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덧 12월입니다. 2023년 한국 영화 시장 흥행 톱10도 거의 정해졌습니다. 남은 변수는 20일 개봉하는 “노량:죽음의 바다”정도로 보입니다.
올해는 팬데믹에서 정상화된 첫 해였습니다. 일상은 회복됐고, (영화 관람) 습관은 형성됐습니다. 올해의 박스오피스가 한국 영화시장의 ‘뉴 노멀’이라고 봐도 당분간 무방하지 않을까요. 지난달 영화진흥위원회가 발간한 ‘2022년 영화 소비자 행태조사’(2023년 판은 내년 이후 발간)를 참고해 2023년 한국인들은 어떤 영화를, 왜, 어떻게 선택했는지 살펴봤습니다.
2023년의 박스오피스 1위~10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지난해 연말에 상영을 시작, 올해로 넘어온 “아바타:물의 길”은 목록에서 제외했습니다)
2020년대의 유일한 천만 영화인 “범죄도시” 시리즈의 세 번째 영화가 단연 1위에 올랐습니다. 전작에 비해 완성도는 현저히 떨어졌지만, 마치 한창 잘 나갈 때의 개콘처럼 관객들의 관성적인 즐거움, 익숙한 재미를 파고들어 울화통이 치미는 세상살이에 핵주먹을 날렸습니다.
이어 “엘리멘탈”과 “스즈메의 문단속”, “더 퍼스트 슬램덩크” 등 애니메이션 세 편이 5위 안에 포진했습니다. CGV의 성별/연령별 예매 분포를 확인하면 이 세 편의 공통점이 보입니다. 관객 중 여성과 20대의 비율이 높다는 겁니다.
“엘리멘탈”과 “슬램덩크”는 여성 비율이 각각 69%, 64%에 이르고 “스즈메”도 56%로 나타났습니다. 20대의 비율도 “엘리멘탈” 34%, “스즈메” 37%, “슬램덩크” 32%로 전 연령대 중 가장 높거나 간발의 차로 2위입니다.
여성, 20대, 애니메이션이 올해 막강한 티켓 파워를 발휘한 건데, 이들을 끌어들인 건 애니메이션이란 외피도 외피지만, 내용적으로는 ‘젊은 여성의 서사’라는 점도 주효한 걸로 보입니다. “엘리멘탈”과 “스즈메” 두 영화의 주인공인 앰버와 스즈메 모두 난관을 용기있게 헤쳐가는 젊은 여성(스즈메는 청소년)입니다.
한편 전형적인 남성 스토리인 “슬램덩크”는 ‘만화의 추억’과 ‘레트로’라는 기획의 명확한 포인트가 위력을 발휘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슬램덩크”는 CGV 연령별 예매 분포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37%)와 “오펜하이머”(32.9%)에 이어 세 번째로 30대의 비중이 높은(32.1%) 영화로 청(소)년기에 원작 만화를 즐겨 봤던 세대와 주요 관람객이 일치합니다.
특이한 것은 남성 서사인 “슬램덩크”의 성별 예매 분포에서 여성이 64%로 남성의(36.2%) 거의 두 배에 육박하고, 20대 비율 역시 31.7%로 40대보다 높아 30대 비중과 차이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이런 현상은 입소문의 위력과 미디어의 이슈화에 영향을 받은 걸로 보입니다.
‘2022년 영화소비자 행태조사’에 따르면 영화 개봉 첫 주에 주로 관람한다는 사람(14%)보다 영화 개봉 후 입소문과 평가를 보고 관람한다는 사람의 비율(59%)이 훨씬 높았습니다.
2019~2022년 개봉 주차별 관람객 수를 보면 개봉 1주 차 관람객 수 비중은 40% 초중반대로 거의 변하지 않았는데, 개봉 3주 차 관람객 수 비중은 13%에서 14.5%로, 개봉 3주 차 이후 관람객 수 비중은 14.6%에서 18.2%로 커졌습니다. 영화 티켓값이 올라가고 스트리밍 서비스가 극장의 보완재를 넘어 대체재로 부상하면서 영화라는 상품이 관객들의 고관여 상품, 가성비를 많이 따지는 상품이 됐다는 방증입니다.
애니메이션 세 작품의 개봉 후 열흘간 흥행 성적을 보면 “엘리멘탈”이 82만 명(최종관객수의 11%), “스즈메”가 134만 명(24%), “슬램덩크”가 65만 명(14%)에 불과해 이 영화들의 흥행에 입소문과 평가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영화가 입소문 전략으로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올해 부동의 흥행 1위 “범죄도시3”는 물론 톱10에 든 대부분의 영화들은 와이드 릴리즈 개봉으로 개봉 초기에 최종 관객수의 상당 부분을 쓸어 담는 전형적인 흥행 공식을 따랐습니다.
개봉 후 열흘 동안 “범죄도시3”는 6백72만 명이 봤고(최종관객 수의 63%), “밀수”는 2백80만(54%),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2백16만(51%), “미션 임파서블” 2백37만(59%), “콘크리트 유토피아” 2백40만(63%), “오펜하이머” 1백88만(58%) 명이 관람했습니다.
(*이 흥행 방정식대로라면 개봉 열흘 동안 3백27만 명을 동원하고 오늘 새벽 4백만 명을 돌파한 “서울의 봄”의 최종 관객수는 5백20만~6백50만 명으로 추산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입소문을 타고 있는 데다가 “노량”과 “아쿠아맨”이 개봉하는 20일까지는 이렇다 할 경쟁작이 없기 때문에 ‘입소문· 개봉시기 보정’을 하면 8백만~9백만까지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서울의 봄”이 올해 흥행 2위까지 올라갑니다)
이는 영화관에 갈 때 ‘즉흥적 관람’(25%)보다는 ‘계획적 관람’(53%)을 한다는 답변이 두 배 이상 많은 ‘영화 소비자 행태 조사’와 맥을 같이 합니다.
“범죄도시3”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미션 임파서블”은 내용 예측이 가능한 프랜차이즈 장르 영화입니다. “밀수”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여름시장 텐트폴 영화로서 톱스타들이 출연하고 대대적인 홍보 마케팅을 했습니다. “오펜하이머”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브랜드와 IMAX 마케팅 등으로 기대감을 한껏 높였죠. 관객들은 이 영화들을 볼지 말지 사전에 ‘계획’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영화를 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이 비교적 명확하니까요.
또 “밀수”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여성 서사이거나 (젊은) 여성 배우가 스토리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한편,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가 적절하게 영화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영화에서 신구 세대가 갈등을 일으키다 마침내 서로 협력해 윈윈하는 스토리가 전개된다면 흥행에 금상첨화입니다. “슬램덩크”에서 주연은 아니지만 안 선생 같은 캐릭터가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듯이 말이죠.
세계 최고의 ‘무비스타’ 톰 크루즈 영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미션 임파서블:데드 레코닝 파트1”는 올해 흥행 톱10에는 들었지만 최종 4백만 관객으로 기대에는 다소 못 미쳤습니다. 반면 지난해 “탑건:매버릭”은 뒷심을 발휘하며 8백만 관객으로 흥행 2위에 올랐죠. 두 영화의 차이가 뭘까요?
“탑건:매버릭”은 구세대에는 추억을, 신세대에는 쿨한 레트로 트렌드를 자극하는 영화인 동시에, 내용적으로도 신구 세대의 갈등과 화합을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전편에 없던 매력적인 젊은 여성 조종사도 등장하고요. “미션 임파서블”에는 없는 것들이죠.
“미션 임파서블” CGV 연령별 예매 분포를 보면 40대가 28%로 가장 높았고 30대(26%), 50대(24%), 20대(21%) 순이었습니다. 올해 흥행 톱10 영화 중 50대 예매율이 20대를 앞선 건 “미션 임파서블”이 유일합니다. ‘미션 임파서블의 톰 크루즈’의 확장성은 내리막길로 들어섰다는 신호로 보입니다. 2년 연속 내한한 톰형의 노력이 머쓱해지는 대목인데, 그만큼 관객들을 극장까지 오게 하기는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있습니다.
영진위 조사에 따르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비율은 해마다 줄어 2022년 65%를 기록한 반면, 스트리밍 서비스 등을 통해 영화를 보는 극장 외 관람률은 97%까지 올라갔습니다.
2022년 한 해 1인당 관람 편수도 극장 관람은 5.1편에 그쳤는데, 극장 외 관람은 16.5편에 달했습니다. 1인당 일 년 영화 관람 편수는 21.6편으로, 매출 1조 8천억 원·관객수 2억 1천6백만 명으로 한국 영화산업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2018년에 비해서도 6편이나 늘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관객들의 욕구는 여전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과거만큼 극장에 안 가는 이유는 이른바 가성비 때문입니다. 가성비는 가격과 품질의 밸런스를 따져보는 겁니다. 영진위 조사에서 사람들은 2021년도 대비 2022년 극장 관람 빈도 감소의 가장 큰 이유로 ‘품질 대비 티켓 가격이 올라서’(28.1%)를 꼽았습니다. 또 향후 1년, 즉 2023년 극장 관람 횟수가 줄 거라고 예상한 사람들이 뽑은 가장 큰 이유도 ‘품질 대비 티켓 가격이 올라서’였습니다.(49.7%)
코로나로 큰 타격을 입은 영화관들이 살자고 내놓은 티켓 가격 인상이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입니다. 영진위 조사에서 관객들이 생각하는 적정 티켓 가격대는 8,000원~10,000원 미만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조사대상자의 38.9%가 선호하는 가격대로 2020-21년 조사 때 33.5%보다 상승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14,000~15,000원대입니다. 게다가 명목 티켓값은 올려놓고 이런저런 할인 쿠폰과 경로를 많이 만들어(포털에서 ‘영화관 할인’을 검색해 보세요) 요령을 아는 사람은 싸게 보고 모르는 사람은 ‘호갱’을 만드는 눈 가리고 아웅도 여전합니다. 그러다 보니 오른 티켓값에 비해 객단가(관객 한 명이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실제로’ 지불하는 금액)는 한참 못 미쳐 주말 11,000원에 머문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한국영화” 7월호 ‘객단가를 아십니까’) 이렇게 되면 영화 제작사와 배급사는 이중으로 손해를 봅니다.
티켓값도 티켓값이지만 가성비를 구성하는 또 한 축인 영화 자체의 품질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진위 조사에 따르면 2022년에 관객들은 월평균 17,779원을 극장 관람에 썼습니다. 그리고 향후 1년, 즉 2023년에는 월평균 30,247원을 극장 관람에 지불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코로나 여파가 완전히 사라진 2023년에는 2022년의 거의 두 배 정도 비용을 극장 관람에 지불할 용의가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올해 한국 영화시장의 매출액이나 관객수는 2022년과 대동소이한 수준에서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그만큼 극장 영화가 티켓값에 부담을 느끼는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특히 한국 영화가 부진했습니다. 2011년 이후 한 번도 내놓은 적 없는 연간 한국 영화 관객 점유율 50%선도 무너져 43%대에 그치고 있습니다. “서울의 봄” 개봉 전까지만 해도 2023년 흥행 톱10에는 한국 영화가 “밀수”와 “콘크리트 유토피아” 두 편 뿐이었습니다.
한국영화 시장의 ‘뉴 노멀’이 정착돼 가는 가운데 “서울의 봄”이 혜성처럼 나타나 막판 분전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와이드 릴리즈형 대작임에도 입소문을 타고 개봉 2주 차 주말 관객이 1주 차 관객보다 많습니다. (“범죄도시3”나 “밀수”도 이루지 못했던 일입니다) 뉴 노멀 시대에 관객들이 기대하는 대작 상업영화의 완성도가 무엇인지 하나의 기준점을 제시하는 영화로 보입니다.
20일 개봉하는 “노량:죽음의 바다”가 한국 영화 위기론이 심각하게 대두됐던 2023년의 막바지를 장식하는 극장골을 넣을 수 있을지, 올해 글로벌 박스오피스를 강타한 ‘바벤하이머’처럼 이 두 편의 한국 영화가 ‘노량의 봄’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한국영화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