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프랑스 절대 왕정 시기 ‘왕의 여자’ 가운데 잔 뒤바리라는 여성이 있다.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던 탓에 1917년 《마담 뒤바리》를 필두로 100여 년 동안 수차례나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우리로 치면 장희빈급 정도 되는 인지도의 캐릭터라고나 할까.
프랑스 왕국은 왕의 내연녀를 ‘메트레상티트르’(maîtresse-en-titre)라는 부르며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왕의 첩이 몇 명이든 단 한 명만 지명될 수 있는 메트레상티트르는 왕궁에 살며 왕에게 조언을 하고 외교 사절을 접견하는 등의 권한을 가졌다. 잔 뒤바리는 루이 15세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공식 정부(情婦)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와도 베르사유 궁전의 한 지붕 아래 살았던 그녀의 인생이 또 한번 영화로 만들어졌다. 76회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이번 주 한국에서 개봉한 《잔 뒤바리》라는 영화다. 천한 신분이었던 잔 뒤바리가 어떻게 베르사유궁에 들어가 왕의 총애를 얻게 되는지를 그린다. 그리고 루이 15세, 즉 왕된 자의 삶의 무게와 벌거벗은 권력자의 뒤안길을 보여주는 시대극이다.
근래에 신문들마다 최고 권력자의 치세(治世)와 그 뒷 이야기를 다룬 회고담류의 시대물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중앙일보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회고록을 연재했고, 한겨레신문이 ‘DJ 국정노트’와 ‘참여정부 천일야화’를 연재 중이다.
개인적으로는 ‘DJ 국정노트’를 가장 관심있게 봤다. 21년 만에 공개된 김대중 대통령의 육필 자료로써 일국의 대통령이 어떠한 생각과 자세로 국가를 이끌었는지, 대통령 본인의 생각을 본인의 필치로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DJ의 공과(功過)야 역사가 평가할 것이지만, 나는 이 육필 노트를 보면서 DJ가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 프로페셔널로서 자신의 직업을 대했던 치열함과 성실함에 감명받았다. 권력의 무게도 함께 느꼈다.
(여담 하나. DJ는 초고속 인터넷과 문화 산업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선각자였지만 행서와 초서의 중간쯤되는 필체의 한자(漢字)로 가득한 국정노트를 보면서 ‘역시 옛날 사람은 옛날 사람이네’하는 생각이 들어 슬며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는 노무현 정부 초대 정책실장이었던 이정우 씨의 연재다. 이 전 실장은 노 대통령이 추진하던 한미 FTA를 끝까지 반대했었다. 하지만 이 전 실장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다른 자리에서는 “그래도 이정우가 애국자야”라며 챙겼다고 한다. 이 전 실장은 정권 막바지에 노 대통령이 불러 청와대에 들어가 오찬을 함께 했을 때 ‘대통령이 외로워보였다’고 에필로그에 적었다.
이 연재글과 영화 《잔 뒤 바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았다.
《잔 뒤 바리》를 보면 루이 15세도 외로운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집권 초기에는 ‘친애왕’으로 불렸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부모와 형을 일찌기 전염병으로 잃고 딸 둘마저 요절한 탓인지 자주 불안감에 시달렸다.
“짐이 곧 국가”라고 했던 ‘태양왕’ 루이 14세가 벌여 놓은 재정 적자에 시달렸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눈치도 봐야했다. 국정에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던 첫 번째 ‘공식 정부’ 퐁파두르 부인을 병으로 잃고 난 뒤에는 왕세자와 왕비 또한 떠나보냈다. 우울과 불안에 시달릴 무렵 잔 뒤바리가 나타났고(알고 보면 귀족들의 계획) 왕은 그녀에게 애정을 쏟고 의지했다. 국정은 반쯤 놓았다.
잔 뒤바리는 루이 15세의 애정이 식을까봐 전전긍긍하면서도 외로운 왕에게 때로는 격의 없이 다가서고 때로는 예를 갖춰 감싸면서 환심을 사는 수완이 있었다. 귀족이든 공주든 누구든 왕 앞에서는 뒷걸음질쳐서 물러나야 했지만, 잔 뒤바리는 그게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면서 왕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서 문을 나갔다. 왕은 이를 오히려 귀엽게 여겼다.
하지만 잔 뒤바리는 권력과 사랑의 속성도 알았다. 영화에서 그녀는 시종장에게 말한다. “(왕이) 내게 흥미가 떨어지면 바로 알려주세요. 그 즉시 떠날게요.”
프랑스 정부의 지원 아래 실제로 많은 부분을 베르사유궁에서 찍었다는 《잔 뒤 바리》는 18세기 프랑스 왕실의 문화와 풍습, 제도, 패션 등을 그랬음직하게 재현했다.
절대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벌거벗은 임금님’ 같기도 했던 권력(자)의 실상도 조명했다. 우유부단했다는 루이 15세의 성정 탓도 있겠지만 권력의 세계에는 일종의 꼭두각시 놀음에 휘말리기 좋은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 같다. 정사(正史)와 야사(野史), 사실과 각색이 뒤섞인 이 영화는 역사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 흥미로운 텍스트가 될 것 같다.
‘참여정부 천일야화’(한겨레)에서 이정우 전 실장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틈이 나면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이 전 실장은 노 대통령을 ‘끊임없이 역사를 되돌아보려고 노력한 점’과 ‘직언을 잘 수용한 점’에서 당(唐) 태종에 비유하면서 위징(魏徵) 이야기를 꺼냈다. 당 태종은 목숨을 걸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직언을 해대던 신하 위징이 죽자 몹시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세 개의 거울 중 한 개를 잃었다. 세 개의 거울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나의 의관을 보는 거울, 둘째는 역사라는 거울, 셋째는 나의 그릇됨을 비추는 거울 위징이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역사의 교훈에서 배울 줄 알고, 고언(苦言)을 듣고 바꿀 줄 안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권력자든 일개인(一個人)이든.
마리 앙투아네트는 잔 뒤바리를 무시하고 경멸했다. 영화상에서는 잔 뒤바리를 싫어했던 루이 15세 딸들의 영향이 컸던 걸로 나오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신분 차이가 컸다. 루이 15세의 실질적 왕비나 다름없었지만 잔 뒤바리는 매춘부 출신이었고, 왕세자인 루이 오귀스트(루이 16세)와 결혼하며 베르사유궁으로 들어온 마리 앙투아네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공주 출신으로 당시 프랑스 왕실의 넘버3였다.
하지만 역사의 도도한 물결은 신분을 보지 않는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뒤 세 사람의 운명은 결국 똑같았다. 1793년 1월과 10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차례로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그해 12월, 잔 뒤바리도 단두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