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관해 주는 모든 순간들에게 인사를

Thank you

by 신희

아이러니를 겪고 있다. 알쏭달쏭함을 궁금해하기보다는 무턱대고 누리고 있다. 무슨 아이러니인가 하면, 앞 날이 불투명한 이 투병 생활 속에서 생후 처음 같은 평화로움을 맛보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자유를 얻었다고도 말해주었는데, 평화이든 자유이든 어떻게 명명하건 간에 이 평탄한 상태는 그토록 얻고 싶었던 무엇이다.



어째서 고통으로 신음하고 느린 자살 같던 삶이었을 때에는 지금의 이 평화가 외면해 왔던 것일까. 갈망하고 쫓아가던 메마른 시절에는 마르지 않는 눈물 때문에 눈가가 상해버렸었는데. 지금은 고통과 고독의 궁극인 죽음, 게다가 평균값에서 제법 떨어진 특이값인 이른 죽음일 수도 있는 지점 언저리에 와있는데 말이다. 혼자 죽음 공부를 하면서, 죽음은 생명의 종식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유한한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귀결이며 모든 존재에게 일상의 일부인 거구나 라는 깨달음이 있었다. 빨리 죽는다고 해서 억울할 일이 아니구나.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구나. 와이 낫. 책을 죄다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찾으면 찾을수록 책은 많았는데, 생각보다 깨달음이 바로 눈앞에 당도해 있어서 당황했다.



그리고 나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특별한 신호 앞에서 나의 관계망은 공기의 변화를 눈치챌 정도로 자신의 어깨를 가까이 두고 귀를 넓게 편 채 곁을 지키고 있다. 말할 의지만 있다면 그 귀들은 기꺼이 들을 준비가 늘 되어 있다. 손에 쥔 종이조각을 부스럭부스럭 매만지며 망설이다가, 어쩌면 누구도 듣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모를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뱉어냈다. 자, 들어보세요. 저는 빨리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에요. 기했다는 게 아니라 불가해한 일에 대한 의문처럼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에요. 말하는 눈과 듣는 눈은 분명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다는 걸 각자 알고 있지만, 그 시선의 끝과 끝이 함께라는 공간을 그려내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새로울 것도 없는 개별적인 깨달음이 존엄 어린 대우를 받은 것이다. 내면의 말들에 시선을 빼앗기기 일쑤이다 보니 주변 세계의 생김새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감고 있던 눈을 뜬 것처럼 점차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 자신과 있는 것이 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도 불편하지 않게 느껴져서, 혼자 속으로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 감각은 번개처럼 번쩍 하고 찾아왔다가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감쪽같이 사라지던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긴 시간 지속되고 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간 나는 비질을 하며 마음에 남아있던 찌끼들은 쓸어내듯이 글도 써보고 책도 읽어보고 말도 해보고 했었는데 그 덕분일까. 특히 마지막 앙금까지 몰래 싹싹 털어 쓸어내고서 험한, 낯설고 명랑한 평화 또렷하게 기억해두고 싶다. 그 순간 나는, 언제라도 불행의 기척이 나타나면 달아날 준비를 하는, 귀를 바짝 세운 토끼처럼 눈을 깜빡이지 못하고 동그랗게 뜬 채 있었다.



눈을 감고 비질을 해오던 나는 더 이상 쓸어내릴 것이 없는 맑게 개인 하늘을 발견했다. 빗자루가 좌에서 우로 지나간 길을 낸 것 같은, 희미한 구름이 옅고 가늘게 번져간 자국만 남아있다. 맑음이 어색해서 되려 이를 고민 삼는다. 백지 같은 마음이 습관처럼 이내 빈 시간 앞에서 쓸쓸해진다. 나를 상관해 주는 누군가가 틀어놓은 서정적인 배경음악이 귀에 파고들어 와 마음을 온통 물들인다. 마치 내 마음이 원래 이런 울적한 색감이었던 것처럼 음악에 녹아들어 간다. 비어있기 때문에 물드는 것이고 슬픔도 느낄 수 있는 것이구나. 나를 향한 손길과 슬픔에 같이 섞여 들어간다. 온기와 아릿함 속에 머물러본다.



문득. 찾아오는 손길과 목소리들 하나하나를 몹시 반가운 손님으로 맞이하자고 나에게 말해본다. 그 손길에서 진심의 퍼센티지를 분석하거나 위선을 거르려 하던 지난날의 나에게 말한다. 그 목소리들이 결국은 자신의 괴로움에 대한 아우성일 뿐이라고 피로해하던 나에게 새겨둔다. 나를 홀로 두지 않고 상관해 주는 모든 순간들에게 고마워하자고. 그건 분명 고마운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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