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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Oct 05. 2021

우리나라가 독립할 때 다른 나라는?

그때 다른 나라는?

독일과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미국과 소련은 본격적으로 이념적인 대립을 시작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은 전체주의, 군국주의와 싸운 동료였지만 이제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나라로 서로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입니다. 이 둘의 대립은 서로 직접 총을 쏘는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 전쟁과는 차이를 두는 의미로 '냉전 (Cold war)'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식민지로 있던 나라들이 독립을 하기도 하고, 전쟁의 소용돌이에 직격탄을 맞은 유럽의 재건활동이 진행되는 시기입니다. 


우리나라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임시정부 수립과 항일 무장독립투쟁을 이어왔습니다.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김원봉, 운세주, 한빈, 김학무 등 130여 명은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1938년 10월 조선 의용대를 창설합니다. 그리고 중국군을 도와 대일본 전투에 참가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다가 1940년에 충칭에 안착합니다. 그리고 1940년 9월 17일에 한국광복군을 창설합니다. 조선의용대의 활동무대가 조선인이 많이 살고 있던 화베이 지역으로 옮겨지자 화베이로 가지 못한 조선의용대원들은 한국광복군에 합류합니다. 한국광복군은 인도, 버마 전선에서 영국군을 도와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기도 하고, 중국에 있는 미국 OSS와 합작해 조선 진입 작전을 준비합니다. 처음에는 9월에 작전을 거행하려 했지만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계획을 앞당겼습니다. 그리고 한반도로 들어올 D-day를 8월 18일로 정했습니다. 미국 전략 사무국은 이 작전은 독수리 작전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하지만 진입 3일 전인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이 작전은 무산됩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반도의 통치를 두고 미국과 소련은 갈등을 빚습니다.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와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직접적으로 부딪힌 곳이 소련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 모두에 있었습니다. 소련의 서쪽이 동유럽이라면 동쪽은 한반도입니다. 게다가 한반도는 지리적인 특성상 대륙에서 동쪽의 끝에 있기 때문에 한반도가 모두 공산주의가 된다면 일본 역시 도미노 현상처럼 넘어갈 가능성이 매우 높았죠. 결국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소비에트 민정청이, 남쪽은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이 다스리기로 합니다. 

북쪽에는 김일성이 소련을 등에 업고 재빠르게 권력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친일파 청산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남쪽은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미국의 생각은 오로지 소련의 남하를 막는 것에만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상태에 있었던 나라의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장에 생길지도 모를 혼란을 막고자 일제 강점기 때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 했습니다. 이 상황을 교묘하게 잘 이용해 권력을 차지한 이승만 역시 친일파들의 기용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38선 남쪽은 지배층이 일본과 친일파에서, 미국과 친미파로 탈을 바꿔 쓴 옛 친일파로 바뀔 뿐이었습니다. 북쪽에 있던 친일파들은 대거 남쪽으로 도망을 오게 되고 그들은 '반공'을 전면에 내세우게 됩니다. 

남쪽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이 남아있었지만 미국에 빌붙은 옛 친일파와 북에서 내려온 옛 친일파, 그리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이승만 등의 세력에 탄압을 받습니다. 그래서 제주 4·3과 같은 만행도 저지르기에 이릅니다. 

초기에는 남북이 하나의 정부, 하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쪽에서는 친미파로 돌아선 친일파의 만행이 이어졌고, 북쪽에서는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세워져 정부의 역할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48년 남한만 총선거를 실시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됩니다. 김구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면 분단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조차 친미파로 돌아선 옛 친일파에게 절차적인 명분만 제공할 뿐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의 정부가 수립된 것을 두고 '건국절'이라 부르자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정부 수립과 나라를 건국한 것을 혼돈해서 말하는 무식한 소리입니다. 우리는 이미 1919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건국했고, 임시정부가 아닌 정식 정부를 수립하기까지 30년간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펼쳐왔는데 1948년을 건국이라고 해버리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가장 처음에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 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출처 : 국가법령정보센터. 대한민국 헌법 전문)


이런 이유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이라고 하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 역사를 부정하는 말이 되기 때문에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북한 역시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됩니다. 이렇게 남과 북은 서로 다른 나라, 다른 정부가 되었고,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기습적으로 침공하며 한반도에서 다시 대규모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다른 독립국가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해서 독립한 나라들이 터키,... 등이 있다면, 우리나라처럼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해서 독립해 하나의 나라가 된 나라들도 있습니다. 


먼저 레바논은 1943년 11월 22일 프랑스로부터 독립합니다. 레바논은 중동에서도 요충지에 있어 주인이 많이 바뀐 나라입니다. 기원전에는 페니키아 인들이 다스렸고, 그 페니키아 인들이 북부 아프리카로 가서 카르타고를 건설합니다. 그리고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를 거쳐 로마의 지배를 받다가 이슬람교가 시작된 후에는 아랍인들에 의해 이슬람화 됩니다. 십자군 전쟁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가 1516년에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어 19세기까지 지배를 받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 제국이 패전국이 되면서 1923년에 시리아와 함께 프랑스의 위임 통치령이 되었습니다. 이후 1926년에 시리아에서 분리되어 위임통치 자치국으로 있다가 1941년 11월 26일에 독립을 선언하고, 1943년 11월 22일에 독립을 인정받습니다. 


아이슬란드는 874년에 노르웨이 사람인 잉골프 아르나르손이 정착하면서 사람이 살게 된 추운 섬나라입니다. 1262년에 노르웨이 세습 왕국령이 되었지만 1380년부터 덴마크의 지배에 들어갑니다. 1904년에는 자치가 인정되었지만 덴마크의 왕이 함께 지배하였습니다. 1940년 4월 9일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자 중간에 붕 떠버린 상태가 되지만 1달 만인 5월 10일에 영국이 점령합니다. 영국이 땅은 점령하였지만 덴마크령으로 보는 것이 맞고, 1944년 6월 17일에 공화국으로 완전히 독립합니다. 


인도네시아는 7세기 즈음에는 스리위자야 왕국이, 10세기 즈음엔 불교인 샤일렌드라 왕국과 힌두교인 마타람 왕조가 지배합니다. 13세기에는 힌두 왕조인 마자파힛 왕국이 지배하지만 이때 이슬람교가 전파됩니다. 이후 1512년에 포르투갈 상인들이 오면서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1602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독점적으로 통치합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약탈은 파산한 1800년까지 200년 정도 이어졌고, 동인도회사 파산 이후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세워 정부가 직접 통치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에 의해 네덜란드는 쫓겨났고, 일본이 패망하고 1945년 8월 17일에 독립 지도자들은 독립을 선언합니다. 네덜란드는 군대를 동원해 독립을 막았지만 국제사회의 압력에 의해 결국 1949년 12월에 네덜란드도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승인하게 됩니다. 


필리핀은 선사시대부터 거주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말레이 문화와 힌두교, 이슬람교가 전파되기도 했었고 중국과도 무역을 하며 큰 풍파 없이 살고 있었지만 1521년 마젤란이 오면서부터 비극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마젤란은 필리핀에서 죽었지만 살아남은 선원들은 스페인으로 돌아갔고, 그 이후로 스페인에서 쳐들어와 결국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필리핀이라는 나라 이름도 당시 스페인의 왕인 필리페 2세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후 19세기까지 300년 이상 스페인의 지배를 받으며, 수도사의 천국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로마 가톨릭 국가가 됩니다. 하지만 종교권력에 심취한 교회에 항거하는 독립투쟁은 이어지고, 미국의 힘도 빌리게 됩니다. 1898년에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배한 스페인은 파리 강화조약에 따라 2,000만 달러에 필리핀과 괌을 미국에 넘깁니다. 1898년 6월 12일 필리핀은 독립했다는 생각에 제1공화국을 만들었지만 미국이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미국의 식민지가 됩니다. 1905년 7월 29일에는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일본이 한반도를 보호령으로 삼아 통치하는 것과 미국의 필리핀 식민 통치를 서로 인정'하는 태프트-가쓰라 밀약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미국도 일본과 다름없는 하나의 침략적 제국주의 국가일 뿐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이 점령을 했고, 일본군은 1943년에 필리핀 독립을 승인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1946년 7월 4일에 미국도 필리핀의 완전 독립을 인정합니다. 


1947년에는 인도파키스탄도 영국으로부터 독립합니다. 영국은 1877년부터 인도제국을 세우며 직접 통치를 했지만 1차 세계대전 때 인도의 독립을 조건으로 인도의 병력을 유럽전선에 보냅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약속을 그대로 지킬 영국이 아니죠. 이후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주도한 변호사 출신의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를 필두도 반영 운동이 이어지고 1935년에는 약간의 자치권이 주어집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영국은 또다시 독립을 조건으로 인도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간디는 거절합니다. 전쟁이 끝났지만 1947년 인도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완전히 독립을 하는 시기에 영국은 또 한 번의 만행을 저지릅니다. 영국은 이미 인도제국을 만들며 직접 통치할 때 고대의 기록에만 남아있던 카스트제도를 억지로 끌어내 인도 사람들을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하며 내부 갈등을 일으킨 전적이 있습니다. 카스트제도가 인도에 뿌리 깊게 남은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이 시기에 영국이 억지로 끌어낸 야만적인 지배 방법입니다. 그리고 떠나야 하는 시점에서 곱게 가지 않고 또 엄청난 분열의 씨앗을 남기죠. 영국이 일으킨 또 하나의 싸움 도구는 바로 종교입니다. 힌두교와 이슬람의 갈등을 일으켰고, 그 전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영국의 이간질 때문에 서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힌두교 사람들은 인도에, 이슬람 사람들은 파키스탄으로 갔습니다. 이웃이 원수가 되어 파키스탄은 1947년 8월 14일, 인도는 다음 날인 8월 15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됩니다. 참고로 인도의 비폭력 투쟁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입니다.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인도 아래에 위치한 섬나라 스리랑카도 1948년 2월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합니다. 스리랑카는 BC 500년 경에 인도 뱅골 지방의 위자야 왕자가 건너와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BC 250년 경에 불교가 전해졌고, 한 때는 인도 남부를 침략할 정도의 힘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대항해시대에 유럽인들에 의해 식민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이 먼저 왔고, 17세기에는 네덜란드가 지배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때에 인도와 함께 영국의 지배권으로 들어갑니다. 영국은 이 섬나라를 자기네 마음대로 이름을 실론(Ceylon)이라 붙입니다. 스리랑카에서 재배되는 홍차를 실론티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8년 2월 4일 영국 연방의 실론 자치령이 되었다가 1972년에 공화정으로 바뀌며 국호도 '스리랑카'로 바꿉니다. 


마지막으로 독립을 한 나라는 중동에 있으며 건국과 동시에 전쟁을 시작합니다.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모여 자기네 나라를 만들겠다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며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이 마지막 독립국가의 주인공입니다. 1948년 5월 14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그 바로 다음날 바로 1차 중동전쟁이 시작됩니다. 중동전쟁은 총 4차례에 걸쳐 이스라엘과 주변의 아랍국가들이 벌인 전쟁인데 첫 번째 전쟁을 1차 중동전쟁 또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이라 부릅니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모인 것을 시오니즘이라는 종교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3천 년 전의 땅을 다시 찾는다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을 무력으로 내쫓고, 이웃나라와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히는 것에 대한 비판도 매우 큰 곳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현재 가장 큰 난민인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는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강제로 내쫓긴 사람들이 모인 단체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재건하는 나라


우리나라와 같이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들이 있는가 하면 1차, 2차 세계대전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유럽은 초토화된 나라를 복구하는데 집중합니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영국을 비롯한 수많은 제국들이 전쟁을 거친 후 더 이상 식민지를 지배할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후 복구에도 냉전의 바람이 작용합니다. 미국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의 복구가 필요했고, 마셜플랜을 가동해 유럽에 막대한 지원을 시작합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초토화된 동맹국을 재건한다는 명분이지만 진짜 목적은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 미국의 시장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공식적인 명칭은 유럽 부흥 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이지만 미국의 국무장관 조지 마셜이 제창했기 때문에 마셜 플랜이라 불립니다. 1947년 7월부터 4년 동안 총 130억 달러에 해당되는 지원을 시작해 총 18개의 나라(지역)가 도움을 받습니다. 

오스트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덴마크, 프랑스, 독일(서독), 그리스,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터키, 영국은 1948년부터 1951년까지 4년 모두 지원받습니다. 

아일랜드는 1950년까지만 지원받고, 포르투갈과 스위스는 1950년부터 지원을 받습니다. 나라별로 지원받는 금액은 차이가 많이 나는데 영국이 합계 32억 9천700만 달러로 가장 많고, 그다음이 프랑스로 22억 9천600백만 달러를 지원받습니다. 아이슬란드가 4천300백만 달러로 가장 적고, 그다음 적게 지원받은 곳이 포르투갈로 7천만 달러입니다. 

마셜플랜으로 서유럽은 급속도로 회복하였고, 이후 진행된 유럽 내 관세 철폐와 상호 배려는 EU를 만드는 초석이 됩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들이 빠르게 회복을 하니 소련은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소련 역시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시작합니다. 이런 소련의 움직임을 경제상호원조회의(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라고 하며 줄여서 코메콘(COMECON)이라 부릅니다. 

1949년 1월부터 시작되었고,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6개국이 초기 가맹국입니다. 이후 1949년 2월에는 알바니아가 가맹하고, 1950년에는 동독, 1962년에는 몽골, 1972년에는 쿠바, 1978년에는 베트남도 가입합니다. 북한은 1956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은 1950년에 참관국의 지위로 가맹하지만 중공은 중소분쟁으로 1961년에 활동을 중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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