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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Oct 30. 2021

[한국 IN 공공누리]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 문화재

공공누리 X 이야기발전소

지난 2008년 서울 한복판에서 엄청난 화재사건이 발생했습니다. 60대 남성 한 명이 2월 10일 저녁 8시 40분경 시너와 라이터를 이용해 일부러 불을 지른 방화사건입니다. 해당 화재로 누각 2층의 보와 서까래, 도리 등이 일부 소실되었고 4개의 고주(높은 기둥) 상부가 불에 탔으며 지붕의 붕괴로 인해 목재결구가 뒤틀리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문제는 불을 지른 곳이 '국보 1호'라는 이름으로 보호를 받는 문화재인 '숭례문'이라는 점입니다. 5년 뒤인 2013년 4월 29일에 복원은 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다시 피어오른 논쟁거리가 있습니다. '국보(國寶)'라는 이름까지 붙여준 소중한 문화재에 대한 관리에 대한 문제도 있었지만 논쟁이 된 핵심은 숭례문에 과연 '국보 1호'라는 이름이 붙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먼저 문화재가 무엇인지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숭례문 (사진출처 : 문화재청)

[공공누리에서 '숭례문' 이미지 찾아보기 - 국보제1호_서울숭례문| 이미지 | 추천공공저작물 | 공공누리 (kogl.or.kr)]


문화재를 사전에서는 '문화 활동에 의하여 창조된 가치가 뛰어난 사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에서의 핵심은 '문화 활동'입니다. 즉, 그냥 오래된 옛 것이라서 문화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을 거쳐서 사람들에게 무언가 이익이 되는 행위가 있어야 문화재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길가의 평범한 돌멩이는 문화재가 아니지만 그 돌을 깨서 사냥을 했거나 성곽을 쌓는 데 사용했다면 문화재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금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나 스마트폰 역시 몇 백 년이 지난 어느 시기에는 문화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화재에는 시대가 녹여져 있고,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도구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죠. 

우리나라의 문화재청에서는 국보, 보물,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국가무형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 국가등록문화재, 시도무형문화재, 시도유형문화재, 시도기념물, 시도민속문화재, 시도등록문화재, 문화재자료, 이북5도 무형문화재 등으로 나누어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름에서 보듯이 어떤 건물이나 사물뿐만 아니라 춤, 노래, 누비 바느질, 가야금 연주와 같이 무형의 가치들도 모두 문화재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국보 1호 논쟁을 본격적으로 하기에 앞서 한 가지 더 살펴볼 내용은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을까?'입니다. 여기에 국보 1호에 대한 논쟁의 핵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한 유교 사회였기 때문에 과거의 무언가를 들추어 연구하는 노력은 부족했습니다. 조선시대까지도 조상에 제사를 지내고, 국가적인 행사에 종묘제례악을 연주하는 '현재'의 행위는 잘 지켜왔지만 굳이 신라시대를 이해한다는 이유로 경주의 무덤을 파서 연구를 진행하지는 않았죠. 과거의 역사는 문헌 자료가 중심이 되고, 지상에 남아있는 문화재들을 잘 보존하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외국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정복 국가에 대한 약탈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물건들을 마구 가지고 가는 습성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예술품을 비롯한 옛날의 문화재를 보는 눈도 조금 더 빨리 뜨게 됩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이나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작품들 중 상당수가 침략 전쟁으로 얻은 전리품이고 원래의 나라와 문화재 반환에 대한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땅 위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 약탈된 것이 아닙니다. 진짜 옛날의 귀한 유물은 왕족의 무덤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제국주의 국가들은 무덤에 대한 도굴도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에는 조상의 묘를 파헤치는 행동 자체가 패륜으로 보일 뿐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강하게 추진한 직접적인 이유도 독일의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문화재와 유물을 대하는 시각이 다르다 보니 우리나라보다는 약탈자들이 문화재나 유물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았고, 그 관심이 가치를 보존하는 방법을 찾는 것으로 진화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화재 관리 역시 약탈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약탈자는 단순히 몇 개의 유물만을 약탈하지 않고 나라 전체를 빼앗아버린 일본제국입니다. 일제는 1934년 8월 25일에 관보를 통해 1차 지정문화재를 발표합니다. 이미 친일파로 변절한 최남선을 비롯해 한국인 5명을 포함한 25명이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를 만들어 한반도의 문화재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작업을 해왔습니다. 보물 제1호 경성 남대문, 보물 제2호 경성 동대문, 보물 제3호 경성 보신각종,... 이런 식으로 보물에 번호를 매겨서 발표합니다. 이것이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국보 1호=남대문'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 1호는 남대문으로 정했을까요?

남대문 옛모습 (사진출처 : 전쟁기념관)

[공공누리에서 '숭례문' 이미지 찾아보기 - 6.25전쟁 슬라이드 : 서울 남대문| 키워드저작물 | 추천공공저작물 | 공공누리 (kogl.or.kr)]


여기에도 철저히 우리나라를 기만하는 전략이 숨겨져 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인 40~50만 명이 지낼 수 있도록 용산 신도시 건설 계획을 세웁니다. 그 과정에서 기존 도성의 관문들은 방해가 되니 모두 철거 대상이 됩니다. 조선 건국 이후 한양 천도 과정에서 유교의 '인의예지' 정신을 담아 이름을 지었던 4개의 성문이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처럼 이름을 잃은 것을 넘어 이젠 철거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 거류민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가 반대를 합니다. 그 이유는 남대문(숭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입성한 문이고, 동대문(흥인지문)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성한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2개의 문은 살아남고 돈의문(서대문)과 숙정문(북대문)을 비롯해 혜화문(동소문), 소덕문(서소문), 창의문(북소문), 광희문(남소문)은 모두 철거됩니다. 

즉, 문화재적인 가치로 번호를 붙인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점령한 것을 기념하는 승전 문이기 때문에 1번과 2번을 받은 것입니다. 


흥인지문(사진출처 : 문화재청)과 포석정 (사진출처 : 한국관광공사)

[공공누리에서 '흥인지문' 이미지 찾아보기 - 보물제1호_서울흥인지문| 이미지 | 추천공공저작물 | 공공누리 (kogl.or.kr)]

[공공누리에서 '포석정' 이미지 찾아보기 - 포석정유상곡수| 이미지 | 추천공공저작물 | 공공누리 (kogl.or.kr)]


고적(古蹟, 해방 이후 사적(史蹟)으로 명칭 변경) 1호가 되었던 포석정 역시 일제의 기만 정책이 숨겨져 있습니다. 물길을 내서 그 위에 술잔을 띄울 수 있게 만든 포석정은 신라시대 귀족들이 음주가무를 즐기던 놀이터로 알려져 있는 곳입니다. 조금은 독특한 모양을 가진 이 포석정은 신라의 마지막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로 진격해왔을 때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다가 견훤에게 죽임을 당하고 신라가 멸망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경애왕의 무능함과 향락을 일부러 강조하고 있지만 이 역시 사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경애왕이 포석정을 찾은 시기가 음력으로 11월입니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12월이나 1월 초가 되니 완전 한겨울입니다. 또 이 시기에 이미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해 구원병 1만이 내려오는 중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포석정은 6세기 후반에 최고의 화랑인 풍월주를 지낸 문노(文努)의 화상을 모신 포석사가 있는 곳입니다. 태종 무열왕이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결혼식을 한 곳이기도 한 포석사는 신라에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소망을 비는 장소입니다. 정황을 보면 신라의 입장에서는 포석사에서 기도를 하며 고려의 구원병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모습이지만 일제를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일제는 적이 쳐들어와도 '임금이나 중신들이 술이나 마시며 놀고 있으니 망할 수밖에 없고, 그런 자들의 후손인 너희들은 식민지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패배주의를 심어주기 위한 의도입니다. 

백제의 의자왕에게 삼천궁녀의 모함을 씌운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더 큰 문제는 해방 이후에 1962년 문화재 보호법을 제정할 때 이런 일제의 만행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한 점입니다. 바뀐 것이 있다면 일제강점기 때에는 식민지이기 때문에 '국보'가 없었지만 이제 우리의 나라를 찾아서 '국보'가 생긴 것뿐입니다. 내용은 일제가 지정해둔 문화재 지정번호까지도 그대로 가지고 와 국보 1호 남대문, 보물 1호 동대문, 사적 1호 포석정으로 정해버립니다. 숭례문이 아닌 남대문이고, 흥인지문이 아닌 동대문이라는 이름까지도 그대로 사용해버립니다. 문화재 지정번호제도는 국보나 보물 등 문화재 지정 시 순서대로 부여하는 번호지만, 일부에서 문화재 지정순서가 아닌 가치 서열로 오인해 설화 논란이 제기되는 경우도 있어왔습니다.

[참고 어문 / 공공누리에서 '문화재 지정번호' 자세히 알아보기 - https://bit.ly/3BfDUQv ]


그래서 지난 2021년 6월 29일부터는 문화재청에서 더 이상 문화재에 번호를 붙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국보 1호 남대문이 아니라 그냥 국보 숭례문입니다. 우리의 문화재는 모두 소중한 것이지 굳이 번호를 매겨서 중요도가 다른 것처럼 인식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무령왕릉 (사진출처 : 대성동고분박물관)

[공공누리에서 '무령왕릉' 이미지 찾아보기 - 무령왕릉발굴과정| 이미지 | 추천공공저작물 | 공공누리 (kogl.or.kr)]


문화재 보호를 위해 원칙과 체계가 필요한데 미처 정리되기 전에 뼈아픈 사건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무령왕릉' 발굴입니다. 

공식 명칭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이지만 우리에게는 무덤의 주인인 '무령왕릉'으로 더 알려진 이 문화재는 1971년 7월 8일에 우연하게 발견되어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의 힘으로 처음 발굴을 시도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국내 고고학이 초기 걸음마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발굴을 담당하시는 분들도 어려움이 있었는데 더 큰 문제는 언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입니다. 기자들은 그냥 내부로 뛰어들어가 사진을 마구 찍어댔고, 말리는 책임자를 폭행하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 유물의 도난을 막기 위해서라도 급하게 진행하니 기록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냥 유물을 쓸어 담아 버립니다.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의 고고학계에서는 문제점을 깨닫고 황룡사지를 비롯한 다른 유물을 발굴할 때에는 보다 체계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또 하나의 결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 한국관광공사

[공공누리에서 '가야고분' 이미지 찾아보기 - 아라가야고분군| 이미지 | 추천공공저작물 | 공공누리 (kogl.or.kr)]


오늘도 오래된 옛 무덤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찾는 무덤은 한두 개가 아닙니다. 지역도 김해, 함안, 창녕, 합천, 고령, 남원 등 6개로 나뉘어 있고, 각각의 지역에서도 무덤은 여러 개가 한 곳에 모여있습니다. 그래서 이 무덤들의 이름도 옛날 무덤이라는 '고분(古墳)'에 무리라는 뜻의 '군(群)'을 붙여서 고분군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이 고분군을 찾는 것은 옛날에 사라졌던 '가야'에 대한 역사가 남아있는 유일한 흔적이기 때문에 연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가야고분군'을 2022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6개의 지자체가 2018년 5월부터 함께 공동의 추진단을 만들어 열심히 노력 중입니다. 이미 2020년 9월 10 문화재청의 세계유산 최종 등재 신청 대상으로 선정되었고, 이제는 서류심사와 현장실사를 거친 최종 검토 과정이 남았습니다. 

[참고 어문 / 공공누리에서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자세히 알아보기 -  https://www.goseong.go.kr/board/view.goseong?boardId=BBS_0000070&menuCd=DOM_000000104001001001&startPage=76&dataSid=1188437 ]


그런데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무엇이길래 6개의 지자체가 공동으로 추진단까지 만들어서 등재하려는 것일까요? 


유네스코는 이러한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자연유산 및 문화유산들을 발굴 및 보호, 보존하고자 1972년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 보호 협약(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rl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 약칭 ‘세계유산 협약’)을 채택했습니다. '세계유산'이라는 특별한 개념은 유산들이 특정 소재지와 상관없이 모든 인류에게 속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평원에서부터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남미대륙의 바로크 성당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그리고 유네스코는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으로 나누어서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세계유산은 전 세계 167개국에 총 1,121점(2019년 등재기준)이 등재되어 있으며, 인류 무형문화유산은 전 세계 128개국 92건(2020년 등재기준), 세계 기록유산은 124개국 8개 기구 432건(2017년 등재기준)이 이릅니다. 

장경판전 입구 (사진출처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강화대산리고인돌 (사진출처 : 문화재청)

[공공누리에서 '장경판전' 이미지 찾아보기 - https://www.kogl.or.kr/recommend/recommendDivView.do?atcUrl=keyword&recommendIdx=123]

[공공누리에서 '고인돌' 이미지 찾아보기 - https://www.kogl.or.kr/recommend/recommendDivView.do?atcUrl=keyword&recommendIdx=32]


우리나라의 세계유산은 해인사 장경판전(1995년)에서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2000년), ‘한국의 서원(2019년)’까지 총 14점, 무형문화유산은 종묘 및 종묘제례악(2001년)과 판소리(2003년), 김장문화(2013년), 연등회(2020)까지 총 21점, 세계기록유산은 훈민정음(1997년)과 난중일기(2013년),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2015)까지 총 16건이 등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면 어떤 좋은 점이 있을까요?

저개발국의 경우에는 세계유산기금 및 세계유산센터,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등 관련 기구를 통해 유산 보호에 필요한 재정 및 기술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큰 장점은 국제적인 지명도가 높아지면서 관광객 증가일 것입니다. 관광객이 증가하면 고용이 늘어나고 그 지역의 수입도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선진국은 오히려 유네스코 신탁기금을 내기 때문에 금전적인 이익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문화재 보존에 힘을 쓰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찾는 사람들 역시 더 이상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을 기대하는 정도라고 보면 됩니다. 


반달리즘(Vandalis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로마를 비롯해 유럽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는 반달족에서 시작된 말인데 요즘은 문화재 파괴행위의 의미로 많이 사용됩니다. 특히 IS를 비롯한 무장테러단체들이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소식은 뉴스를 통해서도 간간히 보도가 됩니다.

 

문화재가 파괴되고 사라지는 것은 단순히 어떤 유적지나 사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를 살았던 누군가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문화재 파괴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하게 발생되는 일입니다. 얼마 전에도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 중 하나인 김포의 장릉 바로 옆에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문화재청에 신고를 하지 않고 건물부터 올리는 일이 보도되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사람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개발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문화재를 관리하는 담당기관과 긴밀하게 협의를 하면서 진행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참고 어문 / 공공누리에서 '김포 장릉 아파트' 자세히 알아보기 -  https://www.incheon.go.kr/moo/MOO030101/2076647 ]


종교의 영향이나 경제적인 이유로 조상들의 귀중한 문화재를 파괴한다면 후손에게 우리가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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