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 CGV는 극장업계에서 메이저 중의 메이저다. 이 업종은 과점시장이라 CGV와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세 기업이 국내 시장을 삼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CGV가 국내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티켓값을 올려도 일단 CGV가 먼저 올리면 한두 달 뒤쯤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가 슬그머니 따라 올린다.
지난주 CGV가 거의 5년 만에 'CGV 영화 산업 미디어 포럼'을 재개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처음이다. CGV 회원 수는 1천만 명에 이른다. 따라서 CGV가 확보한 관객 데이터는 국내 영화 시장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지표 중 하나다. 하지만 데이터 자체는 원석일 뿐이고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CGV는 이날 자사가 확보한 관객 데이터를 꿰어서 최근 1년 동안의 '영화 소비 트렌드 키워드'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믿보'는 없다"는 것이다. (CGV는 '소확잼'-확실한 재미가 보장된 검증받은 영화 관람 선호-이라는 키워드로 발표했다)
최근 영화계에서는 '믿고 보는 000'이 통하지 않았다. 올여름 시장만 봐도 '쌍천만 감독("신과 함께"시리즈)' 김용화와 '평균 500만 감독("끝까지 간다", "터널")' 김성훈의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다. 지난해 여름에는 '흥행불패' 최동훈 감독마저 "외계+인1"으로 큰 실패를 맛봤다.
'믿고 보는' 영화라면 개봉하자마자 관객들이 극장으로 뛰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최근 1년의 영화 시장을 보면 '평균 관람 시점'이 코로나 직전인 2019년의 10.8일에 비해 4.3일 늘어난 15.1일이 됐다. 개봉한 뒤 보름이나 지나서 특정 영화를 보러 간다는 뜻이다. '와이드 릴리즈(한꺼번에 최대한 많은 스크린에서 대규모로 개봉하는 것)'가 보편화된 블록버스터 배급 방식을 무색하게 하는 변화다.
특히 10대와 20대 관객은 평균 관람 시점 증가일의 전체 평균인 +4.3일을 상회하는 +6.3일(10대), +4.7일(20대)의 변화를 보였다. 이 두 세대로 말할 것 같으면, 코로나 사태 직전만 해도 평균 관람 시점이 전체 평균을 밑도는 유이(有二)한 두 세대였다. "나 그 영화 봤다"라고 누구보다 빨리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세대였다.
예를 들어 2019년 흥행 1위였던 "극한직업"의 경우 20대 관객의 상영 주차별 비중은 개봉 시점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줄어들었는데(개봉하자마자 빨리 보러간다는 얘기), 올여름 개봉한 "밀수"에서는 3주 차가 될 때까지 계속 늘어났다. 한마디로 감독이나 배우를 '믿고 보기'보다는 관객들의 평가, 즉 '직접 보고 온 사람을 믿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다.
CGV가 꼽은 두 번째 키워드는 사실 첫 번째 키워드와 긴밀히 연결된 트렌드인데, 바로 '역주행'이다.
2019년 흥행 3위 "겨울왕국2"와 올해 흥행 2위 "엘리멘탈"의 주차별 관객 유입 상황을 비교해 보면 '역주행'이 뭘 말하는지 바로 알 수 있다.
"겨울왕국2"는 1주 차에 전체 관람객의 42.5%가 몰려 최고점을 기록한 뒤 급격하게 감소하는 전형적인 와이드 릴리즈 개봉형 그래프를 그렸는데, "엘리멘탈"은 4주 차, 즉 거의 한 달 만에 16.9%로 최고점을 찍은 뒤 서.서.히. 감소 중이다. (6월에 개봉했는데 9월 2일 기준으로 흥행 5위다!)
"엘리멘탈"은 개봉 이후 뜨뜻미지근한 반응으로 잘해야 300만 정도가 아닐까 싶었는데 입소문을 타고 700만을 넘어섰다. "엘리멘탈"이 가장 호성적을 기록한 7월에 CGV를 가장 많이 찾은 세대는 29.1%를 기록한 20대였다.
더 놀라운 것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경우였다. 이 영화의 관객 수 그래프는 8주 차까지 역주행 봉우리를 두 번이나 그렸다. 3주 차에 12.3%로 최고점을 찍고 하락한 뒤 다시 상승해 6주 차에 10.7%로 두 번째 고점을 찍었다.
역시 이 배경에는 1주 차에 겨우 12%에서 시작해 8주 차 37%까지 쉬지 않고 상승한 20대의 역할이 컸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사실 30대 이상의 추억이 어려있는 영화인데(3주 차까지 그래프를 보시라) 웬일로 20대가 대거 유입됐다. 왜였을까?
CGV는 세 번째 키워드로는 '서브컬처(라고 쓰고 저패니메이션이라고 읽는다)의 부상'을 언급했다. 올해 2,3,4월은 저패니메이션의 독무대였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473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스즈메의 문단속"은 554만 명의 관객이 봤다. 두 영화를 더하면 1천만 명이 넘는다.
CGV는 '서브컬처의 부상'에 대해 '대중성보단 마니아층 공략 중소형 애니물의 지속된 인기'라는 짧은 설명을 덧붙였는데, "귀멸의 칼날"이나 "명탐정 코난"같은 영화에는 맞는 설명이다. 그런데 "더 퍼스트 슬램덩크"나 "스즈메의 문단속"의 경우에는 마니아층뿐 아니라 일반관객층까지 극장을 찾았다. "스즈메" 역시 20대 관람객의 비중이 매우 크다. 이로써 2019년에 1%에 불과했던 일본 영화의 관객점유율은 올해(9월 1일 기준) 약 16%로 15배가 넘게 약진했다. (상영편수 점유율은 28%로 2019년과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CGV는 '비일상성'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했다. 요컨대 아이맥스같은 특별관 매출이 계속 늘고 있다는 것이다. CGV 전관에서 발생하는 매출액 중 특별관 매출 비중은 2019년 13.4%에서 최근 1년 간 21%까지 높아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특별관은 계속 늘고 있고 특별관 티켓값은 일반관에 비해 비싸기 때문에 매출이 늘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특히 '용아맥'으로 불리는 용산 CGV 아이맥스관은 "오펜하이머"를 상영한 지난달 18일~20일에는 1,700개에 이르는 전 세계 아이맥스관 중 매출 1위를 기록했다고 CGV는 밝혔다.
지금까지 CGV가 꼽은 영화 산업의 새로운 트렌드를 보면 코로나 사태를 전후로 큰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난 2018년 코로나 사태 이전에 마지막으로 열렸던 '2018년 하반기 CGV 영화산업 미디어 포럼'에서 발표됐던 내용을 되돌아보면 의외로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건 없다.
2018년 당시 CGV는 '입소문', '팬덤', '20대'를 영화 시장의 트렌드로 꼽았다. '비일상성'을 뺀다면, 키워드만 바뀌었지 내용적으로는 올해와 대동소이하다. 그렇다면 코로나 전후로 바뀐 현상의 본질은 무엇인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실 외의 것들을 더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마음뿐 아니라 시대를 읽어야 하는 일이라 지난한 일이 되겠지만.
일단 필자의 눈에 들어오는 건 20대라는 세대다. 영상 산업과 관련한 모든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20대는 모두 628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2%에 지나지 않는다. 인구수로 보면 50대>40대>60대>30대의 뒤를 이어 5번째 밖에 안 되는 이 세대가 영화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018년 CGV 자료에 따르면 그해 300만 명 이상을 동원한 한국 영화 "완벽한 타인", "암수살인", "탐정:리턴즈", "독전", "마녀"에서 20대 관객이 차지하는 비중이 40%가 넘었다. 올해 역시 20대는 1월과 5월을 제외한 모든 달에서 CGV 상영관을 가장 많이 찾은 세대였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2022년 보고서에 따르면 2개 이상의 유료 OTT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은 전체 OTT 이용자의 13.9%였는데, 그중 20대가 42.2%로 압도적이었다. 지난해 방송통신위원회 조사에서도 20대의 OTT 이용률이 95.9%로 전 세대 가운데 가장 높았다.
20대는 왜 OTT도 많이 보고 극장에도 많이 갈까? 시간이 많아서? (문화생활에 쓰는) 돈이 많아서? 영화 보는 게 습관화돼서? 원래 그 연령대가 영화를 많이 보는 세대라서?
그들은 왜 어떤 영화에 (갑자기) 몰리고 어떤 영화는 외면하는가? 20대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이것이 필자가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숙제다.
인터넷, 스마트폰과 함께 일상을, 그리고 일생을 살아온 이 세대가 궁금하다. 산업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그리고 인류학적으로도. 그들이 만들어갈 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