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중계 앞자리 숫자가 변하려고 한다. 거울 앞에 서니 배가 육중하게 나왔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월부터 1월까지, 매년 그렇듯 정신없었다. 연말 결산, 평가, 내년 계획. 회의가 끝나면 또 다른 회의가 기다린다. 동료와의 관계도 미묘해진다. 경쟁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를 의식하게 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배가 고팠다. 정확히는 마음이 허했다. "오늘 하루 고생했으니까"라는 핑계로 치킨을 시켰다. "연말이니까"라는 이유로 회식 자리에서 과식했다. 집에 오면 냉장고를 열었다. 아이들이 안 먹은 과자를 집어 먹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살이 찌면 몸이 둔해지고, 몸이 둔해지면 더 움직이기 싫어진다. 악순환이다. 새해엔 건강을 챙기자고 다짐했다. 그러다 개그우먼 신봉선이 떠올랐다. 당근 라페로 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당근 라페는 프랑스식 당근 샐러드다. '라페(Râpée)'가 '강판에 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당근은 열량이 낮고 식이섬유가 많아 포만감이 오래간다. 베타카로틴과 비타민A가 면역력도 높여준다.
문제는 실행이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라는 책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났다. 행동하고 싶으면 환경을 조성하라고. 의지가 아니라 신호가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아주 작은 변화를 하나 만들기로 했다. 흙이 묻은 당근 두 개를 씻어 체망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당근 라페를 만들려면 채칼로 썰고, 소금에 절이고,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바쁜 아침엔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저녁에 만들겠다는 신호였다.
오늘 아내는 회식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치즈 떡볶이를 해줬다. 저녁을 먹고도 막내가 옛날 통닭이 먹고 싶다고 해서 결국 배달을 시켰다. 배가 부른 아이들은 만족하며 방으로 들어가 닌텐도를 한다. 이제 내 차례다.
몇 주 전에는 눈대중으로 소금을 넣었다가 너무 짜서 다 버린 적이 있다. 이번엔 실수하지 않으려고 레시피를 찾았다. 당근 600g 기준으로 소금 0.7스푼. 정확하게 재서 넣고 골고루 섞은 뒤 30분을 기다렸다. 타이머를 맞춰놓고 설거지를 했다.
타이머가 울렸다. 당근을 꼭 짜서 물기를 뺐다. 홀그레인 머스터드 2스푼, 알룰로스 2스푼, 레몬즙 3스푼, 후추를 넣고 버무렸다. 마지막으로 올리브오일 5스푼을 넣어 코팅했다. 한 입 먹어봤다. 지난번보다 훨씬 맛있다. 새콤하고 아삭하다.
당근 라페는 활용도가 높다. 샐러드에 넣어도 되고 김밥 재료로도 좋다. 샌드위치에 넣어 먹어도 맛있다. 두 개의 용기가 나왔다. 일주일은 넉넉히 먹을 수 있겠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핑계를 대면서 먹는 것으로 풀었다. 하지만 체중계 앞자리 숫자가 변하려 하고, 배가 나오면서 깨달았다. 내가 나를 망가뜨리고 있었다는 걸. 회사 일이 힘든 건 사실이지만, 그걸 이유로 내 몸을 방치할 수는 없다.
당근 라페는 나를 위한 음식이다. 내가 내 몸을 대하는 방식에 관한 선택이다. 식탁 위에 올려둔 당근이 매일 묻는 것 같다. "오늘, 나는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바쁜 당신을 위한 3줄 팁
당근을 미리 씻어 보이는 곳에 두면 만들기 시작하기 쉽다
소금 0.7스푼(600g 기준)으로 30분 절이면 적당하다
김밥, 샐러드, 샌드위치 등 일주일 내내 활용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