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의 마무리
나는 지금 혼자 강원도 동해시에 와 있다. 그것도 사찰에!
작년부터 정말 해보고 싶었던 템플스테이를 실천하러 온 것이다.
연말 템플스테이 계획이 있다는 나의 이야기를 들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두 가지로 나뉘었다.
1) 왜?
2) 오! 나도 가보고 싶었는데!
2의 답변을 하는 사람들은 단순 호기심 혹은 '힐링'을 목적으로 가볍게 스치듯 생각을 해 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1의 답변을 하는 사람들에겐 나의 버킷리스트였다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답했다.
나 스스로만 알고 있다. 내 인생 처음으로 템플스테이가 간절해진 그 가볍지 않은 이유를. 하지만 다행히도 한참 템플스테이를 고민했던 당시 내 마음속을 짓누르고 있던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과거에 대한 집착은 아주 조금 희미해지고 가벼워졌다.
그때만큼 비장하지 않은 마음은 혼자 여행을 하는 나에게 훨씬 더 많은 기쁨을 안겨주었다.
청량리에서 동해로 가는 KTX 창 한가득 시리도록 푸른 물결이 차올랐을 때 그 순간 느낀 경이로움, 나 혼자 오롯이 차창 너머의 모든 풍경을 멋진 음악과 함께 음미하고 있다는 충만함, 감추사로 향하던 모든 길목에서 펼쳐진 그림 같은 풍경에 압도된 내 마음, 절의 종소리, 파도소리, 바람 소리만 가득했던 바다 옆 작은 사찰에 커다란 불상과 나만 존재한다는 것에서 오는 설명할 수 없는 커다란 벅참. 이 모든 것은 내가 '덜 비장해졌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작지만 커다란 행복의 조각들이었다.
저녁 명상시간에 스님께서도 '힘 빼기'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셨다. 힘을 빼고 현재 나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명상이 지향하는 지점이자 우리가 명상을 하는 이유라고. 덜어내기, 힘 빼기, 마음속 공간 만들기. 어쩌면 우리는 이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온갖 시련과 고난을 겪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지, 잘 극복한 상처들이 나를 저곳으로 데려다주는 걸지도.
이틀 전, 퇴근 후 친한 언니를 만났을 때 언니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제인아, 나는 널 보면 항상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의 유미가 생각 나. 너랑 참 닮았다는 생각이 매번 많이 들어."
언니가 이렇게 이야기 한 이유는 내가 만날 때마다 조금씩 성장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란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참 벅차고 따뜻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도, 깨달음도, 변화도 없었을 거라는 나의 말에 언니는 또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아니라 너에게 집중해 봐. 네가 조금 더 성숙해졌다는 거에 말이야."
내 슬픔이, 내 기억이 묽어지고 있는 과정에 있고, 그 과정 속에서 난 성장했다.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히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인생은 이런 과정의 반복일 것이다. 다만, 그 반복되는 지점에서 나 스스로가 내 마음의 파동을 점점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다룰 수 있게 되는 거겠지.
소란스럽지 않게, 귀 기울여 들어주고 넉넉하게 품어주는 사람에게서는 진주처럼 단아하고 은은한 빛이 난다. 그런 넉넉하고 여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넉넉한 품으로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 또 기꺼이 받을 수 있는 사람. 2023년은 나에게 그런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한 여정, 과정의 첫 시작점이다.
많이 아팠고, 참 감사한 한 해였다.
2023년 12월 29일 금요일,
동해시 삼화사의 뜨끈뜨끈한 방바닥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