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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itor M Mar 23. 2022

《스펜서》의 또다른 조연 왕세자의 슈트

새빌로우의 한국인 재단사 김동현

  축축하고 을씨년스러운 런던의 겨울. 최악의 코로나 한파마저 겹쳐 런던은 완전히 셧다운됐다. 그해, 2020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제 맞춤정장 거리 런던의 새빌로우가(街)도 폐쇄됐다. 맞춤양복 장인들도 각자 뿔뿔이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새빌로우가의 떠오르는 양복점, '캐드 앤 더 댄디'(Cad & The Dandy)에는 젊은 한국인 재단사 한 명이 홀로 나와 열심히 수트를 만들고 있다. 그야말로 한땀 한땀, '비스포크(Bespoke; 맞춤정장)란 바로 이런 것'이라듯 정성을 다해 누비고 있는 수트의 주문장에는 '잭 파딩'이라는 이름이 써있다.

 며칠 전, 양복점도 문을 닫아 집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캐드 앤 더 댄디'의 사장이 불렀다. 김동현 재단사(33)는 영국과 유럽의 각지에서 온 다른 재단사들과는 달리 양복점 근처에 집을 얻어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일할 준비가 돼 있었다. 딱히 할 일도 마땅치 않던 차였다. "지난 번과는 다른 영화에서 주문이 하나 들어왔는데 자네가 좀 만들어줄 수 있을까"


 2년전, 런던예술대학 맞춤양복과(Bespoke Tailoring) 졸업장 하나 달랑 들고 새빌로우가에 임시직으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림질을 하고 단추구멍을 다는 보조(일명 '시다')로 시작해 온갖 궂은 일을 군말없이 해내고 열심히 배워 실력이 쑥쑥 늘어가던 한국인 젊은이에게 사장은 기회를 줬다.


캐드 앤 더 댄디에서 일할 당시의 김동현 재단사 ⓒ 김동현

  

  마스터 테일러가 김동현씨에게 넘겨 준 패턴지(종이로 된 옷본)에는 'P.O.W'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P.O.W는 '프린스 오브 웨일즈(Prince of Wales)'라는 뜻으로 영국 왕세자를 가리킨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동현씨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자신이 만들 옷이 고 다이애나비(妃)를 다룬 영화 《스펜서》에 들어간다는 것을. 주문장에 써있던 이름 '잭 파딩'은 이 영화에서 찰스 왕세자 역을 맡은 배우의 이름이었다.


 《스펜서》는 세계적인 스타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다이애나비 역할을 맡아 호평을 받은 영화로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강력한 후보다. 다이애나가 왕실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카밀라 파커볼스와 공공연한 연인관계에 있던 찰스 왕세자와도 거리가 멀어졌던 어느 크리스마스 연휴 사흘동안 벌어진 일을 담았다. 잭 파딩은 조연이지만, 왕세자로서 다이애나비와 날카로운 신경전을 펼치는 장면 등에서 비중있게 나온다. 《스펜서》는 세계적인 패션 아이콘이었던 다이애나비는 물론이고 영국 여왕과 찰스 왕세자 등 왕실 인사들의 패션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 영화다. 김동현씨가 만든 왕세자 의상은 남성 수트의 영원한 클래식인 영국 왕실의 복식을 제대로 재현해내야 하는 터였다. 이 영화의 의상 감독은 《안나 카레니나》와 《작은 아씨들》로 아카데미 의상상을 두 차례 수상한 재클린 듀런이다.


  김씨는 트위드 오버코트 한벌, 트위드 수트 한벌, 슈팅수트 한벌 등 3벌의 의상을 오로지 혼자 힘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제작했다. 책을 찾아보는 것은 물론이고 찰스 왕세자가 찍힌 사진에 나온 코트와 수트 사진을 참조해 라펠의 길이, 휜 각도, 단추구멍 길이 등을 파악해내야 했다. 의상 완성 직전 영화제작사측과 잭 파딩이 피팅을 왔다. 슈팅 수트에 스트롤러 포켓(옆구리에 손을 찔러넣을 수 있는 주머니)을 추가로 달아달라고 하고, 패치 포켓 위치를 조금 조정한 것말고는 큰 수정은 없었다. 영국인도 아닌 한국에서 유학왔던 한 젊은이가 해낸 것이다.


김동현씨가 만든 찰스 왕세자 슈팅 자켓과 영화 속 잭 파딩이 입고 나온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김동현

 

  김씨는《스펜서》의상을 만들기 두세달 전쯤에는《더 배트맨》의상 작업에도 참여했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인《더 배트맨》은 영국 리버풀과 런던에서 상당 부분이 촬영됐다. 이때도 사장은 처음에는 그저 "영화 작업이 들어왔다"고만 했다. 그런데 김씨가 받은 주문장에는 스타 배우인 콜린 파렐의 이름이 써있었다. 나중에 김씨는 자신이 만드는 디너 자켓(연회에서 입는 자켓)이 배트맨의 유명한 빌런 '펭귄'이 입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김씨는 펭귄 자켓과 , 검사역의 피터 사스가드가 입을 바지 여섯 벌, 네이비 수트와 그레이 수트 각 한 벌, 셔츠 열 장을 동료 재단사들과 분업해 함께 만들었다. 김씨가 만든 펭귄 자켓은 라펠을 조금 줄이고 소매를 수정한 뒤 그대로 촬영에 사용됐다.


영화 《더 배트맨》 중 펭귄(콜린 파렐)이 입은 디너 자켓. 김동현씨가 만들었다 ⓒ 워너브라더스, 김동현


  자켓(영국에서는 코트라고 부른다고 한다)은 재단사로서 어느 정도 실력이 쌓여야만 만들 수 있는 옷이다. 처음 양복점에서 일을 시작하면 단추 구멍을 치고 안감 손바느질을 하는 보조역할(finisher)부터 시작한다. 다음으로 바지를 만드는 트라우저 메이커(trouser maker)가 되고, 바지를 어느정도 만들 줄 알게 되면 웨이스트 자켓이라 불리는 조끼로 나아간다. 이 단계를 다 거치고서야 자켓을 만드는 코트 메이커(coat maker)가 된다.


  한국에서 의류디자인학과를 중퇴한 김씨는 바로 군대를 갔다가 전역 바로 다음날 자신이 복무하던 부대 근처의 양복점을 무작정 찾아갔다. 2년 동안 단추 구멍만 달았다. 가르침은 없었다. 떠나야했다. 한 손님의 소개로 런던의 대학에 있는 맞춤양복과정을 알게 됐다. 그런데 그 2년 간의 반복 노동은 허송세월만은 아니었다. 캐드 앤 더 댄디에서 임시직으로 일할 때 김씨의 '숙련된 허드렛일 솜씨'는 한국에서 온 '킴'(Kim)을 성실하게 자신의 맡은 일을 잘 해내는 재단사 재목으로 각인시켰다. 킴은 다른 재단사들은 잘 안하려고 하는 양복점의 까다로운 요구도 다 들어주면서 배움의 기회를 구했다.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히 옷을 만들면서 일을 가르쳐달라며 다가서는 그에게는 점점 다양한 기회가 왔다. '스펜서'나 '더 배트맨'은 그렇게 찾아왔다.


  지난해 10월, 김동현 재단사는 서울 이태원의 비탈길에 자신의 샵 '트란퀼하우스'를 열었다. 아직은 간판조차 달지 않은 작은 맞춤양복점이다.


이태원 자신의 양복점에서 설명 중인 김동현 재단사 ⓒstorydna

 

 "영화 작업은 저로서는 도전이었습니다.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진 한 장 갖고서 똑같은 옷을 내가 한번 만들어 보이겠다, 이런 각오로 하긴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의상 하시는 분이나 사장이나 배우 모두 다 만족을 했죠. 영화에서 확인해 보시면 아실 거예요."

 "수트는 영국인이 발명한 사회의 유니폼이죠. 제가 영국인은 아니지만 영국의 의문화를 포함해서 모든 문화에 조금 미쳐 있었거든요. 영국에서의 시간, 옷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 모든 매사가 진심이었습니다. 결국 제가 한국에 돌아와서 하고 싶은 일은 그렇게 오랜 역사를 걸쳐서 연마되어 온 수트의 시각적인 조형을 알리는 것과 더불어 옷에 숨어있는 스토리들을 알리고 싶어요. 우리가 거적때기를 입고 있어도, 이거 누가 주신 옷이야, 아니면 왕한테 하사 받은 옷이야, 그러면 이걸 못 버립니다. 또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주신 손수건이야, 이게 스토리가 담겨 있으면 못 버려요. 그게 우아함이고 럭셔리인 거거든요. 큰 로고 박힌 그런 명품을 입고 다니는 게 럭셔리가 아니고요. 그런 스토리가 담긴 옷들을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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