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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itor M Apr 25. 2022

'살인의 추억' 러시아판…《쓰리:아직 끝나지 않았다》

  공산권 최초의 올림픽이었던 모스크바 올림픽을 목전에 둔 1979년. 구(舊)소련의 카자흐스탄이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니콜라이 주마갈리예프라는 이름의 살인마가 열 명 안팎의 젊은 여성을 잇따라 살해하고 시신을 요리해 먹은 엽기적인 일이 벌어진 겁니다. 한국에서 전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고 훗날 봉준호 감독에 의해 영화화까지 됐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사건 발생 기간도 겹칩니다) 

 당시 이 사건이 카자흐스탄은 물론 구소련 전체에 퍼져 세간이 흉흉해지자 당국은 쉬쉬하며 덮으려고 했습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미국 등 서방과 신경전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 사건이 터지면서(소련이 당시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올림픽 보이콧으로 대응) '식인 살인마가 활개를 치는 나라에서 어떻게 올림픽을 하느냐'는 식의 기사들이 서방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영화 "쓰리: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신입 경찰 셰르 ⓒ아슬란필름


어린 시절 들은 공포스런 이야기를 영화화  

그런데, 사건 발생 40여 년 만인 최근 이 사건이 영화화됐습니다. 이번 주 개봉한 한국영화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바로 이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한마디로 '러시아판 살인의 추억'이 한국과 카자흐스탄에서 개봉한 거지요. "제가 어렸을 때, 범인이 탈출해 우리 동네까지 도망쳤다는 소문이 돌았던 기억이 생생해요. 나중에 커서 이 사건을 자세히 알게 되면서 스토리 자체가 영화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 결말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감정이 차올랐었구요."

  "쓰리: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만든 박루슬란 감독의 얘기입니다. 연해주에 살던 증조부가 1937년 소련당국에 의해 강제이주당했다는 고려인 4세인 박 감독은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습니다. 지난해 귀화해 이제는 한국인이 된 박루슬란 감독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으로 유학온 이후 15년 동안 한국에서 살아서 한국어도 유창합니다. 아니, 이젠 그냥 한국인입니다.

  

  영화는 카자흐스탄의 한 작은 경찰서에 실력은 아직 형편없어 보이지만 강직하고 열정적인 청년 셰르가 신입 경찰관으로 들어오면서 시작됩니다. 직원 몇 명 안되는 이 경찰서의 수사팀장인 베테랑 수사관 스네기레프는 덤덤하게 신입경찰을 가르쳐나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카메라가 이 마을의 허름한 창고 같은 곳을 비추면 어두운 조명 아래서 뭔가를 '썰고' 있는듯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입니다. 그리고 끔찍한 형태의 시신들이 계속 발견되기 시작합니다. 2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연쇄살인범에 대한 고전적 고정관념을 재창조했다"라는 평을 들으며 뉴커런츠상을 받은 이 영화를 두고 "살인의 추억"과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세븐"이 소환되기도 하는데, 저는 영화 초반에는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사건도 사건이고 묘사 자체의 섬뜩한 기운 때문이죠.


거칠지만 새로운 스타일의 스릴러

 하지만 잔혹함은 거기까지만 잠깐. 영화는 스릴러와 드라마 사이를 오가며 거칠지만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를 보여줍니다. 딱히 반전도 없고 사실상 초중반에 범인이 드러나는데도 끝까지 극적 긴장감을 잃지 않게 하는 연출은 투박한 힘이 느껴집니다. 베테랑 수사관역의 이고르 사보치킨, 신입경찰관의 누나역을 맡은 사말 예슬라모바("아이카"로 71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등 배우들의 연기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특히 이고르 사보치킨과 그의 수사팀은 자본주의적 인간상·직업상과는 결이 조금은 달라보이는, 공산주의 치하의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프로페셔널리즘을 지키려는 경찰들의 이야기로 색다른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구소련 변방 경찰서의 폴리스 스토리이기도 합니다) 


만일 영화가 시대적, 공간적, 심리적 여행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프로덕션 디자인 측면에서나 인간상에 대한 묘사 측면에서 1970년대 후반 구소련 변방 마을로 떠나는 타임머신이기도 합니다. 또한 레게밴드 리더인 노선택의 음악 역시 이 영화를 평이한 장르물에 머물지 않게 하는 특별한 소스입니다. 노선택은 때로운 악기 사용을 최소화하면서 음악인지 음향인지 모를 묘한 분위기의 음악으로 영화의 빈틈을 메꾸거나 장면의 뉘앙스를 풍부하게 합니다.


 다만 제작비가 5억 원이라 디테일한 부분까지 매끈하게 마감된 상업 장르영화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한국어 번역도 조금 어색하게 들리는 부분이 있는데, 번역이 미진한 건지 당시 구소련의 언어적 특수성을 반영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완벽한 장르 영화를 만들려면 어느 정도 예산이 있어야 돼요. 제작비는 없었고 욕심과 열정은 넘치고… 그렇다면 감독으로서 제가 할 일은 이 영화의 인지도를 높이는 거였죠." 만나보니 박루슬란 감독은 솔직하고 진지하면서도 실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영화는 대중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재미있어야 한다면서도, 신인 감독으로서 주목을 받으려면 상업영화의 문법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습니다.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 무조건 영화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전략이 있었어요. 평범하게 다가갔으면 아마 저희가 관심을 못 받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저희보다 훨씬 잘 만든 작품들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어설프게 갈 바에는 좀 더 감독의 스타일이 드러날 수 있는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박 감독의 이런 전략과 열정이 있었기에 저예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실력을 검증받은 베테랑 배우들을 섭외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화 "쓰리: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작현장의 박루슬란 감독 ⓒ박루슬란

  

모스크바 가려다 서울로 온 영화학도...지금은 '전화회복' 돼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이렇다 할 꿈을 갖지 못했던 구소련 젊은이들처럼, 박루슬란 감독도 한때는 꿈이 없던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20대 초반 한국으로 어학연수를 왔다가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습니다. 연수를 마치고 다시 돌아간 박 감독은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진학을 앞두고 두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유서 깊은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로 갈 것이냐, 신생학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로 갈 것이냐… 당시 전 세계 어떤 영화학도라도 당연히 그런 선택을 했을 것처럼 박 감독도 모스크바로 가려고 했지만 결국 좌절되고 박 감독은 한예종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전화위복. 지금은 그것이 너무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박 감독은 말합니다.


"한국에 와서 '저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원서로 읽을 수 있다', '타르코프스키(러시아의 세계적인 영화 감독)의 영화를 자막 없이 볼 수 있다'고 자랑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뀌었어요. 외국에 나가면 '나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자막없이 볼 수 있다' 그러면 외국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이 사건의 실제 결말은 영화 제목에 반영돼 있습니다. 다만 그 내용이 영화에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살인범은 실제로 정신병원으로 보내지고 사건은 황급히 덮입니다. 살인마는 수차례 탈출했다 붙잡히기를 반복했고 아직도 살아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인 겁니다. 영화는 '찾고(find), 이해하고(look), 잊어라(forget)'라는 세 개의 챕터로 구성돼 있습니다. '잊어라'는 감독의 역설적인 메시지입니다.


  "쓰리: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하나안(2011)"이란 작품으로 장편 데뷔한 박 감독이 거의 10년 만에 만든 두 번째 장편영화입니다. 그러는 사이 박 감독은 어느덧 불혹의 나이를 넘겼습니다. "십 년 동안 여러가지 시나리오도 쓰고 다양한 시도도 해봤지만 아쉽게도 안됐어요. 그런데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영화인들이 아마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거예요. 저는 계속 이런 식이면 영화를 찍지도 못할 거다 라는 생각 때문에 또 다른 시도를 한 거고 그 결과가 "쓰리: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작품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자신의 두 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이름을 알렸듯이, 박루슬란 감독도 "쓰리:아직 끝나지 않았다"로 청운의 꿈을 안고 온 한국에서 멋진 작품들을 만드는 또 다른 기회를 잡았으면 합니다. 고작 5억 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야 했던 "쓰리: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보면 그는 그럴만한 재능이 있어 보입니다. 매끈하고 잘 빠졌지만 심심한 영화보다, 거칠어도 새롭고 힘이 있는 영화, 그런 영화들이 영화산업을 지탱하는 한 축이자 큰 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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