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번째 암 진단을 받고, 작년 여름휴가 시즌에 꼬박 요양병원에 있었다. 가족들과 시골 부모님 댁에서 함께 보낼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는 충격을 받으셨고, 엄마는 시시때때로 내 안부를 챙기셨다. 동생들은 전화를 걸지 못하기도 했고, 안 하던 전화를 울며 하기도 했다. 조카들은 큰 이모의 부재를 허전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난 후의 2번째 연휴 시즌이 돌아왔다. 무척이나 긴 25년의 추석 연휴였다. 아마도 그렇게나 긴 연휴는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처음이지 않았을까? 이제는 기억력도 둔하고 흐릿해져서 사실 여부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나는 그렇게 긴 시간을 시골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낼 수 있을까? 그것이 두려웠다. 잠을 잘 수 있을까? 같은 식단의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여러 명의 가족들 속에서 어떻게 지내면 좋을까?
요즘 부쩍 내 상태에 민감해진 엄마는 버텨보자며 도전의 말을 불쑥 건네왔다. 겁이 많은 나와 모험심이 많은 엄마의 관계는 멀리서 보면 안심이 되는 조합이지만, 정작 내 소소한 불안들이 가라앉게 되지는 않는다. 가는 그 순간까지 두려움이 와서, 없던 통증마저 공포처럼 밀려왔다. 막상 이 정도까지 되면 아이러니하게도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는 엄마의 담담함이 사실처럼 다가오고 그제야 의지가 된다.
진통제를 먹고 엄마가 운전하는 경차에 올라탔다. 도착해 보니 나는 실컷 졸았었다.
시간이 지나 보니 나는 환자처럼 연휴를 보냈었다. 시끌벅적한 가족들 속에 섞이듯 어우러지지 못하면서 그렇게 환자답게 같이 있기도 하고 같이 못 있기도 했다. 아마도 나는 환자가 아닌 모습으로 같이 있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럴 자신이 없어서 염려했던 게 아닐까? 조카들이 약 먹는 이모를 낯설어하기보다는, 옆에 들러붙어서 많은 약통들을 궁금해하고 알록달록 약 색깔을 구경해 주는 것이 피곤하면서도 고마웠다.
사실은 피곤해하지 않고 싶었던 것이 내 욕심이었고, 생각해 보면 건강할 때도 아이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피로한 일이었는데도, 환자라는 현실이 내 마음을 더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구나 싶어진다. 그래도 환자의 모습 그대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의문도 남겼을 것이고 불편함도 서로 나눠 가졌겠지. 그런 마음들도 어쩔 수 없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존재가 가족이었지.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