는 수많은 서양의 예술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어 왔다.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막을 내린 '키키 스미스전'에도 밴시의 이미지를 빌린 작품이 전시된 바 있다.
"이니셰린의 밴시"에는 종종 검은 망토의 할망이 마을 곳곳에서 음산하고 스산하게 서 있는데, 우리는 그 할망이 밴시임을 눈치챌 수 있다. 죽음은 늘 가까이에서 우리를 지켜본다. 밴시는 또한 지켜본다. 친절함과, 친절함 속에 숨어있는 무신경함을. 음악과, 예술이라는 허명(虛名)을. 그리고 어쩌면 '아이고 의미 없을' 잔혹한 고집을.
우리는 카뮈가 서른을 앞두고 던진 질문,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힘들다. 우선, 인생이 뭔지 잘 모르겠으므로.
"이니셰린의 밴시"가 답을 창의적으로 풀어놓은 이야기인지, 아니면 답을 뒤집는 영화인지는 독자 여러분께서 한번 찾아보시길 바란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친절함인가 예술인가? 파우릭과 콜름은 밴시가 내려다보고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각자의 길을 간다.
참고로, 아일랜드의 한적한 바닷가 마을의 풍광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파우릭과 콜름이 매일 낮 술잔을 기울이던 그 허름한 펍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위스키 한잔이나 기네스 한 조끼 걸치다 죽어도 좋겠다 생각할만큼 아름답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일랜드에 언제 가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