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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삼키던 나날들

표현되지 못한 감정, 언어를 기다리는 침묵의 리듬

by 석은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나 자신이 무너질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말 대신 참고, 삼키고, 침묵 속에 묻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것은 리듬을 잃고 방향을 잃은 채, 불안으로, 분노로, 무기력으로 변주되어 마침내 감정의 언어화 회로 자체를 마비시킨다.

이번 회차는 ‘말하지 못했던 시간들’을 중심으로 감정 억압의 구조, 언어화 실패의 심리학적 기원, 그리고 그 침묵을 회복의 언어로 바꾸는 여정을 분석심리학을 포함한 다양한 이론과 사례로 탐색한다.


감정을 말하지 못할 때, 마음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까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없어진 감정’이 아니다. 그 감정은 여전히 신체 감각, 행동 반응, 인지 습관 속에 살아 있다.

감정의 언어화 실패는 결국 감정을 조절하거나 이해하는 능력을 제한하고, 자기 내면에 대한 접근 통로 자체를 차단하게 된다.

심리학자 제임스 그로스(James Gross)는 감정 억제(emotion suppression)는 일시적인 대처 방식일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정서적 재경험 능력을 저하시키고, 대인관계에서의 진정성과 공감 능력을 약화시킨다고 설명한다.

감정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곧 감정을 살아낼 수 없다는 의미다.


프로이트와 억압의 구조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의식되지 않은 것은 행동으로 되돌아온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감정이 억압될 경우
그 감정은 무의식 속에서 에너지로 남아 다른 방식(신체 증상, 반복 행동, 과잉 반응 등)으로 표현된다고 보았다.

억압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자아가 감정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심리 방어기제다. 그리고 이 방어기제는 감정을 감지하는 능력 자체를 약화시키며, 결국 자기를 이해하는 언어를 차단한다.


분석심리학 관점: 침묵 속의 ‘그림자’는 말하기를 기다린다

융 심리학에서는 표현되지 못한 감정이 **그림자(shadow)**라는 형태로 무의식에 저장된다고 본다.

‘그림자’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기억만이 아니라 감정 표현의 능력, 자기 주장, 분노, 슬픔, 열망 같은 ‘말해지지 못한 자기’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표현되지 못한 감정이 축적되면, 그림자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등장한다:

사소한 말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자기

감정을 잘 설명하지 못하는 답답함

상황에 상관없이 반복되는 자기 비난

누군가의 감정 표현에 강한 저항감

이러한 반응은 그림자가 “이제 말해 달라”는 신호일 수 있다.

융은 말한다:

“그림자는 무의식의 입을 빌려 언젠가 반드시 말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말은, 때로는 파괴적이고, 때로는 치유적이다.”


사례: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지낸 청소년의 이야기

중학교 3학년 여학생 B는 늘 “별일 없어요”라고 말하며 상담을 시작했다. 감정에 대해 묻는 질문에는 “그냥 그렇죠”, “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라고 답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자주 복통을 호소했고, 일상에서 소소한 요구(예: 단체 활동 중 ‘싫다’고 말하기)에 큰 불안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감정 표현에 대해 “그건 예의가 아니야”, “너만 힘든 거 아니야”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녀의 감정은 ‘말할 수 없음’의 리듬 속에 고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 번은 다른 학생이 상담실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본 후 그녀는 말했다.

“저도 그런 말 하고 싶은 적 많았는데... 근데 말하는 순간, 저라는 사람이 부끄러워질까 봐 항상 멈췄어요.”

그녀는 처음으로 ‘말하고 싶었던 자기’와 ‘말하지 못하게 한 자기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게 되었다.


말을 삼킨다는 것의 심리적 기능

감정 표현을 회피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관계의 위협 회피
감정을 말하면 관계가 깨질까 봐 침묵하는 경우
(특히 부모-자녀, 교사-학생, 또래 집단 안에서)

자기 보호 욕구
감정을 말하는 순간
“약한 사람”, “감정적인 사람”, “문제 많은 사람”으로 보일까봐

감정에 대한 낙인 신념
“감정을 말하면 민폐다”,
“조용히 넘기는 게 성숙한 거다”

이러한 신념은 감정 표현을 막는 내면 규범(inner rule)으로 자리 잡아 결국 자기 감정에 대한 검열 체계를 형성한다.


언어는 감정의 그릇이다

심리치료에서 감정 회복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에서 시작된다.

언어는 감정을 구체화하고, 경험을 해석 가능하게 만든다. 언어화되지 않은 감정은 대개 타인에게 공유되지 못하고, 자기 안에서도 이질적이고 위협적인 것으로 분리된다.

언어화는 결국 감정이 나의 일부가 되는 과정이며, 그 과정을 통해 감정은 자기 파괴의 에너지에서 자기 회복의 자원이 된다.


분석심리학적 확장: 말의 상징성

융은 언어를 단지 ‘표현 수단’이 아니라 무의식과 의식을 연결하는 상징의 매개체로 보았다.

그는 꿈, 이미지, 신화, 말 등의 상징이 내면의 복잡한 감정 상태를 의식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주는 중간 언어라고 설명했다.

즉, 말하기는 감정을 말하는 행위이면서 그 감정을 내면적 상징으로 통합하는 행위다.

그림자 속에 묻혀 있던 감정을 ‘언어’라는 상징으로 번역할 수 있게 되면, 그 감정은 더 이상 무의식적 파괴물이 아니라 자기 이해의 일부가 된다.


표현의 회복: 감정 말하기 연습

감정을 말하는 연습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지금 나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가?”

“그 감정은 어떤 말투, 표정, 몸의 느낌으로 나타나는가?”

“그 감정을 말했을 때, 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이러한 연습은 감정과 나 사이의 거리감을 줄이며, 자기 신뢰의 회복을 돕는다.

말은 감정의 정리를 돕고, 정리된 감정은 다시 언어로 이어져 내면의 리듬을 회복하는 순환 구조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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