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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itor M Dec 18. 2023

"교토에서 온 편지"와 사투리의 풍경

  

피렌체 두오모를 배경으로 선 "냉정과 열정사이"의 두 주인공 / 엔케이컨텐츠

저에게 영화는 여행의 강력한 동인이기도 합니다. "화영연화"를 본 뒤에 벼르고 별러 앙코르와트에 갔었고("툼 레이더" 때문 아닙니다), 피렌체를 여행지로 선택한 건 8할이 "냉정과 열정 사이"(개봉 20주년 기념 상영 중)의 두오모에 올라보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파리 여행 때는 "비포 선셋"에서 제시와 셀린느가 재회한 서점 셰익스피어앤컴퍼니에 가보지 않을 수 없었고, "비포 미드나잇"의 배경인 그리스의 바닷마을 카르다밀리는 여전히 버킷 리스트에 있습니다.


특히 지역의 풍광이('풍경' 아닙니다) 아름답거나, 로컬리티가 강하게 묻어있는 영화일수록 끌립니다. 미국 인디애나주의 소도시 콜럼버스("콜럼버스")와 핀란드 헬싱키("카모메 식당")에 가보고 싶은 이유입니다.


꼭 해외로 가야 하는 건 아닙니다. 이준익 감독의 "변산"을 본 뒤, 그해 여름 휴가지는 전북 변산이었고, 어느 봄에는 군산으로 여행가서 "8월의 크리스마스"를 찍은 사진관에 들렀습니다. 서촌에 살 때는 "건축학개론"에서 수지와 이제훈이 추억을 만들던 한옥을 지나가기 위해 큰길을 놔두고 일부러 골목길로 둘러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겨울, 어떤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 진해에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창밖은 겨울"이라는 독립영화입니다. 벚꽃 철이면 전국에서 온 인파로 북적이는 진해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늦가을의 진해는 약간은 퇴색한 채로, 근대적 풍경을 간직한 한적한 도시였습니다.

  

영화 "창밖은 겨울" 포스터 / 영화사 진진

이 영화에서 젊은 남녀 주인공들은 버스를 운전하고, 탁구를 치고, 시외버스 터미널 매표소에서 일합니다. 하고 싶었던 일과 사랑에 실패하고 고향에 내려와 버스 기사를 하는 남자와 버스 터미널 직원으로 일하는 여자가, 시간이 멈춘 듯한 소도시 진해처럼 느릿느릿 차곡차곡 사랑을 쌓아가는 영화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영화에 눈길이 갔던 건 오래된 동네와 골목길이 살아 있는 소도시의 풍경 외에도 매표원을 연기한 한선화 배우와 그의 자연스러운 의상과 단발, 그리고 사투리 연기 때문이었습니다.


"혹시 저↘ 좋아↗하세요↘?"


바빠 죽겠는데 맨날 매표소에 와서 자신이 맡긴 분실물을 찾으러 온 사람이 있냐고 묻는 남자 주인공에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 경상도 사투리 인토내이션과 단도직입적인 솔직함이 어찌나 매력적이던지요.


지난 주 개봉한 독립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에도 한선화 배우가 주연으로 나옵니다. 어릴 적 고향인 교토를 떠나온 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일본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엄마를 바라보는 세 자매의 시선을 따라가는 영화입니다.


한국말도 배우지 못한 채로 한국인 아버지를 따라 부산 영도에 정착한 엄마는 남편 사후에 억척같이 세 딸을 키웠습니다. 반은 일본인이지만 엄마는 일본인 티를 내서는 안되는 시절을 버텨야 했습니다.


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의 한 장면 / 판씨네마

이 영화는 모녀 사이의 관계를 들여다보는데 그치지 않고, 부산 영도 출신 세 자매의 꿈과 삶을 들여다 봅니다. 첫째 딸(한채아)은 부산의 한 패션 매장에서 일하며 어머니를 돌봐왔지만 자신만 모든 책임을 떠안고 있다는 부담감과 억울함이 있습니다.


- 엄마: 아가(둘째가) 서울서 고생이 많은 모양이더라.
- 첫째 딸: 서울살이가 무슨 벼슬이가?
- 엄마: 고향 떠나면 다 글타…


작가가 꿈인 둘째는(한선화) 서울에서 방송 작가로 일하며 등단을 꿈꾸지만 실패를 거듭하며 약간은 지친 상태로 고향에 내려옵니다. 지역에서 풀타임으로 일해줄 수 없느냐는 지역 방송국의 제안을 받지만 서울에 살아야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망설입니다.


한선화는 이 영화에서 한층 안정된 (사투리)연기로 젊은 세대가 바라보는 지역과 서울의 간극을 잘 보여주고, 과장되거나 희화화되지 않은 실생활 사투리로 영화의 현실감을 높입니다. 엄마 역의 차미경 배우와 첫째 딸 역의 한채아 배우 등 다른 주연 배우들과 감독 또한 부산 출신이라 자연스러운 사투리 연기는 물론, 여행자의 눈으로 포장되지 않은, 생활인/지역민의 눈에서 본 부산 영도라는 공간의 진짜 풍경이 잘 드러납니다.


"창 밖은 겨울(2022)"과 "교토에서 온 편지(2023)"를 보고 나서 한선화의 장편 영화 데뷔작인 "영화의 거리(2021)"까지 찾아보게 됐습니다. 이 영화 역시 부산이라는 '로컬'이 배경인 독립영화이고, 한선화 배우가 바로 이 영화에서부터 사투리를 구사하는 젊은 부산 여성 배역을 맡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거리"는 영화 감독을 하겠다며 서울로 떠나버린 구 남친(이완)과 부산에서도 충분히 영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로케이션 매니저 구 여친(한선화)이 우연히 영화 제작 과정에서 다시 만나 티격태격하며 다시 감정을 만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귄있다'라는 표현을 아시는지요?


지난 해 베스트셀러 "아버지의 해방 일지"에 나오는 전라도 방언입니다. 전남 구례 출신 정지아 작가의 이 소설 덕분에 저는 '귄있다'라는 사투리 말을 알게 됐습니다.


'귄있다'는 거칠게 요약하면 '보면 볼수록 정이 가고 매력이 있다' 정도의 뜻이라고 합니다. 이 밖에도 '말투나 행동이 싹싹하고 붙임성이 있다, 귀염성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네요. 나이지긋한 전라도 사람들은 물론이고 전라도 출신의 30대 이상이면 모두 알고 있는 말인 것 같은데, 저는 금시초문이라는 사실이 저 스스로도 놀라웠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써 볼만한 멋진 뉘앙스와 어감을 가진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저는 아직 이 단어를 적재적소에 정확한 뉘앙스로 사용할 자신은 없습니다.


저 역시 표준어로 균질화된 언어 환경 속에서 살아오다 보니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만 사투리만이 표현할 수 있는 로컬리티, 뉘앙스, 정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말들이 사어(死語)가 되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서, 점점 더 두루뭉술하고 뭉뚱그려지고 있는 대중의 언어(이를테면 뭐든 '대박'하나로 다 통하는)습관에 자극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달 초 타계한 6,70년대 '문예영화의 대부' 김수용 감독의 필모그래피엔 "갯마을", "산불", "토지" 등 명작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방언과 토속어를 살린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또 8,90년대까지도 각 지역의 방언과 토속어 냄새가 물씬 나는 소설이며 TV드라마, 영화가 적지 않았지만 근래에는 비속어와 욕설에 가까운 희화화된 사투리만 오로지 흥미거리를 위해 동원된다는 인상이 없지 않습니다.




걸그룹 출신의 젊은 여배우가 부산 사투리를 쓰는 젊은 여성 배역을 맡아 3년 동안 매해 한 편씩의 독립영화, 그것도 로컬리티가 분명한 영화를 내놓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미지가 고착화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물은 꽤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영화의 거리"보다는 "창밖의 겨울"이, "창밖의 겨울"보다는 "교토에서 온 편지"에서 한선화 배우의 연기가 뛰어납니다. (부산 사투리) 연기도 날로 자연스러워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고 할까요.


한선화 배우처럼 현대물에도 사투리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할 수 있는 젊은 배우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그러러면 로컬리티가 살아 있는 영화들이 꾸준히 나와야 하겠죠. 한선화가 연기한 세 편의 '지역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30대 초반 젊은 감독들의 데뷔작이라는 점, 감독들이 자전적 이야기로 자신들의 고향에서 영화를 찍었다는 점, 그리고 고향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청년들과 서울로 떠난 청년들의 이야기가 함께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이 영화들을 보면서 지역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한 고민과 고뇌를 피상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지역의 사투리로 연기하는 배우, 다양한 로컬의 풍광뿐 아니라 현실도 반영하고 보여주는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지역 문화와 사투리는 다양하다는 그 자체로도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가끔 부산에 갈 때면 거의 부산역과 해운대 근처만 오갔습니다. 그게 부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교토에서 온 편지"와 "영화의 거리"에서 보는 부산은 사뭇 달랐습니다. 이 영화들 속 부산은 관광지일 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공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영화의 거리" 속 주인공 선화는(실제 배우와 배역의 이름이 같습니다) 직업이 로케이션 매니저이니 얼마나 멋진 곳들이 영화에 나오던지요. 언젠가 부산에 가거나 진해에 가면 변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화 속 장소들을 한번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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