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마법사' 하마구치 류스케 신작
베를린 영화제는 아무래도 홍상수를 사랑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2020년부터 3년 내리 은곰상을 주겠는가) 그래서 하마구치 류스케도 사랑한다. 이것은 우연인가, 상상인가? 한국에서도 흥행에 성공한 "드라이브 마이 카"의 시네아스트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우연과 상상"은 '따뜻한 버전의 홍상수'같은 영화다.
이 영화도 지난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았다. "드라이브 마이 카"이후 하마구치 류스케는 한국 예술영화씬에서 갑자기 핫한 이름이 되었다. 구작, 신작 가리지 않고 개봉과 재개봉, 역주행 개봉이 한창이다. "우연과 상상"도 개봉 이후 줄곧 일일 박스오피스 10위권내에 들어있다. 그동안 각광받던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제는 아무래도 좀 멀어진 느낌이다. (라고 하지만 이번 칸에서 CJ영화 "브로커"가 상이라도 받으면 또 바빠질 이름이 되겠지. 한국 특유의 수상 지상주의가 어디갈 리도 없을 테니까)
'요즘 대세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우연과 상상"
하마구치 류스케의 새 영화 "우연과 상상" 3시간짜리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영화 시작한 뒤 무려 40분이 지나서야 오프닝 타이틀과 크레딧을 띄웠던(영화 끝나는 줄 알았다는) 하마구치 류스케는 "우연과 상상"에서는 타이틀부터 띄우고 영화를 시작한다. 다음과 같다.
하마구치 류스케 단편집
우연과 상상
제1화
마법(보다 더 불확실 한 것)
이 영화의 타이틀은 명백하게 책의 형태를 띠고 있다. 마치 웨스 앤더슨의 "프렌치 디스패치"가 형식적으로 매거진의 외양을 갖춘 것처럼. (그러나 웨스 앤더슨은 비주얼의 명수이고, 하마구치 류스케는 대화의 명수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한권의 각본집이라해도 좋다. 단, 대사는 배우들이 스크린에 나와 읽는다. (보여주는 것만큼 읽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 영화가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배우들의 이야기를 엿.듣.다.가. 시나브로 내 생각으로 빠져드는 경험을 즐길 수 있다면 이 영화를 좋아할 수 있다.
1화는 시간차를 두고 우연히 한 남자를 사귀게 된 두 젊은 여성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들려주고 보여준다. 2화 '문은 열어둔 채로'는 기혼의 늦깎이 여대생이 자신의 섹스 파트너인 남학생을 부탁을 받고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중년의 교수를 유혹하는 이야기다. (이렇게 써놓으니 스크린에서 엄청난 스펙터클이 벌어질 것 같지만, 기억하시길. 이 영화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라는 것을) 중요한 것은 화면에서 벌어지는 스펙터클이 아니라 이들의 대화 속에서, 다시 말해 이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어떤 스펙터클이 일어나고 있는가이다. 영화 촬영 전에 고집스럽게 배우들에게 감정을 뺀 대본 리딩을 일주일 가량 반복시키는 하마구치 류스케는 '대화와 소통의 감독'이다.
"넌 지금 행복해? 내가 궁금한 건 그것 뿐이야"
이 영화는 모두 3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이 없다면, 지루해서 다 못보겠다면 3화 '다시 한번(もう一度)'만은 꼭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앞의 두 편의 에피소드가 젊은이들의 사랑과 질투의 감정을 말한다면 3화는 중년에서 돌아본 고교시절에 대한 기억과 그 기억이 내 마음 속에서 어떻게 작동해 왔는지에 대한 영화이다.
도쿄에 사는 40대 여성인 '나츠코'는 고교 동창회에 참석하러 고향에 갔다가 친했던 동창 '아야'와 길에서 우연히 마주쳐 그녀의 집으로 간다. 2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서서히 속깊은 대화로 들어가려는 두 사람, 그런데 이름이 기억이 안나거나, 엉뚱한 이름으로 알고 있다. 아뿔사, 알고보니 둘은 심지어 같은 고등학교를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착각의 지점, 그 우.연.에서 새로운 대화가 시작된다. 전혀 모르는 사이였지만 상.상.은 그 간극을 메꾸는 것을 넘어 두 사람을 진실한 대화로 이끈다.
나츠코는 고교 때 사랑했던 여자친구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 IT 엔지니어다. 상처받는게 두려워 자신의 '소중한 감정'을 위해 싸우지 못해 그녀를 놓쳤다. 아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진 남편과 잘 살고 있는 주부다. 하지만 '가슴 속에 불타는 열정'이 이제 남아있지 않다.
나츠코가 아야에게 묻는다. "넌 지금 행복해? 내가 궁금한 건 그것 뿐이야." 실은 나츠코 자신에게 묻는 말이기도 하다. 인생의 거시적 차원까지 나아간다면, 이 질문은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의 첫 구절을 떠올리게도 한다.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친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3화를 보고 나면, 기억이라는 것은 내 마음의 알고리즘을 따라 변화함으로써 해상도가 낮아지지만, 상처는 알고리즘 어딘가에 선명한 자국을 남겨놓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 영화가 놀라운 점은, -소통이 이루어진다면- 전혀 모르는 타인으로부터도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과연 친하다는 게 무엇일까, 소위 '네트워킹'이란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곱씹어보게 만든다. 때로는 잘 모르기 때문에, 친하지 않기 때문에 더 솔직해질 수 있다는 역설과도 만나게 된다. 상대를 속일 필요도 나 자신을 속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씨네21'과 편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커뮤니케이션 가운데 '성실한 관심'을 느끼고 있을 때에 한해 솔직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 역시 이 기본적인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면 매우 길게 이야기한들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그 기반에 '관심'이 있다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최대한 길게 그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단은 "우연과 상상"에 심사위원대상을 주면서 "일반적으로 대화와 말이 끝나는 곳에서 이 영화의 대화는 시작한다…우리는 묻게 된다. 대화는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는가"라고 평했다.
이 영화에는 홍상수 감독뿐 아니라 감독 자신의 작품인 "드라이브 마이 카"의 분위기도 많이 녹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이브 마이 카"와 "우연과 상상"은 같은 시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찍은 영화다. 최근에 서로 다른 몇 편의 글을 동시에 진행하다 느끼고 있는 바, 한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다. "우연과 상상"에는 슈만의 클래식 '어린이 정경(kinderszenen)' 중 아름답고 서정적인 세 곡이 절묘한 영화적 순간에 흘러나와 또다른 대사로 기능한다. 그 중 작품번호 15-1번 '미지의 나라들로부터'를 반복해 들으면서 이 글을 썼다. 음악은 힘은 놀랍다. 영화는 때로는 음악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