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은 달려가는 노화다

드라마보다 극적인

by 신희

노화는 모든 사람이 겪지만, 병은 급속도의 노화라는 면에서 극적이다. 발달 단계를 하나씩 순차적으로 거치는 사람들에 비해 엄청난 비약적 속도로 기능들이 퇴화되어 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행위들의 템포가 병든 사람 입장에서는 무척 빠르게 느껴진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만 중력이 더 강력하게 작용하는 세상을 살게 되며, 물속을 힘겹게 걷듯 움직인다. 급속도의 노화는 나만 빼고 모두가 달려가는 세상에 남겨지는 일이다.



특히나 젊어서 생존을 다투는 중증 질환을 겪으면 이 변화는 충격적인 사건이 된다. 속해있던 연령층의 집단에서 떨어져 나오는 속도와 거리는, 비유하자면 아마도, 액션 영화에서 질주하던 차에서 도망치려고 차문을 열고 몸을 내던지며 겪는 것과도 비슷할 것이다. 차들은 달려가버리고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몸은 쓸 수 없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죽지 않지만, 현실에 그 주인공이 등장하면 극단적 장기생존자라는 특별한 명칭을 부여받으며 연구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젊은 중증 질환자는, 특히 암과 같이 독성 치료를 동반하는 경우에는, 노화를 압축적으로 단기간에 경험하게 된다. 속수무책으로 신체 기능들을 빼앗기며 퇴화를 당한다. 일상 속 사회 공동체로부터도 퇴장당한다. 이는 한창 달리며 눈코 뜰 새 없이 살아야 할 나이에 당연한 수순이면서도 당사자에게는 몹시도 지독한 일이 된다. 거기에다가 자녀를 양육하는 보호자의 경우에는 둘 중 하나이다. 나는 죽을 수 없어, 꼭 살아서 내 아이를 지켜줘야만 해. 혹은, 앞으로 내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없다니, 나는 아직 죽기에 너무 어린데. 어느 편이든 뜨거운 눈물을 삼키거나 눈물에 삼켜진다.



그럼에도 자녀를 돌볼 책임이 있다는 것은 살아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또한 함께 부양할 동반자가 있을 가능성도 높다. 이것이 살아갈 힘이 될지 삶의 동력을 갉아먹는 원인이 될지는 제각각의 가정 풍경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갈등도 삶을 지탱해 주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어떤 골칫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에너지가 계속 순환하며 여러 기능들이 작동해 나가기 때문이다. 순기능이냐 역기능이냐의 방향성을 생각해 보기 이전에, 삶을 굴러가게 한다는 의미에서 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중년에 한해서 비교적 보기 쉬운 풍경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나보다 늙고 나보다 건강한 부모를 가족으로 둔 나의 시선에서 본 것이기도 하다. 나는 그들이 부럽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도저한 심적 고충을 헤아릴 길이 없다. 곁에서 연약한 어깨를 쓰다듬고 손을 잡으며 쓰디쓴 눈물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 혹은 살아있는 동안 할 일이 분명하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일 외에는 가진 것이 남아있지 않던 사람이 일마저 할 수 없게 되었을 경우에 겪는 고통과 슬픔을 읽어낼 시선이 있다면, 세상을 보는 시력을 빼앗긴 것, 인생을 통째로 상실했다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을는지.



생각을 하고 생각 속 세상에서 어떤 개념들을 조작하며 그 작용을 지각하는 일. 그 일에 있어서 나는 벼린 칼 같던 무기를 잃었다. 세상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달려가는 세상 속에서 나 혼자 멈춘 것에 가깝다. 이는 일상적 감각이기도 하다. 언제든 누구나 행위를 멈추고 세상과의 연결을 차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영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은 참담한 심정을 안겨준다. 나는 그런 이유들로 인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든 어떤 형태이든 기록이라는 일을 하고 싶다. 나의 기능들이 선순환이든 악순환이든 무디고 녹슨 이 상태로도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살아있다는 하나의 증거이며 살아갈 마지막 이유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빠져나갈 예정인 채로 아직 남아있는 머리카락들처럼 더없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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