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 끝없는 공간에 명품, 럭셔리, 사치품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래서 오늘도 서울 명동 신세계백화점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구찌". 잠깐 발음만 해봐도 럭셔리한 기운이 느물느물하게 혀끝에서 즙이 되어 나올 것 같은 패션 브랜드. 특급 모델들이 나르시스트처럼 활보하는 런웨이에 딱 어울리는 유리드믹스의 신스팝 '스윗 드림즈'를 BGM으로 쓴 《하우스 오브 구찌》의 트레일러 영상은 구찌 빽과 로퍼만큼이나 이 영화, 보러가야겠다.는 관람욕구를 자극한다.
구찌 가문의 며느리였던 파트리치아를 연기한 팝스타 레이디 가가는 올해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의 강력한 후보다. 이밖에도 아담 드라이버, 제레미 아이언스, 알 파치노, 셀마 헤이엑 등 내로라하는 유명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누구인가, 이 배우들을 한자리에 모은 감독은.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House of Gucci)의 감독은 리들리 스콧이다.
맞다. 외계생물체를 다룬 기념비적인 영화 《에이리언》(1979)의 그 리들리 스콧 감독이다.
그렇다. SF영화의 클래식 《블레이드 러너》(1982)를 만든 그 리들리 스콧이다.
일찌기 90년대 초에 여성주의 영화 《델마와 루이스》(1991)를 만들었던 그 리들리 스콧이고,
무명에 가깝던 러셀 크로우를 스타로 만든 《글래디에이터》(2000)의 리들리 스콧이고,
레퍼런스급 전쟁 영화 《블랙호크다운》(2001)의 리들리 스콧이고,
《마션》 (2015)의 바로 그 리들리 스콧 감독이다.
그 리들리 스콧 감독이 84세에 다다른 지난해에만 두 편의 영화를 내놓았다. 범작도 아니다. 맷 데이먼과 아담 드라이버가 주연한, 중세를 배경으로 인간의 인식 세계를 탐구한 흥미진진한 시대극 《라스트 듀얼》로 "역시 리들리 스콧"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곧이어 《하우스 오브 구찌》를 내놓았다.(북미에서는 지난해 말에 개봉) 기대와 달리 《하우스 오브 구찌》는 2분25초짜리 트레일러 영상처럼 팬시하지 않았다.(트레일러 영상과 정말 찰떡같이 붙었던 '스윗 드림즈'도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 뒤로 갈수록 묵직하다. 알 파치노가 나와서 그런지 《대부》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한다. 혈연의 정마저 뛰어넘는 '내것'에 대한 욕망, 죽어서야 끝나는 욕망, 아니 죽을 때까지 좇는 욕망을 《하우스 오브 구찌》는 '돈 꼴레오네'의 이름이 아닌 '구찌'의 이름으로 보여준다. '구찌를 소재로 이렇게 밖에 못만드나' 싶을 정도로 화려한 포장은 없다. CF감독 출신으로 전설적인 '1984 애플 광고'를 제작했던 당대 최고의 비주얼리스트인 리들리 스콧이, 능력이 없어서 패션제국을 다룬 영화를 팬시하게 만들지 않았을리 없다. 극장을 나서는데 "튜닝의 끝은 순정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라스트 듀얼》이 마지막 영화일줄 알았는데, 마지막은 커녕 《하우스 오브 구찌》를 거의 동시에 내놓은 84세 노인의 '괴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3년 전 이 즈음,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라스트 미션》이 개봉했다.
맞다. 《황야의 무법자》(1964)의 그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더티 해리》(1971)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용서받지 못한 자》(1992)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이고,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이고,
《밀리언달러 베이비》(2004)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이다.
《라스트 미션》의 원제는 '더 뮬'(The Mule) 즉 노새로, 마약운반책을 가리키는 은어다. 국내수입사는 87세의 노인이 마약운송을 하다 붙잡혔던 일을 보도한 뉴욕타임즈 기사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 《라스트 미션》이란 제목을 달았다. 언제 어떤 영화가 그의 마지막(last) 영화가 되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였기에 조금은 통속적이고 뻔하기까지 한 제목도 꽤 중의적으로 다가왔다.
한평생 자신의 일과 성공에만 몰두하면서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한 노인이 사업이 망하자 그제서야 가족들에게 다가서려하지만 관계는 소원할 수 밖에 없다. 노인은 자신이 아직 쓸모있다는 것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우연히 모르고 시작하게된 '라스트 미션', 즉 마약운반일을 통해 증명하려고 하는데... 명작 《그랜토리노》(2008)이후 10년 만에 주연과 연출을 함께 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당시 나이 88세. 그리고 91세인 지금, 자신의 80번째 영화 《크라이 마초》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깐부' 오영수는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연극 《라스트 세션》의 주연배우다. 오랫동안 국립극단 단원을 하고 동아연극상과 백상예술대상을 받은 그를 무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생 70하고도 후반줄에 누리는 뜻밖의 유명세. 이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오징어게임》이 자칫하면 말년의 그를 흔들어놓을 뻔했다. 어쩌면 77세의 가슴에 아직 여진이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부각되니까 광고와 작품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배우로서 중심이 흐트러지면서 혼란스러웠어요."(《라스트 세션》 기자간담회 중) 자제력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연습하면서 평정심을 되찾았다는 오영수는 정신분석의 대가이자 무신론자인 프로이트 역을 맡았다. 프로이트는 연극에서 《나니아연대기》를 쓴 작가이자 기독교 유신론자인 C. S. 루이스와 삶의 의미와 죽음, 인간의 욕망과 고통 등을 놓고 논쟁을 벌인다. 이 연극의 시대 배경은 1939년인데, 이 해는 실제로 프로이트의 '라스트 이어'(last year)였다.
세상이 상업적 상상력으로 붙인 건지,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리들리 스콧, 클린트 이스트우드, 오영수, 이 세 사람의 작품에 '라스트'가 붙으니 의미가 남다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사람들은 좀처럼 자신에게도 죽음이라는 끝이 있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지만, 어떤 일에든 '라스트'가 있다는 건 인정한다. 무슨 일이든 끝이 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안도감과 위안을 준다. 끝이 있음으로써 우리는 인생의 마디마디를 단락짓고 넘어갈 수 있다. 하루를 끝마치고, 일년을 끝마치고(종무), 수능을 마치고, 학업을 마치고(졸업), 프로젝트를 끝내고, 노동을 마칠(은퇴) 수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면서 우리는 버텨내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지금은 어느덧 50대 중반이 된 윤상이 20대에 불렀던 노래 중에 '달리기'(1996)라는 신스팝이 있다. 저 옛날(?!) S.E.S부터 옥상달빛을 거쳐 최근 자이언티에 이르기까지 이 노래가 줄줄이 리메이크된 데는 곡 자체가 세련됐다는 이유도 있지만 노랫말의 힘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노래는 특히 수험생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하는데 수험생뿐 아니라 힘든 현실에 고달픈 현대인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한마디로 끝이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지겹나요 힘든가요 / 숨이 턱까지 찼나요
할 수 없죠 어차피 / 시작해 버린 것을
쏟아지는 햇살 속에 / 입이 바싹 말라와도
할 수 없죠 창피하게 / 멈춰설 순 없으니
단 한가지 약속은 /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윤상 「달리기」 중
지금 이 현실이 끝나면 지겨울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인간은 막상 그토록 원하던 오랫동안의 쉼이 찾아오면 또 지루해지고 마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리들리 스콧, 클린트 이스트우드, 오영수. '라스트' 보이들. 이들은 인간에게는, 삶에는 끝이 없다는 걸 보여준다. 손자 재롱이나 보고 있을 나이에(세 사람 모두 이미 그런 나이마저 지났다) 끝없이 전진하는 이들의 행보는 엄청난 의지와 노력, 자기 관리, 재능의 산물인 동시에 산꼭대기에서 굴러떨어지는 돌을 끊임없이 밀어올려야하는 벌을 받은 시지프스를 떠올리게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한편으로는 지겨운 욕망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든다. "나는 별일없이 산다. 이렇다할 고민없다"고 한 장기하 노래처럼.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는 욕망의 총부림으로 가문의 한 시대가 끝나며 막을 내린다. 구찌 가문은 브랜드를 매각한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몰락하던 구찌는 미국의 디자이너 톰 포드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하면서 부활에 성공하고 다시 부진을 겪다 2015년 알렉산드로 미켈레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브랜드를 지휘하면서 루이비통, 샤넬과 더불어 톱3 패션 제국 중 하나가 됐다. 《하우스 오브 구찌》의 엔딩 시퀀스에는 다음과 같은 자막이 올라간다. '이제 구찌라는 회사에 구찌라는 성(姓)을 가진 사람은 한명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