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스테이를 마치고
나는 지금 묵호항 근처 '한결'이라는 카페 2층에, 손을 뻗으면 바다가 한 아름 품에 안길 것 같은 멋진 창가자리에 아주 어렵게 앉아 펜을 들었다. 지금 앉아있는 이 카페에 오기까지 그야말로 험난 그 자체였다.
'라운드어바웃' 카페에서 그 유명하다는 흑임자라떼를 한 잔 마시고, '묵호김밥'에 들러 기차 안 혹은 서울에서 먹을 묵호김밥 두 줄을 사고, 꽈배기까지 사러 '강추맛집'에도 들렀지만 문을 닫아 발걸음을 돌리고 장장 30분을 걸었다. 바다가 보이는데 게다가 커피까지 맛있다는 '한결'이라는 카페에 꼭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버스는 운행정보가 없었고, 택시를 타기에는 아까웠다.
호기롭게 20분쯤 걸어 묵호항까지 왔는데, 등 뒤에 매달린 배낭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어제 108배의 여파로 안 그래도 쑤신 다리는 더 아파왔다. 무엇보다도 빗방울이 빗줄기로 굵어지더니 우산을 쓰지 않고는 더 이상 걷기 힘들 정도로 쏟아져 내렸다. 마침 우산도 가져오지 않아 그냥 포기하려 했다. 근처 공용 화장실로 일단 몸을 먼저 피하고, 동해역 근처에 미리 가 있을 생각으로 택시를 불렀다. 용케도 택시는 금방 잡혔고, 이렇게 된 거 어제 못 갔던 동해제빵소에나 들러야겠다고 다짐했다. 23분 정도 걸어온 거리와 내 노고가 아까웠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날씨가 이런 걸 어쩌겠냐고, 너무 아쉬워하진 말자고 조금은 씁쓸한 위로를 하며 택시를 기다렸다.
그런데 나는 자꾸 손을 뻗어 빗줄기가 얇아졌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손을 뻗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나는 택시 호출을 취소하고 다시 걸어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비가 조금 잦아들었고, 걸을 만 해졌고, 목적지는 도보 7분 거리로 가까워져 있었다. 여기서 발걸음을 멈추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나는 다시 걸었다. 목도리를 보자기처럼 머리 위에 둘러쓰고 아주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향해 걸었다. 시야에 목적지가 들어온 순간 마음이 벅차고 스스로가 매우 기특해졌다. 카페에 자리가 없어도 목적지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온 것에 의의를 두자고 생각하며 숨 한 번 고르고 카페에 들어섰다.
예상대로 카페엔 자리가 없었다. 역시 주말이었다. 맨 꼭대기층까지 올라가 봤지만 온 테이블이 놀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체념하고 다시 돌아 내려오는 내 앞에 거짓말처럼 자리 하나가 딱 비어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자리, 그것도 글을 쓸 수 있을만한 높이의 테이블이 있는 딱 한 자리가 말이다! 앉아계시던 분이 3층으로 자리를 옮기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난 이렇게 바다가 한가득 보이는 자리에 앉아 이번 여행에서의 두 번째 글을 쓰고 있다. 참 행복하다. 존박의 노래를 들으며, 생각보다 훨씬 더 맛있는 라떼를 마시며, 바다를 보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내게는 선물 같다.
여행을 떠나 인생을 배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에서 기쁨과 좌절, 여러 감정들을 느끼고 그 감정들을 통해 인생에 대입해 보게 된다.
목표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나 자신에게 중간중간 격려를 잊지 않는 것, 포기할까 하는 순간에 아주 조금만 더 힘을 내보는 것, 그리고 그 끝이 내가 기대한 것과 달라도 실망하지 않는 것, 그 모든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온 나를 힘껏 칭찬해 주는 것. 그리고 이런 자세로 기쁘게 그리고 열심히 지낼 때 무지개처럼 기대도 못한 행운이 내 앞에 먼저 다가와 앉아있을 수도 있다는 것.
박연준 작가의 글처럼 나를 이 여행에 데리고 온 건 나의 상처다. 살면서 가장 크게 찢어져 너무 많이 벌어진 내 마음속 상처. 그리고 난 벌어진 그 상처를 내 두 눈 삼아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끼고 내 안으로 받아들였다. 이번 여행도, 2023년도, 나중에 내가 훨씬 더 나이 들었을 때 내 인생의 어떠한 '출발점'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시작은 사랑이었고 그 끝은 상처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상처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사유하며 영원할 것만 같았던 나의 싱싱한 상처에는 조금씩 딱지가 앉고 새 살이 돋고 있다. 이것이 앞으로 펼쳐질 나의 긴 인생의 출발점이길 바란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것이란 기분 좋은 확신이 든다.
2023년 12월 30일 토요일,
묵호의 푸른 카페 한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