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브(SAAB)는 비운의 자동차 브랜드입니다. 2차 대전 후 스웨덴의 항공기 제조회사에서 갈라져나온 자동차 제조업체 사브는 한때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로 명성을 날렸죠. 1977년에는 세계 최초로 항공기 터빈을 엔진에 적용한 터보 승용차(passenger car)를 개발했고, 미국에서는 "의사가 타는 차"로 불릴 정도로 안전성이 뛰어난 걸로 이름높았습니다. 볼보와 함께 스웨덴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브랜드였습니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사브 900 터보'를 탑니다. 1978-1998년까지 2세대에 걸쳐 생산되며 사브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사브 900은 사브의 베스트셀러 카였습니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콜린 퍼스가 타는 차도 바로 사브 900 클래식이죠.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들이 모는 사브 900 3도어 해치백 모델은 뒷좌석에 타려면 앞 좌석을 젖히고 들락거려야 하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클래식한 외관과 묵직한 터보 엔진의 배기음 소리가 보면 볼수록 매력적입니다. 빈티지한 레드 컬러도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이 차는 한마디로 《드라이브 마이 카》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목만 들으면 이 영화가 마치 자동차에 관한 영화같지만, (《포드 V 페라리》같은 영화인가? 하고 말이죠) 사실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원작을 쓰고 일본영화의 새로운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가 각색· 연출한 올해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으로 자동차 자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배우이자 연극 연출가 가후쿠는 평소 절대로 자신의 차를 남에게 운전을 맡기지 않습니다. 누구와 함께 있는 걸 즐겨하는 스타일도 아닌 것 같거니와, 차 안에서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고 소리내어 대사를 외우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좌측통행을 하는 일본 자동차의 운전석은 오른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가후쿠의 사브 900은 운전석이 왼쪽에 있습니다. 게다가 3도어입니다. 가후쿠가 이런 불편을 감수하고 클래식 카를 탄다는 것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암시합니다. (항공기를 만들던 사브의 엔지니어들은 손해를 보더라도 퀄리티있는 차를 만들고 싶어하는 꼴통들이었고, 초창기 사브 경영진도 이를 지지했다는 그야말로 영화같은 이야기가 있을만큼 사브는 진정한 엔지니어들의 차였다고 합니다. 《포드 V 페라리》의 크리스챤 베일처럼요) 어쨌든 이런 차를 가후쿠가 탄다는게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요.
어느 날 가후쿠는 외출했다 일찍 돌아온 집에서 아내의 외도 현장을 목도하고도 말없이 슬쩍 빠져나옵니다. 그리고는 계속 모른 척하면서 아내가 갑작스럽게 병사할 때까지 그 비밀을 혼자 간직합니다. 그런데 평소 자신을 사랑했고(적어도 가후쿠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던) 사이도 좋았던 아내가 외도를 했다는 사실과 왜 외도를 했는지 묻지도 못하고 떠나보낸 것이 큰 마음의 상처로 남습니다. 그 상처의 예후가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 '스포일러'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줄거리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후쿠의 마음이, 가후쿠의 주위에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흐르고, 흔들리고, 교감하는가가 더 중요한 영화이기 떄문이지요.
아내를 떠나보낸 가후쿠는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를 연출하게 되는데, 그의 자동차 선택만큼이나 연출 스타일도 독특합니다. 첫째, 연출가로서 가후쿠는 배우들과 함께 대본 리딩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배우들은 반드시 대사에 묻어있는 감정을 모두 제거하고 마치 처음 글자를 배우는 초등학생처럼 건조하게 대본을 읽어야한다는 점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평소 배우들과 연기 연습을 하는 과정도 이와 꼭 같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조연으로 나오는 한국배우 박유림에 따르면 촬영 전에 50번의 대본 리딩을 했다고 합니다) 둘째, 가후쿠의 연극에서는 일본 배우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배우들이 출연해 각자의 모국어로 연기합니다. 일본어와 중국어, 한국어, 심지어 수어까지 뒤섞여 진행되는 연극을 (일본)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이게 뭐 하자는 것인가? 싶을 겁니다. 하지만 3시간의 러닝타임에 이르는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점차 소통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특히 극중극인 연극에서 소냐역을 맡은 한국배우 이유나(박유림)의 한국어 수어 연기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연습이 어느 정도 진행되자 유나와 연극제 코디네이터이자 통역인 그녀의 남편은 가후쿠를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함께 하는데, 수어로 연기하려니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유나는 맑고 순수한 손짓으로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수어도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내 말이 전해지지 않는 건 나한테는 당연한 일이에요.
청각장애인인 유나는 평소 자신이 소통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값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서로에게 닫지 않을 수 있다, 소냐는 그 바탕에서 시작합니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현장음을 완전히 배제하고 명백한 묵음으로 처리한 이 대화 장면에서 유나의 진심어린 수어는 가슴을 울립니다. 이 수어는 영화의 다른 어떤 대사보다 빛나는 대사입니다. 자신이 소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소통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유나. 비장애인인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소통되는 것이 당연하기에 불소통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각자가 내 말을 할뿐, 소통이 되는지 안되는지에는 유나만큼 관심도 없고 최선을 다하지도 못하지요. 소통된다고 생각한 뒤 불통을 시작합니다. 아이러니지요. 유나의 이 수어를 들은 가후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렇게 아내의 진심을 궁금해하던 가후쿠였는데요.
가후쿠는 연극제 주최측의 방침에 따라 연극제 기간 동안에는 사브 900의 운전을 주최측이 제공한 기사에게 맡깁니다. 처음에는 탐탁치않게 생각하던 가후쿠. 하지만 어머니의 학대로 역시 마음 속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20대 여성 기사 미사키(미우라 코토)에게 점차 마음을 열며 두 사람은 각자 자신들의 상처를 조금씩 직시하게 됩니다. 극중극에서 유나가 수어로 연기하는 소냐는 가후쿠가 연기하는 바냐 아저씨에게 말합니다. "어쩌겠어요. 또 살아가는 수 밖에요.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 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당연하겠지만 체호프의 희곡에 나오는 대사 거의 그대로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공개 대담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의 마음의 여정, 말을 했어야하는데 말을 못하고 억눌렸던 것들, 전혀 우연한 인연으로 만나게 된 상대방의 마음에 도달하는 과정처럼 영화에서는 도달해야하는 마음의 지점이 있는데 하마구치의 영화는 그 지점을 체험하게 해준다"고 말했습니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대사든, 침묵이든, 배우의 표정이든 세밀한 마음의 여정들로 꽉 차있는 3시간으로, 함부로 서둘러 축약하거나 편집해버린 것이 아니"라고 덧붙이면서요.
사브 자동차는, 1980년대 후반부터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미국의 GM으로 일부 지분이 넘어간 1989년에 어느정도 망했으나, 2000년에 지분을 완전히 넘기며 완전히 망했습니다. (물론 이후로도 파산을 해서 제도적으로 망하는데는 더 시간이 걸리긴 합니다만) 한때 볼보와 어깨를 견주던 북유럽산 프리미엄 자동차 사브가 망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엔지니어들의 기술적 자신감이 너무 큰 나머지 소비자와 소통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는 점도 그중 하나로 꼽힙니다. 세계 자동차 업계의 흐름은 디자인을 중시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사브의 경영진은 "소비자들이 디자인을 선호하는 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며 지나치게 성능만을 강조하고 가격경쟁력에도, 마케팅에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건 혹시 기술력만으로도 구매자들과 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실패는 아니었을는지요.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한번 샀다고 해서 영원한 것도 아니구요. 1984년 사브 900이 한창 인기를 얻고 있을 당시 사브 900의 신문 광고 슬로건은 "스웨덴 기술. 믿어주세요" (Swedish engeneering. Depend on it.) 였습니다. 나의 진정성을 담은 압도적인 기술력만 믿고 나의 말이 통할 것이라고 기본값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유나처럼 내 말이 전해지지 않을 거란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죠. 생각해보면 단어 하나 하나에도 사람마다 다른 심상을 가집니다. 나의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 당연하고 기본값입니다. 그렇게 소통해야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 귀찮고 까다로운 일을 성실하게 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세한 사연과 이야기들을 밀어버린 채 같은 결론을 내린 쪽과 끼리끼리 어울리게 되죠. 하지만 신도 악마도 모두 디테일에 있습니다. 디테일을 무시한 직진은 폭력이 되기 십상이고 언젠가는 사고를 일으키게 돼있습니다. 언젠가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