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은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두 거물이 있습니다. 하나가 워너 브라더스이고, 또 하나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이하 디즈니)입니다. 두 회사가 태생은 다르죠. 워너 브라더스는 최초의 유성 영화라 불리는 "재즈 싱어(1927)"를 제작한 회사이고, 디즈니는 최초의 발성 '애니메이션'인 "증기선 윌리(1928)"를 제작한 회사입니다.
1928년은 디즈니의 상징과도 같은 미키 마우스가 탄생한 해이기도 합니다. 미키 마우스가 등장하는 "증기선 윌리"의 한 장면은 지금도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의 오프닝 로고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생쥐 한 마리에서 시작됐다는 걸 기억하세요"라는 월트 디즈니의 말처럼, 미키 마우스와 만화 영화로 시작한 디즈니는 2003년 픽사, 2006년 마블 스튜디오, 2012년 스타워즈 시리즈의 루카스 필름, 2019년에는 21세기 폭스사를 차례로 인수하며 세계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런데 디즈니의 오늘을 있게 한 것은 바로 '디즈니 프린세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인어공주를 비롯한 디즈니 공주들과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적절성)'를 씨줄과 날줄 삼아 '디즈니 전(傳)'을 펼쳐볼까 합니다.
디즈니 오리지널 프린세스의 시작이자 '디즈니 클래식'의 첫 번째 공주는 바로 1937년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백설공주입니다. 디즈니의 첫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자 세계 최초의 극장용 풀 컬러 애니메이션인 이 영화는 엄청난 흥행과 함께 애니메이션업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어서 디즈니는 1950년에는"신데렐라"를, 1959년에는 오로라 공주가 주인공인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잇달아 내놓습니다. "신데렐라"를 큰 히트를 기록하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디즈니는 우리에게 동화로 친숙한 유럽의 설화를 대중적인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솜씨를 과시하며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서 위상을 다집니다.
하지만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오로라 공주 등 디즈니 오리지널 프린세스들이 만들어 간 '디즈니 클래식' 시대의 이야기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정치적으로 적절하지 않'습니다.
백마 탄 왕자님의 키스를 받아야 저주가 풀리는 이야기들은 수동적인 여성상을 보여주고, '마침내 왕자님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줄거리 역시 여성 인생의 완성을 결혼으로 놓는 가치관을 드러내고 있다는 거죠. 착하고 예쁘고 하얀 피부의 여성만이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선입견 또한 이때 심화된 것일 수 있습니다.
당시는 할리우드에서 이른바 '화이트워싱'이 벌어지던 시절입니다. (실은 "닥터스트레인지", "공각기동대" 같은 최근 영화에서도 있었죠) '화이트워싱'이란 쉽게 말해 비백인 배우 역까지 백인에게 주는 겁니다. 1956년 작 "징기스칸"에서는 존 웨인이 징기스칸을 연기했고, 1965년 작 "오셀로"에서는 영국의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흑인 분장을 하고 주인공인 오셀로 역을 맡았습니다. 오드리 헵번을 시대의 아이콘으로 만든 유명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에서도 백인 배우가 뻐드렁니를 드러낸 신경질적인 일본인 역할을 합니다. 할리우드 태동기를 다룬 데미언 셔젤 감독의 최근작 "바빌론"에서도 유사한 인종차별적인 장면이 있었죠. 흑인인 트럼페터에게 조명 때문에 피부색이 너무 밝게 나온다며 시커먼 구두약을 얼굴에 바르게 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디즈니는 1966년 창업자인 월트 디즈니가 타계한 이후 7·80년대 긴 침체기를 맞습니다. 인권 존중과 각종 차별 반대를 외치며 서구 사회를 휩쓸었던 68혁명의 시대적 조류도 그동안 디즈니가 큰 흥행 성적을 거뒀던 콘텐츠의 가치관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침체했던 디즈니의 명성을 부활시킨 것도 디즈니 공주였습니다. 디즈니의 28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자 CG 시대 이전 마지막 셀 애니메이션인 1989년 작 "인어공주"의 에리얼은 '언더 더 씨'의 흥겨운 선율과 함께 이른바 '디즈니 르네상스' 시대의 개막을 알렸습니다. (당시 이 영화의 전 세계적인 히트는 아이러니하게도 34년 뒤인 바로 지금의 "인어공주" 실사 영화의 전 세계적인 리뷰 폭탄('Review Bombing'-Deadline지)의 배경이 됩니다)
디즈니는 "인어공주"에 이어 "미녀와 야수(1991)"의 벨 공주, "알라딘(1992)"의 자스민 공주, "포카혼타스(1995)"의 포카혼타스, "뮬란(1998)"의 뮬란 등 X세대가 등장한 시대에 걸맞는, 즉 디즈니 클래식의 공주들에 비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한 공주 캐릭터를 선보입니다.
그중 자스민 공주(아랍인)와 포카혼타스(아메리칸 원주민), 뮬란(중국인)은 비백인입니다. 그들은 남장 여자인 전쟁 영웅이기도 했고, 지고지순한 사랑보다는 자유 연애를 하고 결혼보다는 자신의 꿈과 사명을 이루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하는 공주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주들을 주인공으로 한 '디즈니 르네상스' 영화들은 흥행에도 성공했습니다.
애니메이션 "인어공주"가 개봉하던 1980년대 후반은 'PC(정치적 적절성)'에 대한 언급이 급격히 늘어나던 시대였습니다. 1800년부터 2019년까지 구글이 디지털화한 책 1천만 권 이상을 분석해 특정 말뭉치가 어느 시기에 얼마나 많이 쓰였는지 분석한 구글 엔그램 뷰어를 보면 'PC'라는 말뭉치는 1980년대 후반부터 출현 빈도가 치솟은 걸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디즈니는 다시 이렇다 할 히트작으로 내지 못하는 슬럼프를 겪습니다. 디즈니에 이렇다 할 히트작이 없다는 건 이렇다 할 공주가 없다는 뜻이죠.
반면 '디즈니 르네상스'를 이끌다 쫓겨나다시피 회사를 나온 제프리 카첸버그가 스티븐 스필버그, 데이비드 게펜과 함께 차린 드림웍스의 "슈렉(2001)"은 '정치적으로 적절한' 캐릭터 설정과 흥미로운 스토리로 흥행은 물론 애니메이션으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하며(2편도 칸 경쟁 부문 진출) 화제를 불러일으킵니다.
"슈렉"의 디즈니 비꼬기는 유명하죠. "슈렉"의 첫 장면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동화책이 펼쳐지며 "옛날 옛적에 예쁜 공주가 살았습니다"로 시작해 "공주는 용이 지키는 성의 가장 높은 탑 맨 꼭대기 방에서 진정한 사랑이 나타나 첫 키스를 해주기를 기다렸습니다"까지 나온 뒤에 슈렉이 이 동화책을 북 뜯어 화장실 뒤처리용으로 쓰는 장면으로 끝나죠. 슈렉은 말합니다. "백날 기다려 봐라."
주인공인 슈렉은 백마 탄 왕자가 아니라 (영화 끝까지 변신하지 않고) 못생긴 녹색 괴물이고, 피오나 공주 역시 디즈니의 착하고 예쁜 공주와는 거리가 '겁나 먼' 왈패 같은 캐릭터입니다.
"슈렉" 시리즈가 크게 성공하는 동안 절치부심한 디즈니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애니메이션은 티아나 공주가 이끈 2009년 작 "공주와 개구리"였습니다. 티아나 공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최초의 흑인 공주입니다.
"공주와 개구리"로 시작한 이른바 '디즈니 리바이벌' 시대는 2010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50번째 장편 "라푼젤(Tangled)"과 2012년 "메리다와 마법의 숲(Brave, 픽사 제작)"으로 이어집니다. 라푼젤과 메리다 모두 과거 디즈니의 공주 캐릭터와는 점점 거리를 벌려 나갑니다. 특히 메리다의 평범한 외모는 기존 디즈니 프린세스와 큰 차이를 보였고, 영화 내용도 남녀 관계가 아니라 모녀 관계를 다룹니다.
그리고 "메리다와 마법의 숲"이 나온 이듬해, 드디어 당시 애니메이션 역대 박스 오피스 1위에 오르는 "겨울왕국(Frozen, 2013)"이 등장합니다. 로맨스는 거들 뿐, 자매애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 자신 앞에 놓인 어려움과 책임을 지혜롭고 당차게 헤쳐 나가는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는 전 세계인을 사로잡습니다.
'디즈니 리바이벌'이라 불리는 디즈니의 재도약은 '정치적 적절성'을 적절하게 수용해 '디즈니의 경제적 올바름'으로 연결시킨 결과였습니다.
"백설공주"에서 "겨울왕국"까지 디즈니 프린세스 프랜차이즈 12편을 분석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의 2016년 언어학 논문에 따르면, '디즈니 리바이벌' 시대의 여성 캐릭터 대사량은 24%(공주와 개구리), 52%(라푼젤), 74%(메리다와 마법의 숲), 41%(겨울왕국)로 '디즈니 르네상스'에 비해 증가했습니다. 또 여성 캐릭터의 외모에 대한 칭찬은 38%에서 23%로 감소한 반면, 능력에 대한 칭찬은 23%에서 40%로 증가했습니다.
1975년 창립한 다국적 연예 매니지먼트사인 CAA(Creative Artist Agency)는 지난 2017년, 영화 주요 출연진 중 비백인 비율이 30%를 넘은 영화들이 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영화보다 흥행 수익이 높았다는 보고서를 내놓았습니다.
맥킨지 앤 컴퍼니도 2021년 보고서에서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13.4%에 이르고 이 비율은 향후 몇십 년 동안 계속 증가할 거라면서, 지속적인 인종 불평등을 해결한다면 업계는 연간 100억 달러의 추가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디즈니의 'PC' 변신은 단순히 '정치적 적절성' 때문만은 아닌 겁니다.
디즈니는 2013년 개봉한 "겨울왕국" 1편과 2019년 선보인 "겨울왕국" 2편 사이에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2015)"와 마블 최초의 흑인 슈퍼히어로인 "블랙 팬서(2018)", MCU 최초의 여성 단독 주연 영화이자 로맨스 서사가 없는 "캡틴 마블(2019)" 등 '정치적 적절성'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어 냈고 흥행에도 성공해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이 와중에도 디즈니는 "닥터스트레인지(2016)"에서는 중국 시장을 의식해 화이트워싱을 하는 위선적 행태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PC'의 역풍도 큽니다. 디즈니의 '정치적 적절성'이 도를 넘었다며 격렬히 비난하는 안티팬도 늘었고, "정치적 적절성을 거부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던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에는 'PC 문화'에 대한 반감이 큰 유권자들의 힘이 역할을 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디즈니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원작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이후 34년 만에 실사 영화 "인어공주"가 지금 상영 중입니다. 개봉 후 19일 동안 62만여 명, 디즈니 공주 영화로는 초라한 성적입니다. 이 영화를 둘러싼 가장 큰 이슈는 1989년 애니메이션에서 백인이었던 인어공주를 흑인 여배우가 연기했다는 겁니다. 'PC를 묻힌 블랙워싱'이라는 거죠.
북미에서는 괜찮은 흥행 성적으로 시작했지만 세계적으로도 큰 영화 시장인 중국과 한국에서 사실상 실패해서 이 영화의 최종 성적이 디즈니 기대대로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제 어제 개봉한 일본 시장의 스코어가 관심 대상인데, 만일 또 다른 큰 시장인 일본에서도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둔다면 동북아시아 3국에서 모두 실패하는 셈이어서 그 이유에 대해서는 사회문화적 분석도 필요해 보입니다.
세계 최대의 영화전문 사이트인 IMDB에서는 "인어공주" 개봉 초기부터 이용자들의 별점 메커니즘에 '정상적이지 않은 움직임(unusual activity)'이 감지됐다며 보정을 통한 점수를 노출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 10점 만점에 1점을 준 이용자가 10점을 준 이용자의 두 배가 넘는 40%에 이르지만 IMDB는 보정을 통해 7.2점을 매기고 있습니다. CNN은 지난 8일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비평이 흥행에 영향을 미쳤다'는 자극적인 제목의 보도를 통해 한국과 중국에서 "인어공주"가 저조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이유의 상당 부분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반발 때문인 것처럼 보도해서 논쟁이 소모적으로 흐르는데 기름을 부었습니다.
/ CNN 홈페이지 캡처어떤 예술 작품이든 고정불변의 정전일 수는 없습니다. 위대한 클래식은 그것 그대로 좋지만,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 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흐름에 맞게 변주돼 재탄생하기도 합니다. '인류의 클래식'인 다 빈치의 모나리자도 마르셀 뒤샹과 페르난도 보테로에 의해 각각 'L.H.O.O.Q'와 '12세의 모나리자'라는 작품으로 재해석돼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예술의 효용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데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시대에 발맞춰, 때로는 시대를 앞질러 새로운 사상을 창의하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현실의 제도들이 주지 못하는 성찰을 제공하는 데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정치적 적절성'을 옹호하면 일단 'PC주의자'로 모는 원작근본주의("인어공주"의 경우)나, 영화 속 '정치적 적절함'의 완성도에 이의를 제기하면 무조건 인종차별주의자로 모는 극단의 대응은 토론과 타협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극단은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지금까지 디즈니가 실사화한 디즈니 프린세스는 신데렐라(2015)와 오로라 공주(2014), 인어공주(2023), 벨 공주(2017,"미녀와 야수"), 자스민 공주(2019, "알라딘"), 뮬란(2020)까지 모두 7명입니다. 내년에는 디즈니의 오늘을 있게 한 애니메이션 "백설공주"가 실사 영화로 개봉됩니다.
백설공주(Snow White) 역에는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 스토리"에 주인공으로 나왔던 레이첼 지글러가 발탁돼 촬영을 마쳤습니다. 레이첼은 라틴계입니다. 이 영화가 어떤 완성도를 보여줄지, 또 관객들에게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이 영화가 개봉할 때도 논쟁이야 있겠지만 "인어공주"보다는 진일보한 논쟁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