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영화사 대표님이 "나도 '헤어질 결심'같은 제목을 단 영화 한번 해보고 싶어요."라고 얘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이내 그는 푸념하듯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박찬욱이니까 가능한 제목이지..." 속으로 웃었습니다만, 저도 박찬욱 감독의 신작인 이 영화 제목을 듣는 순간 '와, 새로운 걸'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흥행이 최우선일 수 밖에 없는 영화사 대표가 그저 '있어 보인다'라는 이유로 제목을 고를 수는 없겠죠. '헤어질 결심'이란 제목은 멋지긴 하지만 통상적인 흥행 영화 제목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신인 감독이 들고 갔다면 아마도 제작사에서 일찌감치 문전박대 당했을 제목이죠. 어렵게 제작사를 통과했더라도 투자배급사의 문턱을 절대로 넘지 못했을 겁니다. "예술하냐? 네가 무슨 깐느 박(박찬욱)이라도 돼?" 이런 말이나 들었겠죠. (참고로 '깐느 박'은 1992년 "달은…해가 꾸는 꿈"이란 영화로 데뷔했고 영화는 그야말로 '폭망'했습니다)
최근 '재개봉의 왕'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 재개봉했습니다. 벌써 세 번째 재개봉인데, 재개봉 직후에는 메가박스 예매율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개봉 직후부터 8일 연속 박스오피스 10위권 내에 머물 정도로 여전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처음 보는 젊은 관객들한테도 인기가 높습니다. 유명한 이미지들로만 소비하던 영화를 활동사진으로 직접 확인하는 감동이 있다고들 하네요.
왕가위 영화의 원제 못지 않은 영어 제목들
"중경삼림"의 영어 제목은 "Chungking Express"로 영화의 주배경인 홍콩의 중경맨션과 양조위와 왕페이가 만나는 식당인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따온 겁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제목은 대부분 네 글자로 이뤄지죠. 데뷔작인 열혈남아부터 아비정전, 동사서독, 중경삼림, 타락천사, 춘광사설(해피투게더), 화양연화, 2046 등 제목만 들어도 '아 이건 왕가위 작품이구나'하는 느낌이 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왕가위 감독 영화의 영어 제목이 중국어 원제목과 비슷한 심상을 주면서도 원제목과는 따로 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열혈남아((熱血男兒)"의 영어 제목은 롤링스톤즈의 유명한 노래 제목인 "As Tears Go By"(슬픔이 찾아오면, 슬픔이 지나갈 때면)입니다. "영웅본색"의 후속편 같은 느낌의 '열혈남아'와는 좀 다른 분위기를 풍기지요? ('열혈 남아'는 사실 대만과 한국 개봉 제목이고, 홍콩 개봉 원제는 "몽콕카먼(旺角卡門)"입니다. 홍콩 몽콕 지역의 카르멘이라는 낭만적인 뜻이지요)
장국영이 주연한 "아비정전(阿飛正傳)"의 영어 제목은 "Days of Being Wild"('불꽃같던 시절'쯤 되려나요)입니다. '아비정전'은 제임스 딘을 불멸의 아이콘으로 만든 영화 "이유없는 반항"이 홍콩에서 개봉했을 때 중국어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아비'는 60년대 홍콩에서 서구식 태도와 사고 방식을 지향하는 청년을 가리키는 말이었지요. 그래서 '아비'과 '와일드'는 잘 어울립니다.
중요한 것은 왕가위 영화의 중국어 제목과 영어 제목이 '따로 또 같이' 어울리면서도 각자도생 한다는 점입니다. 동사와 서독, 두 협객의 이야기인 "동사서독(東邪西毒)"의 영어 제목은 "Ashes Of Time(시간의 재)"입니다. 사막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이미지와 어우러지는 멋진 이름이죠? 중국어 제목과는 직접적으로는 아무 상관없는데도 말이죠. 양조위와 장국영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국적인 풍광을 배경으로 서로 사랑하는 동성애자를 연기했던 "춘광사설(春光乍洩}"은 우리나라에서는 "해피 투게더(Happy Together)"란 제목으로 개봉했었습니다. '봄빛이 슬쩍 쓸쩍 뚫고 들어온다'는 의미의 '춘광사설'은 이탈리아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1967) "욕망(원제 Blow Up)"의 중국어 제목이었습니다. '춘'은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자어입니다. 일종의 포르노를 뜻하는 '춘화'(春畵)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죠.
지금은 K팝 노래 제목과 드라마 제목으로 쓰일 정도로 유명해진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영어 제목은 "In The Mood for Love"(사랑할 기분)입니다. 왕가위는 프랜시스 랭포드의 노래 'I am in the mood for love'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했는데, 정작 영화에서는 브라이언 페리 버전을 넣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중국어 제목도 영어 제목도 그 나름대로 영화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따로 또 같이' 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바로 거기서 매력이 발생합니다. 원제와 영어 제목이 직역하듯 너무 착 붙는다면 재미가 없겠죠. 그렇다고 너무 분열적이어도 안되고요. 왕가위 영화의 원제와 영어 제목은 영화의 뉘앙스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있습니다.
"제목은 독자를 헷갈리게 해야 한다"
베스트셀러 "장미의 이름"을 쓴 세계적인 지식인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독자들로부터 왜 책 제목이 '장미의 이름'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 제목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인 '지난 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에서 따온 것이기는 합니다. 독자들의 질문은 왜 하필 그 문장에서 가져왔냐는 거죠.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라는 책의 첫 번째 장 '제목과 의미'에서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에코도 처음에는 "수도원의 범죄 사건"이라는 제목을 달았다가 독자들이 이 소설을 미스터리물로만 생각할까봐 두려워 버렸다고 합니다. 다음에는 "멜크의 아드소"라는 중립적인 제목으로 달아봤지만, 고유명사를 좋아하지 않는 출판업자들 때문에 또 폐기. 그러다가 우연히 "장미의 이름"이라는 제목이 떠올랐는데, 기호학자인 에코에게는 장미가 상징하는 바가 풍부해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에코는 "제목은 독자를 헷갈리게 하는 것이어야지, 독자의 사고를 통제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소설은 수많은 해석을 발생시키는 기계"인데 불행히도 "제목이 작품 해석의 열쇠"이기 때문에 소설 내용과 적당한 거리를 둬야한다는거죠. (이 지점에서 최근 온라인 뉴스들의 저열한 제목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돈룩업? 내일을 향해 쏴라!
근래 개봉한 영화 중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한국어 제목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돈룩업", "해탄적일천" 등인데요, 두 제목 모두 한국어로만 썼을 때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각각 "Don't Look Up"과 "海灘的一天"인 원제와 영화 자체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 한국어 제목 만으로는 영화 내용을 전혀 암시하지 않으니 풍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좋은 제목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요, 이 제목들에 에코의 고민은 들어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기억나는 한국어 영화 제목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원 제목보다 뛰어난 문학성을 가진 제목들이죠.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원제: Bonnie And Clyde),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 "사랑과 영혼"(Ghost)같은 것들입니다. 물론 이 영화들이 개봉할 무렵에는 영화 제목에 외국어를 그대로 음차하는데 대한 규제도 있었고, 위의 사례를 포함해 상당수가 일본 제목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는 한계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결이 조금 다른 이슈이고, 번안된 제목 자체만 놓고 보면 영화의 주제를 살리면서도 우리 말로도 근사한 느낌을 만들어냈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고 발음도 불편한 최근 일부 영화 제목들의 작명에는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물론 시대가 바뀌면서 글로벌 시대의 취향과 대중의 수용 감각이 영어 제목에 거부감이 없고 오히려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한국어 영화 제목으로 모국어의 감각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건, 우리 말 제목으로 대중의 감수성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건 분명히 그렇게도 부르짖는 K-문화의 근.원.적. 힘을 약화시키는 일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인치의 장벽'을 뛰어 넘자고 말하고, 가장 개인적인 것인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화 제목들은 되려 1인치의 장벽을 세우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파워 오브 도그", "패러렐 마더스", "언차티드"..... 어색하지 않습니까. 무책임하지 않습니까.
"헤어질 결심" 애기를 하다 길게 돌아왔습니다. "헤어질 결심"은 이달 17일 개막하는 75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입니다. "기생충" 이후 3년 만에 한국영화가 다시 황금종려상을 탈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도 묘하게 끌리는데가 있는 색다른 제목을 가진 이 영화가 기대됩니다. 실은 황금종려상을 받는지 못받는지 보다, 영화 제목과 내용이 어떻게 호응하고 관계 맺고 있는지가 저는 더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