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한국영화산업이 천당과 지옥을 오간 한 해였습니다. “범죄도시3”로 기세 좋게 출발했지만 연초부터 저패니메이션의 약진에 눌리며 부진을 면치 못하던 한국영화는 여름 대목에서도 기대 이하 성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가 “서울의 봄”이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한 해 쌍천만 영화에 오르고 “노량:죽음의 바다”가 바통을 이어받으며 기사회생하고 있습니다.
일본 영화는 대약진했습니다. 연초부터 “더 퍼스트 슬램덩크(478만)”와 “스즈메의 문단속(557만)” 원투 펀치가 극장가를 휩쓸더니 이달에는 “괴물”도 관객 40만 명에 육박하며 일본 실사 예술영화로는 깜짝 흥행 중입니다. 일본영화의 올해 한국시장 점유율은 역대 최고인 14%대에 이릅니다.
올해 글로벌 박스 오피스의 압도적인 1위는 우리 돈으로 2조 원 가깝게 벌어 들인 “바비”인데 감독과 주연 배우까지 내한했지만 한국에서는 100만은커녕 58만 명의 초라한 성적으로 흥행 40위 권에 머물렀습니다. 국내에서 인화성이 높은 젠더 이슈를 다룬 영화에 대한 이런 무관심은 다소 뜻밖입니다.
올해 글로벌 박스 오피스에서 1조 원 이상의 흥행을 기록한 영화는 “바비”와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vol.3”와 “오펜하이머” 네 편입니다. 하지만 한국 시장에서는 “바비”외 나머지 3편도 겨우 체면치레 정도를 했습니다.
“씨네멘터리”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2023 올해의 영화’ 열 편을 꼽아 봅니다. 올해 제가 본 1백80여 편의 영화 중에서 ‘추천할만한 영화’, ‘놓치면 후회할 영화’를 추렸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제작비가 얼마 안 되고 카메라워킹이 단조로워도 영화예술만의 미덕을 보여줬다면 저에게는 좋은 영화, 놓치기 아까운 영화입니다. 반면 아무리 제작비를 많이 쏟아부었어도 울림이 없거나, 저를 한 발짝 더 나아가게 하지 못했다면 저에게는 그저 그런 영화입니다. 저의 주관적 리스트지만 국내외 유력 미디어에 실린 ‘올해의 영화’ 리스트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눈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목록 순서는 개봉 순일뿐 평가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나 이제 사무직 여직원이다~” 특성화고 졸업반인 소희는 대기업 콜센터에 실습 나간다고 좋아했지만 현실은 지옥도에 가깝습니다.
소희가 저수지에 몸을 던지기 위해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걸었던 그날처럼 추웠던 2월의 어느 날, “다음 소희”가 한국에서 개봉했습니다. 지난해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콜센터 노동과 청소년 노동에 대한 사회적 발언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백상예술대상과 청룡영화상에서 각본상을 받을 정도로 귀에 쏙쏙 박히는 대사들이 인상 깊습니다.
'학생이 일하다 죽었는데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형사 유진의 분노에 “적당히 하십시다. 그래서요? 이제 교육부 가실랍니까? 그 다음은요?"라는 장학사의 대사가 아직도 귓전을 때립니다.
규슈의 한적한 마을에 사는 소녀 스즈메가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재난의) 문을 닫으러 가는 이야기'. “다음 소희”가 인재(人災)를 다뤘다면 한 달 뒤에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은 천재(天災)를 다룹니다. 올해 흥행 4위, 한국에서 상영된 역대 일본 영화 중 흥행 1위입니다.
서사와 액션, 캐릭터가 잘 구축된 신카이 마코토 애니메이션을 보는 재미가 톡톡했는데, 무엇보다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일본 사회의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다룬 감독의 용기가 돋보였습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재해를 엔터테인먼트로 다뤄도 괜찮을지 스태프들과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일본인의 삼분의 일 정도가 이미 잊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동일본 대지진에 대해서 더 늦게 영화로 만들게 된다면 아무도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을 그려내지 않는다면 지금의 일본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큰 거짓이다,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4월의 “라이스보이 슬립스”도 제게는 올해의 영화였습니다. “미나리” 이후 디아스포라 영화가 많이 나오고 있고 올해에도 “리턴 투 서울”, “킴스 비디오”(엄밀히 말하면 디아스포라 영화는 아닌데 올해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도 상영됐습니다) “프리 철수 리” 등이 개봉했는데, “라이스보이 슬립스(벤쿠버 국제영화제 관객상)”는 그중에서 가장 정서적이고 서정적인 영화였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어린 아들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 온 소영과 학교에서 ‘쌀소년(riceboy)’이라고 놀림받는 아들 동훈. 깊은 병에 걸린 소영이 청소년으로 성장한 아들 동훈을 데리고 한국을 찾아 남편 산소에 절하고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는 이야기인 이 영화는 ‘집(Home)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그리고 그 이상의 상념을 올해 가장 인상적인 '익스트림롱샷'에 먹먹하게 담아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집(House)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인 아파트를 소재로 한국 사회를 해부한 두 편의 영화 “드림 팰리스”(5월)와 “콘크리트 유토피아”(8월)를 ‘올해의 영화’ 목록에 네 번째와 다섯 번째로 올려놓습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두 영화에는 배우 김선영이 각각 주연과 조연으로 나오고 , ‘드림 팰리스’라는 아파트 명 또한 두 편 모두에 등장합니다.
"드림 팰리스(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는 신도시 미분양 신축 아파트에 입주하는 한 싱글 맘이 겪는 일들을 통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참사 농성장의 속살을 용기 있게 드러냈고, 아파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 사회의 풍경 역시 농성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파트는~ (아파트는~) 주민의 것! (주민의 것!)”
서울에 대지진이 일어나 오로지 ‘황궁아파트’ 한 채만 멀쩡히 서있습니다. 때는 겨울, 생존자들은 오직 살아남기 위해 먹을 것과 잘 곳이 남아 있는 황궁아파트로 몰려오는데…
“드림 팰리스”의 상업영화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청룡영화상 감독상)"는 새롭지도, 재미있지도, 의미 있지도 않은 영화만 쏟아내던 한국영화 시장에 모처럼 숨통을 틔운 수작이었습니다. 각본, (앙상블) 연기, 연출이 균형을 이뤘고 특히 이병헌의 연기는 그가 테크니션으로서 절정에 올랐음을 증명했습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20세기 이후 세상을 영원히 바꾼 원자폭탄의 개발을 이끈 "원자폭탄의 아버지'에 대한 전기 영화이자, 크리스토퍼 놀란의 아날로그에 대한 집착을 보여 준 영화입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같은 8월, 광복절에 개봉한 “오펜하이머”는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압도적인 이미지와 사운드, 그리고 정교하게 세공된 각본과 연출로서 할리우드가 여전히 세계 최고의 영화 공장임을, 놀란이 여전히 세계 최고의 영화감독임을 과시했습니다. 미국영화연구소(AFI)와 영국영화협회(BFI)의 올해의 영화 베스트10에도 올랐습니다.
정주하는 산 사나이와 방랑하는 여행자의 삶 중에 어느 쪽이 더 멀리, 더 깊이, 보고 느끼고 배우며 사는 좋은 삶일까요? 이탈리아 알프스를 배경으로 두 친구의 우정과 인생관을 보여주는 영화 “여덟 개의 산(지난해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은 칼럼을 쓰느라 몇 번을 돌려보았던지요. 의기투합하다가도 사소한 일로 토라져 크게 다투고, 다시 안 볼 것 같다가도 만나면 좋은 친구가 되는, 깊고도 얕은 알 수 없는 인간관계를 알프스산과 함께 가을의 초입인 9월에 지켜봤습니다.
10월엔 “플라워 킬링 문”을 올해의 영화에 올려놓았습니다. 평생을 프랜차이즈 영화와, 메이저 스튜디오, 그리고 "테마 파크"와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결국엔 “오펜하이머” 두 배의 제작비를 애플로부터 끌어내서 ‘개인적인 생각과 감정, 아이디어’를 영화에 불어넣은 ‘씨네마 근본주의자’ 마틴 스콜세지 역작이 올해의 영화가 아니라면 어떤 영화가 올해의 영화일까요.
1920년대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벌어진 일련의 인디언 살인 사건을 다룬 이 실화 바탕의 영화는, 스콜세지가 평생 천착해왔던 미국과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이야기로, 역시 미국영화연구소와 영국영화협회의 올해의 영화 베스트10 리스트에 올랐습니다.
다음은 ‘11월에 맞은 “서울의 봄”’입니다. 역설이 되어버린 메타포,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는 44년 전의 현대정치사 영화가 대중들 마음속의 무엇인가를 건드리는 트리거가 됐습니다. 코로나 이후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한 해 한국영화 쌍천만’ 기록을 이끌어낸 “서울의 봄”은 ‘영화만 좋으면 관객은 영화관에 온다’는 가설, 거꾸로 말해 올해 한국영화가 부진했던 이유는 결국 볼만한 영화가 적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입증했다고 봐야 할까요.
영화의 절반 이상이 대화거나 통화인 영화를 이토록 긴장감 넘치게 끌고 간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또한 좋은 배우가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웠습니다.
마지막 작품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과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놓고 저울질하다 “괴물”을 선택했습니다. 두 영화는 올해 칸 영화제에서 각각 각본상과 심사위원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아들이 학교에서 교사로부터 학대를 당했다는 말에 학교로 달려간 싱글 맘 사오리는 학교 측의 이상한 대응에 심증을 굳힙니다. 하지만 교사의 입장에서 바라본 아들은 엄마가 알던 그 아들이 아니었는데…
“괴물”은 같은 사건이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일본 최고의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의 치밀한 설계와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캐릭터 연출로 잘 드러낸 영화입니다. 특히 올해 타계한 영화음악가 사카모트 류이치의 ‘아쿠아’가 흐르는 엔딩은 이 영화를 올해의 영화로 꼽는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렇게 “씨네멘터리” 올해의 영화 열 편을 꼽아봤습니다. 이 중 여섯 편은 “씨네멘터리” 칼럼에서 자세하게 다루었으니 아래에서 연재 탭을 클릭해 쉽게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언급한 열 편 이외에도 “바빌론”, “슬픔의 삼각형”, “이니셰린의 밴시”, “6번 칸”, “말 없는 소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애프터썬”, “어파이어”, “스파이더맨: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괴인”, “티처스 라운지” 등도 2023년을 기억하게 할 영화들입니다.
P.S.
국내 미개봉 영화들을 ‘올해의 영화 10’에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봤던 미국의 독립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와 트란 안 홍 감독의 “프렌치 수프(원제:도댕 부팡의 열정. 칸 영화제 감독상)”가 바로 그 영화들입니다.
영미권에서는 이미 상영한 “패스트 라이브즈”는 미국영화연구소와 영국영화협회는 물론 전미비평가위원회, “버라이어티”, “롤링스톤”, “인디와이어” 등 다수의 미디어에서 올해의 영화로 꼽았고, 한국계 캐나다인 신인 감독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내년 아카데미상 주요 부문의 유력 후보로 점쳐지고 있습니다.
‘두 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한번 읽을 필요도 없다’는 말을 어디선가 봤습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두 번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그런데 지금 스트리밍 서비스(애플TV+)에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가적인 감정이 들어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또 한편으로는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아스라한 감정이 사라져버리거나 퇴색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CJ와 A24가 제작한 이 영화는 내년 3월 국내 개봉 예정입니다. "패스트 라이브즈"와 "프렌치 수프" 두 편을 '올해의 영화 10'에 번외로 넣어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