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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숙 Dec 08. 2023

시'인'과 나무 물고기 한 마리

과 나무 물고기 한 마리    

-백년어 서원의 '읊을 영' 물고기에 대하여



그날, 쩔렁이는 종소리와 함께 가을 상여꾼의 읊조림은 사람들을 이어내고 있었습니다. 읽는 것도 말하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노래하는 것도 아니면서 어떤 리듬을 가진, 그건 산 자들의 이어짐만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와의 이어짐이자 공명이기도 했지요. 설명할 수 없는‘그 어떤’읊음의 기억, 저는 시도‘그 어떤’것일 거라고 생각합니다.‘읊다’의 사전적 의미와 그 예시들 역시 시와 밀접하지요. 그런 점에서‘읊을 영’물고기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시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제가 그동안 시와 관련하여 읽고 생각한 것들을 서툴게나마 정리하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시에 대해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옥타비오 파스의‘활과 리라’였습니다. 그는 시와 시편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며 나누어 말했습니다. 시는 본래적 경험이며 시적인 것이 무정형 상태의 시라면 시편은 창조물로서 시를 품고 시를 유도하며 시를 방출하는 언어적 유기체이며 시와 인간이 만나는 장소라고 했지요. 시(문학)와 음악, 회화 등 영역을 구분하는 차원이 아니라 시는 그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상위 개념이더군요. 즉, 시는 표현하고 싶지만  표현 되어질 수 없는 예술의‘그 어떤’잠재태의 총칭이었습니다.     


‘읊다’는 읽다, 말하다, 노래하다 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시의 고유한‘리듬’을 표현하고자 만든 말일 것입니다. 운율의 관점에서 리듬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책은 신지연의‘증상으로서의 내재율’이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내재율이라는 단어의 문학사적 맥락을 가늠해볼 수 있었고, 특히 자유시형이 산문과 혼동되기 쉬운 지점에서 끝내 형식을 규정할 수 없는 리듬에 대한 고민에 매우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리듬에 대한 옥타비오 파스의 글을 되짚어 읽었지요. 그는 시의 핵심이 리듬이라는 것은 시가 운율들의 집합임을 의미하지 않으며, 시를 품고 있는 산문이 있다는 사실과 올바른 운이 맞추어져 있지만 전혀 시적 흥취가 없는 작품도 있다는 점을 들어 리듬과 운율이 동일하지 않다 했습니다. 즉, 모든 리듬은 어떤 것에 대한 느낌이며 그래서 리듬은 내용이 없는 단순한 측량이 아니라 방향성이고 느낌이라고 합니다. 또한 리듬은‘...을 향해 가는 것’인데 그곳은 우리가 무엇인지 드러날 때 비로소 밝혀진다고 했지요. 저는 이 부분을 몇 번씩 곱씹어 읽으며 우리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는 정서적 에너지의 움직임, 공명하는 진동이 시의 리듬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성글게 짠 그물 같은 시에 어떻게 그런 고밀도의 정서적 에너지가 가두어지는지 더불어 어떻게 끊임없이 달아나는지 그 비밀은 바로 리듬이었습니다. 새삼 보들레르의 문장도 떠올렸지요.‘우리들 가운데 누가, 그 야심만만한 시절에, 리듬도 각운도 없이 음악적이며, 흔히 서정의 약동에, 몽상의 파동에, 의식의 소스라침에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유연하고 충분히 거친 어떤 시적인 산문의 기적을 꿈꾸어보지 않았겠소?’이 문장은 제게 두고두고 각인되었습니다. 서정의 약동, 몽상의 파동, 의식의 소스라침! 그게 바로 시의 내용과 형식을 아우르는 시의 본래적 리듬이구나! 했으니까요. 이는‘읊을 영’물고기가 일으키는 현상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리듬을 품은 시를 쓸 수 있을까 영영 끝나지 않을 숙제입니다. 제게는‘시만 왜 인인가’라는 질문이 그 숙제의 실마리였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던 누군가의 말에 정말 그래서 시인이라면 나는 글렀다 생각도 했지요. 옥타비오 파스 역시 시는 이제 말로 육화되는 게 아니라, 삶 자체 속에서 육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니 저는 오랫동안 시를 쓸 용기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가르쳐준 시가 한 편 있습니다. 바로 신철규 시인의‘다리 위에서’입니다. 이 시는 꽉 막힌 다리 위 도로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앞 차 꽁무니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 쓰인 시입니다.‘자동차 앞 유리창에 빗방울이 점점이 박힌다/꽉 막힌 다리 위에서 우리는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흐린 하늘에 철새떼가 지나간다/한 무리의 새떼가 날아가고 간간이 뒤쳐진 새들이 그 뒤를 따른다’라고 시작되는 시는 담담한 산문형식으로 이어집니다. 사실 처음엔 이 시가 왜 좋은 시인지 이해가 잘 안 되었지요. 하지만‘나는 가장 뒤처진 새의 꽁무니를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검지로 천천히 밀어주었다’라는 문장에서 그만 마음이 쿵-하며 이 문장이 바로 이 시편을 시로 일어서게 하는 지점임을 느꼈습니다. 옥타비오 파스의 말처럼 시가 삶 자체에 육화된 것으로서의 그 손짓은, 부지불식간 그 다정한 손짓의 순간은 따뜻한 물기를 머금은 리듬을 일으켰지요. 그리고 시를 쓰는‘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감지하게 했지요. 아마 시인은 그 순간 무어라 읊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말은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말이었겠지요. 나라고 생각하던 나는 무력해지고 비워진 그 자리에 스며든 누군가, 이를 모리스 블랑쇼는‘비인칭적 죽음’이라고 하더군요. 내가 나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저 나를 채우고 있는 비인칭적 대명사로서의‘누군가’가 내 안에서 죽고 그 비워진 자리에 성큼 걸어 들어온 또 다른‘누군가’의 말, 시인은 그걸 받아 적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 말은 어떤 언어로도 기록되기를 거부한 채 행간에서 고유한 리듬으로 머물 뿐. 그래서 불랑쇼는 시인에겐 바깥만, 영원한 바깥의 반짝임만 존재하므로 시인은 그를 위해 단 하나의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 자라고 했나 봅니다. 그 비워진 자리에서 일어나는 공명. 그러므로 ‘읊다’는 비인칭적 누군가들이 서로 공명하는 표현 불가능한 시공간의 사건을 포괄하는 말일 것도 같습니다. 


역사도 예술도 끝났음을 선언한 시대를 지나며 지금 우리는‘시가 무엇인가’에서‘무엇이 시인가’라는 질문을 쥐고 끝없이 흩어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왜 시는‘인’인가라는 질문을 놓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문득‘나는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찾아온 후 비로소 몇 줄이나마 쓸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절대 체념의 문장이 아닙니다.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인정투쟁에 갈증을 내며 시의 이름을 빌어 그저 욕망하는 존재였음을 부끄럽게 깨닫던 순간 나온 문장이었지요. 무아의 경지까지는 어려워도 낮은 자리에서 수많은 껍데기로 단단해진 제 아집부터 허물어야 한다는 다짐도 담긴. 그러나 그 길이 얼마나 어렵고 아득한 길인가 깊이 절망하는 문장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끊임없이 무릅쓰는 것뿐. 이 또한 모두 글이고 공허한 메아리 같아 다시 절망일 뿐입니다.   

  

거칠고 아쉬운 게 많은 글입니다. 다만‘삶을 소재로 한 시를 쓰는 것보다 삶 자체를 시로 변화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옥타비오 파스의 문장 속으로 투명한 나무 물고기 한 마리가 아름다운 지느러미로 유영하는 것을 어리고 어리석은 눈으로 어슴푸레 보았다는 걸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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