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숲 Apr 17. 2023

단편소설/ 두 겹의 노래(3)

<2023 아르코 문학창작 발표 선정작-박숲>



     스팽글 통을 들어 노인들 앞에 적당량을 쏟아부었다. 하이구 이쁘다, 심 할머니가 말했다. 노인들 앞에 쏟아 놓은 스팽글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튕겨 나갔다. 이게 뭐야, 아유 신기하네. 노인들은 호기심을 보였다. 한 노인은 별 모양을 크기별로 모두 골랐고 심 할머니는 꽃 모양을, 최 할머니는 크고 작은 동그라미 모양을 골랐다. 나뭇잎만 고르는 노인도 있었다. 조 군은 은색 꽃 모양을 모조리 골라내었다. 조 군, 은색 꽃이 좋아요? 나는 문득 조 군이 무의식중에 유리코가 말했던 산하엽꽃을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어 보였다. 무의식이라는 건 사소한 것보다는 지울 수 없는 중요한 것에 머무는 거니까.

    글루 건의 전기 코드를 콘센트에 꽂은 뒤 조 군이 고른 꽃 모양 스팽글을 집어 들었다. 갑자기 조 군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내 거야! 나도 모르게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조 군의 손은 의외로 악력이 강했다. 손목이 저릿했다. 거칠고 축축한 감촉이 손목을 옥죄었다. 조 군의 육체는 여전히 어떤 힘의 조건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조 군은 고집스러운 아이의 표정처럼 바뀌어 소리를 질렀다. 유리코 줄 거야. 나는 재빨리 조 군의 손등을 붙잡으며 달래듯 말했다. 그래요, 이건 유리코 줄 거예요. 나는 슬그머니 손목을 빼냈다. 유리코 어딨어! 조 군이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의자가 꽈당 넘어졌다. 너희들이 유리코를 뺏어 갔지? 나쁜 새끼들. 그 여자는 쪽발이가 아니란 말이다! 너희들만 피해자인 줄 알아? 조 군은 시간의 어떤 구간을 찾아간 걸까. 어떤 기억으로 담겨 있기에 저토록 분노하는 걸까. 유리코 찾아와! 당장 내 앞에 데려오란 말이다! 조 군은 팔을 뻗어 탁자 위에 펼쳐진 스팽글을 모조리 바닥으로 쓸어버렸다. 심 할머니는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고, 다른 노인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몸을 숨겼다. 

    나는 조 군을 안심시키려 그의 팔을 붙잡았다. 조 군이 내 팔을 세게 뿌리치며 상담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호통을 쳤다. 나는 바닥으로 꽈당 넘어지며 탁자 모서리에 팔꿈치 급소를 찍혔다. 쇳덩이에 뼈가 눌린 듯 저릿한 통증이 머리를 뜨겁게 달궜다. 조 군은 오랜 세월 커다란 몸집이 품었을 우렁찬 기운이 잠에서 잠깐 깨어난 것 같았다. 이 자식들 내가 누군 줄 알아? 너희들은 내 발목 근처도 못 따라올 것들이야. 내 말 한마디면 수십만 명이 벌벌 떤다고, 감히 어디서 까불어! 내 것을 뺏어 가면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어. 복지팀 직원 두 명이 뛰어와 조 군의 몸을 붙들었다. 조 군은 격렬하게 몸을 비틀었다. 서너 개의 의자가 바닥으로 넘어지고 밀렸다. 구석에 몰려 있던 노인들은 파도에 휩쓸리듯 옆쪽으로 몰려갔다. 

    직원들은 조 군의 팔을 뒤로 꺾어 힘을 통제했다. 나는 팔을 문지르며 상황을 지켜봤다. 조 군의 입에서 고함과 비명이 연달아 터졌고, 다른 노인들 역시 비명을 터트리며 울었다. 직원들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권위적이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그만! 멈춰! 자리에 앉아! 등으로 명령했다. 조 군은 달래거나 설득하는 것으로 통제가 불가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겨우 잠잠해진 조 군을 의자에 앉혔다. 갑자기 조 군이 훌쩍거리며 울었다. 어쩌면 조 군은 가능했던 세계와 가능하지 않은 세계의 경계에서 견디기 힘든 몸부림을 겪는 중일지 몰랐다. 나는 다른 노인들을 안심시키며 차례로 자리에 앉혔고,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진땀을 흘렸다. 

    노련한 복지팀 직원들은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나는 조 군 앞에 다시 은색 꽃무늬 스팽글을 모아주었다. 조 군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었다. 그러곤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했다. 나는 안 죽어, 절대 안 죽어! 무의식중에도 자신을 챙기려는 본능에 가까운 행위를 보자 무상함에서 오는 쓸쓸한 감정이 스쳐 갔다. 유리코는 조 군의 이런 순정한 마음을 알고나 있을까. 조 군은 유리코의 기억을 머지않아 완전히 떠나보내게 될 것이다. 유리코가 자리에 있었다면 쌀쌀맞은 표정으로 냉소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단편소설/ 두 겹의 노래(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