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황량한 겨울 밤이었다. 이빨을 닦고 입을 헹구기 위해 물을 머금었다. 턱 밑으로 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나 몸이 이상해.”
“오빠는 맨날 아프잖아. 언능 자.” 자주 내가 피곤하다. 몸이 안 좋다 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때였다. 아내의 말을 듣고 침대에 누웠는데 무엇인가 잘 못 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다. 얼굴 왼쪽이 기괴하게 누군가 잡아당긴 것 마냥 위로 한껏 솟구쳤다. 특히나 입술이 삐뚤어져서 제일 눈에 띄었다. 왼쪽 얼굴이 마비되어 눈은 잘 감기지 않고, 입을 헹굴 때마다 물이 새어 나왔다. 평생 본 적도 없는 거울 속에 나는 내 자신이 아닌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내 얼굴이 보기 싫었다. 눈을 감으려고 시도하지만 마비된 왼쪽 얼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른 쪽 눈은 감기지만, 왼쪽눈은 감기지가 않는다.
입이 돌아갔는데, 무슨 정신인지 모른 채 평상시와 똑같이 양복을 꺼내 입었다. 무의식적인 습관이 나를 지배하고 출근하기를 재촉했다. 나는 법인 영업사원이었다. 법인 영업사원으로 구성된 우리 팀은 7시 50분에 스탠딩 미팅을 한다. 지각하면 욕만 먹을게 뻔할테니깐 서둘러서 회사를 가야 한다. 편의점에 들러 꼴사나운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마스크를 한 장 샀다.
스탠딩 미팅은 각자 영업 스케줄을 공유한다. 그 날 그 날 방문할 고객 리스트, 해야 할 일, 도움이 필요한 일에 대해 주고 받는다. 내가 말을 해야 하는데 입에서 말이 맴맴 돈다. 말이 어버버하며 잘 나오지 않았다. L 대리가 말을 좀 똑바로 하라고, 장난인지 갈구는 건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제서야 내가 말을 꺼냈다.
“얼굴이 마비된 것 같아서 말이 잘 안 나오네요.” 선배들이 나를 바라보며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야이 미친 놈아 얼굴이 마비되면 병원을 가야지. 회사를 왜 왔어?” 욕 잘 하는 K 과장이 말했다. 늘 욕하지만 알고 보면 잘 챙겨주던 선배였다. 그제서야 속으로 ‘아 맞다. 나 병원 가야지’ 정신이 들었다.
나는 병원을 가야 하는 사람인데, 왜 회사에 와 있는건지? 무엇이 나를 이리 데려다 놓은 건가. 죽어도 회사에서 죽을 생각이었나. 인사시스템에 접속해서, 연차를 신청했다. 병가가 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일단 내가 쓸 수 있는 연차를 사흘 정도 신청했다. 얼굴이 마비되면 어느 병원을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집으로 향했다.
내가 병원에 간 사이에 아내는 의사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안면마비는 신경과로 가야 하는데, 당장 큰 병원 교수님 예약은 잡히지 않았다. 그나마 물어 물어 아내의 의사 친구 덕분에 이틀 뒤 한양대학교 구리병원 신경과 교수님을 예약했다. 당시 나는 합정역 근처에서 살았는데, 경기도 구리역까지 가는 지하철 시간이 너무나도 길고 길었다.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뒤덮었다. ‘왜 입이 돌아 간거지?’ 물음이 끊이지 않았다.
2012년은 나에게 최악의 해였다. 결혼 2년만에 생긴 첫 아이의 심장 소리는 8주만에 멈추었다. 보물이라는 태명은 더 이상 무쓸모가 되었다. 아내가 그토록 많이 우는 건 처음 봤다. 나도 같이 울었다. 엉엉 울다가 눈물이 마르면 안 나올 줄 알았던 눈물도 다시 흘러 나왔다. 유산 후 소파술을 해야 한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아이를 맞이 하러 오는 사람과 아이를 떠나 보내는 사람의 감정이 교차된다. 산부인과에서 젊은 부부가 눈물을 흘리거나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면, 유산 판정을 받은 것 중 하나이다.
회사는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시키는 느낌이었다. 나는 내 첫 직장 일이 썩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영업사원이다 보니 자유로운 시간 조절, 3년차 사원이지만 나에게 부여된 권한 위임, 다른 동료들과 협업할 때 스스로 주도하면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자유와 책임이 있었다. 정말 내가 회사 사장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 해 내가 맡은 하나의 프로젝트.. 그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선배 지인이 발주한 웹 사이트 개발 사업인데, 6 천만원 매출에 눈이 멀어서 홀랑 내가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반성하는 일이다. 나는 웹 개발에 관한 전문 지식이 너무나 부족했다. 지식이 없으니 말을 1도 안 듣는 외주 개발 업체를 대할 줄도 몰랐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로 “씨발 다 안 되잖아. 너 고소한다.” 육두문자 욕을 하는 고객을 상대하다가 내가 미쳐서 입이 돌아간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횡단 보도를 건널 때 지나가는 저 트럭이 나를 적당히 치어주면 좋겠다 라는 많이 했다.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고 싶었다. 한편으론 차에 치이는거 고통스러우니, 입이 돌아간 건 다행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신을 차리니 병원 복도 대기실이다. 신경과 교수님은 날이 세워진 칼날처럼 차갑고 무심했다. 환자가 갖고 있는 물음을 해결하기 보다 빨리 낫는 약처방과 혹시 뇌신경이 다쳤을 수 있으니 MRI를 찍어보라고 했다.
궁금한 마음에 내가 “선생님 왜 입이 돌아가는 걸까요?” 라는 물음에 의사는 “현대인의 병입니다.” 건조한 대답이었다. MRI를 찍기 위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현대인의 병 ’이라는 말을 계속 머리 속에서 곱씹고 곱씹었다. MRI를 찍고 스테로이드 약을 처방 받았다. 약이 얼마나 독한지 한 번 먹고 잠들었는데, 18시간을 끙끙 앓으면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눈을 뜨면 어둡고 진득한 방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 유독 많이 들었다.
회사로 돌아갈 에너지가 남지 않았다. 오목교역 동신한방병원에 일주일 더 입원하기로 했다. 내년도 연차까지 모두 끌어당겨 회사에 열흘간 휴가를 냈다. 병실에 들어서니 옆 침대 할아버지가 “젊은 사람이 왜 얼굴에 풍이 왔어.” 혀를 끌끌 차고 걱정해 주셨다. 병실에 누웠어도 어쩔 수 없는 내 업무는 계속 했다. 노트북을 폈다. 당장 고객사의 히스토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나 밖에 없으니 우울감이 나를 지배해도 일은 계속 되었다. 열흘간 몸을 회복하는 시간을 보냈지만, 심적으로는 회복이 되지 못하는 지경이다. 다시 출근하는 길은 가시밭길과 같다. 웃어도 웃는게 아니라 가시를 삼키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퇴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수백번도 넘게 고민했지만 내가 숨 쉬고 살아 남으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 앞으로 3개월만 버티고 그만두겠다고 했다. 적어도 이직하려면 대리 승진은 눈앞에 둔 상황에서 대리 명함은 달고 나가겠다. 3개월 뒤에 그만두겠다고 생각하니 3개월이 정말 지난하게도 시간이 안 갔다. 프로젝트는 더 엉망이 됐고 더 이상 내 정신이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됐다. 수 년 지나 라디오스타 예능 프로그램에서 김구라씨가 ‘공황장애’를 다룬 이야기를 듣고, 그 때 깨달었다. 내가 공황장애 상태였구나..
대리 승진과 동시에 나는 퇴사를 신청했다. “축하한다” 라는 인사팀장님 말에 나는 “퇴사”라는 답변을 드렸다. 동시에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다. 한국과 당분간 이별할 생각이었다.
2013년 5월 한국의 정반대 남반구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과 정반대 남쪽 나라는 충만한 자연 에너지로 넘쳤다. 하늘을 바라보니 강렬한 태양이 나를 보며 웃어주는 기분이었다. 아내와 나도 같이 웃었다.
10개월간 호주 생활은 나의 인생에 가장 벅찬 에너지로 그득찬 경험이었다. 월세가 너무 비싸 부족한 돈으로 아내와 단칸방에 살아도 행복이 넘쳤다. 낮에는 백화점에서 핸드폰 케이스를 팔고, 아이폰을 수리하는 회사를 다녔다. 오후 5시면 매장이 문을 닫는다. 퇴근해서 아내와 같이 저녁을 먹고 배드민턴을 쳤다. 한국의 맛이 그리우면 그 해 출시된 불닭볶음면을 먹으면서 서로 맵다, 입에 불이 난다 하면서 깔깔 웃었다.
웃음이 충만한 삶을 살아 본건 참 오랜만이다. 너무 행복해서 이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외롭고 쓸쓸한 타국 살이는 아내와 내가 서로 인생에서 잊을 수 있는 값진 경험을 갖고 돌아 왔다. 2014년 1월 다시 한국으로 귀국했다. 차가운 바람이 나를 때리지만, 나는 누구보다 단단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