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야기발전소 Sep 30. 2021

3·1 운동으로 대한독립을 외칠 때 다른 나라는?

그때 다른 나라는?

우리나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 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 대한민국 헌법 전문


우리나라는 법을 기반으로 나라가 운영되는 법치국가입니다.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근본이 되며 위에 있는 법이 바로 헌법이죠. 헌법 제1장 1조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촛불 혁명 때 노래를 통해서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조항들이 나오기까지의 전제가 되는 내용들이 있는데 그 내용을 전문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문은 대한민국 헌법이 어떠한 생각과 방향으로 제정되었는지 나타내는 것으로 지금 대한민국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사상과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위에 있는 것과 같이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언급하면서 시작합니다. 즉,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시작을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본다고 헌법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1948년을 건국일로 지정하고 건국의 아버지로 이승만을 추대하자는 말은 헌법을 위반하는 주장인 셈이죠. 

그러면 3·1 운동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있기에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도 시작되는 부분에 그 내용이 있을까요? 


1910년 한일병탄 이후 조선총독부는 강력한 무단통치로 탄압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 지도자들 주에는 중국, 만주, 일본, 미국 등 외국으로 떠나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918년 1월 전후처리 원칙 14개 조항 중의 하나로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합니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 민족자결주의인데 윌슨은 이 내용을 1차 대전 패전국의 식민지에 적용할 생각으로 발표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다시 승전국들이 나눠 갖는 과정에서 마찰이 생길 수 있으니 그냥 독립시키자는 의견이라 당시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해당사항이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족자결주의의 정신은 전 세계로 퍼졌고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소식은 전해졌습니다. 미국과 일본에 유학 갔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먼저 움직였고, 결국 1919년 2월 8일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 한복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됩니다.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시작된 '2·8 독립선언'이후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손병희를 중심으로 동학의 정신을 잇고 있는 천도교가 주축이 됩니다. 독립운동의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이라는 3대 원칙을 정한 후 불교, 기독교, 유림 등 다른 교단으로 연락을 취합니다. 기독교 세력과 만해 한용운이 주축이 된 불교는 바로 합류를 했지만 유림 세력은 당시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3·1 운동 때는 강력하게 결집하지 못하고 따로 움직였습니다. 천주교 세력은 흥선대원군의 박해로 인한 앙금도 일부 남아있었고,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가 한국의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공식적으로 참여는 하지 않았습니다. 국내의 독립운동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고종황제가 68세의 나이로 갑자기 붕어를 합니다. 당시 건강했는데 갑자기 붕어를 하고, 중병에 의한 붕어라는 발표가 있자 사람들은 독살에 의한 살인이 아닌가 의심을 품습니다. 그리고 D-day로 잡은 날이 바로 고종의 장례식 날짜인 1919년 3월 1일입니다. 

비폭력 원칙을 지킨 만세운동은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가 106만여 명이었으니 전국적으로 엄청난 인파가 함께한 대대적인 독립운동입니다. 


1달이 넘게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계속되고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인한 희생이 많아지자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대가 폭력을 사용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4월부터는 만세운동 자제단까지 만들어지며 시위를 자제하자는 움직임이 생기고 독립운동은 새로운 방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잔인한 진압으로 미국 지식인들이 일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계기를 만들었고, 조선총독부 역시 통치의 방법을 바꿉니다. 철저한 강압 통치를 벗어나 단체 활동과 언론, 초등교육 등을 허가하기 시작됩니다. 이를 문화통치라 부르지만 속내는 친일파 양성을 통한 한민족의 분열 조장입니다. 

그리고 만주와 상하이로 넘어간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제정하고, 9월 1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합니다. 이때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결정합니다.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추대되지만 이승만은 상하이에 오지 않고 미국에서 독자적으로 활동을 이어갔고, 독단적으로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하기도 하는 등 마찰을 계속 일으키다 1925년에 탄핵당합니다. 특히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서가 임시정부에 알려지자 임시 정부 내부에서는 실력양성을 주장하는 개조파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창조파의 첨예한 대립으로 상당수가 임시정부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임시정부는 한참의 시간 동안 김구가 외롭게 이끌어가게 됩니다.

이미 1911년 서간도에서 시작된 신흥 무관학교는 항일 무장투쟁에 큰 의미를 가집니다. 가장 대표적인 졸업생이 1919년 11월 9일에 의열단을 조직한 약산 김원봉입니다. 일제에 의해 신흥 무관학교가 폐교된 이후 졸업생들이 김좌진, 홍범도 부대를 찾아 합류했습니다. 1920년 6월 6일 봉오동 전투,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전투의 승리에도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한편 김좌진 장군이 신흥 무관학교 졸업생이라는 기록은 없습니다.


일본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 더욱 성장해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고 더 세계로 뻗어나가 1차 대전에도 참전을 합니다. 

혼자만 해양 강대국으로 전 세계를 지배하려 했던 대영제국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동맹을 맺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신흥 강대국들에 위협을 느낍니다. 미국과는 두 번의 전쟁 끝에 강력한 동맹체제를 만들었지만 러시아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고립주의를 버리고 1902년에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방법으로 일본과 동맹을 맺습니다. 미국에 의해 개항되어 서구 열강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제국주의 국가로 커져가는 일본에게 영국의 손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과도 같았습니다. 

이미 1894년에는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했고, 1905년에는 영국과의 동맹에 힘입어 러시아와의 전쟁에도 승리하며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오릅니다. 예전에는 아시아의 끝에서 혼자 강하다고 자부했다면 영국과의 동맹으로 유럽 무대에 진출하니 다른 나라들에게도 강대국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죠. 

1910년에 우리나라를 완전히 집어삼키고 더 뻗어나가려고 눈치를 보던 일본에게 또 한 번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14년에 발발한 세계대전입니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인 이노우에 가오루가 '1차 세계대전은 하늘이 일본을 도운 기회'라고 말한 것처럼 일본은 적극적으로 전쟁에 가담합니다. 일본은 1914년 7월 28일 전쟁이 시작되자 8월 23일에 바로 연합군에 가담했습니다. 유럽에서 발생은 대전쟁(Great war)이 아시아의 일본까지 참전하고 1917년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미국마저 참전함으로써 세계대전(World war)으로 되었습니다. 

일본은 1914년 8월 23일 독일, 8월 2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 침략의 길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독일의 지배에 있던 칭다오를 점령합니다. 전쟁 종료 후에도 미국의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며 제국들의 과도한 식민지 정책을 바꾸려 하지만 일본은 반대로 자신들의 식민지를 더 많이 달라고 요구합니다. 아시아 국가들 중 다수는 한 때 서양 세력에 아시아 사람들이 단결해 지켜내자는 대동아공영권 이론에 매료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을 집어삼키고 중국으로 진출하며 1차 대전 후 식민지에 대한 요구가 더 많아진 일본의 진짜 모습을 보며 아시아 국가들 상당수가 일본에게 등을 돌리게 됩니다. 일본이 주장한 대동아공영권은 결국 서구 열강이 가진 식민지를 일본이 가지고 가겠다는 뜻일 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일본의 이 시기를 다이쇼 천황이 통치하던 시기라 다이쇼 시대라고 부르는데 1912년 7월 30일부터 1926년 12월 25일까지를 이릅니다.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일본이 강대국임을 알리며 승승장구하던 시기였고, 풍족해진 재력과 그에 따르는 국위선양으로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 만 같은 황금시기입니다. 

산업화 덕에 발전한 경제를 바탕으로 교통수단과 미디어 역시 발달하며 낭만주의의 영향도 많이 받게 됩니다. 서양식으로 생활하는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1922년에는 와인 광고에서 일본 최초의 누드 광고도 등장합니다. 보는 시선에 따라 퇴폐적일 수도 낭만적일 수도 있는 이 시기를 '다이쇼 로망'이라 부르며 동경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중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무너졌지만 위안스카이의 군벌 정치가 시작됩니다. 쑨원은 군벌을 종식시키기 위해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미 유럽이나 미국은 자신들 앞가림에도 정신이 없는 상태입니다. 게다가 1914년에 1차 세계대전마저 일어나 유럽 전체가 초토화된 상태라 중국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전혀 없었죠. 그 상황에서 쑨원의 눈에 들어온 것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수립한 소련입니다. 1차 대전의 승전국이지만 산둥반도에 대한 이권도 돌려받지 못하자 쑨원은 1921년 레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레닌은 1923년 대표단을 파견합니다. 이렇게 쑨원과 레닌의 교류로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치는 1차 국공합작을 이룹니다. 장제스를 비롯한 장교들은 소련에서 군사 기술을 배우며 힘을 기르기 시작합니다. 이 당시만 해도 공산주의자들도 국민당에 입당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마오쩌둥이나 저운라이도 국민당에서 요직일 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25년 쑨원이 죽로 장제스가 국민당의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되면서 분열되어 결국 1927년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1차 국공 내전이 발발하며 서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유럽


유럽의 제국주의 나라들이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한참 진출할 때도 러시아는 겨울에도 배를 운항할 수 있는 부동항을 찾아 남쪽으로 줄기차게 내려오려 했습니다. 그러다 크림전쟁도 벌어지고, 오스만 제국과도 전쟁을 벌이지만 큰 소득은 얻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같은 슬라브계의 사람들이 발칸반도에 정착하는 정도가 나름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지켜볼 유럽 열강이 아닙니다. 통일되어 뒤늦게 식민지 확보에 뛰어든 독일도 있었지만 가장 민감한 곳은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으로 있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입니다. 그들이 당시에 지배하고 있던 나라가 바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고 러시아는 바로 그 지역으로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브루봉 왕가는 영국과 함께 커져가는 독일을 견제하고자 러시아와 손을 잡고 삼국 협상을 하니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와 손을 잡고 삼국동맹을 결성합니다. 

그래서 나라는 나뉘었지만 크게 보면 범슬라브 계열의 로마노프 왕가와 범 게르만 계열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립이 민감했던 지역이 발칸반도라고 보면 됩니다. 각 지역에서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제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하고 있었고, 이미 큰 힘을 갖고 있던 제국들은 새로운 나라들이 생기는 것을 억제하는 충돌이 계속 이어지는 상황인 셈이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상황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 후계자인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하자 세르비아의 국민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합니다. 그리고 1달 뒤인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전쟁을 시작됩니다. 이탈리아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이었지만 실제 전쟁에서는 동맹을 파기하고 독일을 공격하는 연합국으로 돌아섭니다. 불가리아와 오스만 제국도 동맹국의 편에 서지만 동맹국은 사실상 독일의 주도로 움직였고, 연합군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나라들과 일본이 합류하면서 말 그대로 세계대전으로 확대가 됩니다. 

처음에는 이 전쟁이 그렇게 길어지고 참혹할 것이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유럽은 7년 전쟁 이후로 대규모의 전쟁보다는 진지 구축 후 협상으로 마무리되는 양상으로 전쟁의 형태가 많이 변화했었고 영국의 상당수의 젊은이들도 애국심을 표출하며 머릿수만 채워주고 훈장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만 전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진을 보면 보이스카웃 훈련을 가는 것처럼 초기에는 웃으면서 자원입대하는 젊은이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도부의 역량에 비해 기술이 매우 발달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죠. 

기관총으로 수백 명이 5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몰살당하고, 적의 돌격을 막기 위해 철조망을 설치하는 한편 참호를 파서 기관총의 총알을 피하는 싸움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1차 세계대전에 활약한 기관총, 참호, 철조망을 악마의 3형제라 부릅니다.

1917년 러시아는 볼셰비키의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며 전쟁에서 발을 뺍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동부전선에 여유가 생긴 것 같지만 영국의 해상봉쇄 정책에 독일은 유보트라는 잠수함으로 마구잡이식 배 사냥에 나서고, 그중 미국의 배가 피해를 입으니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연합국의 편에서 참전합니다. 

1915년에 오스만 제국은 영국의 군대를 갈리폴리에서 대파하며 처칠에게 굴욕을 안겨주었지만 결국 1918년 불가리아에 이어 오스만 제국도 연합국에 항복합니다.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 분할 통치할 것인가를 두고 영국, 프랑스, 그리스가 자기들끼리의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오스만 내부에서는 장교들을 중심으로 외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술탄은 투르크 장교들을 진압하기 위해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 무스타파 케말을 파견하지만 오히려 케말은 1919년 5월 19일 술탄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언합니다. 군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케말을 독립운동을 했고 결국 술탄과 서방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합니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은 사라지고 나라의 이름이 터키가 됩니다. 

1918년 독일마저 연합군에 항복하며 1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후유증은 길게 남습니다. 실제 전투가 벌어진 유럽과 전쟁이 없었던 나라의 대비는 극명하게 차이가 나며 또 다른 씨앗을 남깁니다. 

우선 유럽은 1천만 명이나 되는 젊은 남성들이 전사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생산성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장점은 있지만 초토화된 국토와 나라를 살리기엔 힘겨울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일본과 미국은 엄청난 호황을 누리게 됩니다. 일본은 다이쇼 로망을 누리며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위치로 나아갔고, 미국 역시 막대한 경제적인 이익을 누리며 화려한 시대를 열어갑니다. 이러한 현상은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납니다. 

초토화되었던 유럽은 전쟁복구 과정에서 강한 민족주의적인 성격이 나타납니다. 특히 이탈리아는 승전국이지만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해 국민들의 불만이 많이 쌓입니다. 결국 좌절감과 배신감에 민족주의가 추가되어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이념으로 나타납니다. 파시즘은 묶음·동맹·연맹이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 'fascio(파쇼)'가 어원입니다. 국가 단위로 개념이 확대되면서 국민을 획일적인 조직으로 재편성하고, 국민의 불만은 공산주의나 유태인과 같은 외부에 적을 만들어 표출하게 만듭니다.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집권하면서 주장한 파시즘은 세계 전역의 독재자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터키와 그리스 역시 1919년부터 이어진 3년 간의 전쟁으로 서로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의식이 상당히 고무되어있음을 확인합니다. 문제는 그동안의 앙금을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진 결과를 불러와 두 나라의 대립이 더욱 심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지망생은 독일군으로 참전했다가 부상당해 병원에 있을 때 독일의 패전 소식을 듣게 됩니다. 좌절했던 그는 독일이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감당할 상황이 안되어 사람들이 절망에 빠지 것을 이용해 모든 것이 유럽 제국 잘못이라고 남 탓을 하기 시작합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승전국은 독일이 다시 강해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까지 반영시켜 독일에게 전쟁배상금을 엄청나게 물립니다. 그러니 독일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빌헬름 2세가 일방적으로 일으킨 전쟁에 독일 국민들이 책임지는 듯한 기분이 들게 되고 남 탓을 하면서 자연스레 따라오는 민족주의에 독일 사람들은 매료됩니다. 그 실직한 화가 지망생은 뛰어난 언변으로 인기가 급부상하며 강력한 독일을 주장합니다. 대중의 인기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Nazi)을 이끌며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도자를 외치며 독일에서 정권을 잡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인기를 끈 파시즘을 독일식으로 살짝 변화를 준 나치즘이 독일 국민들에게 먹혔다고 보면 됩니다. 과도하게 민족주의를 주장하며 대놓고 인종차별 정책을 펼치다 결국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니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아메리카 - 미국, 아르헨티나


1차 대전 때 직접적인 전쟁터가 되지 않았던 아메리카 대륙은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전쟁물자를 공급하며 경제적 호황을 누리게 됩니다. 특히 남미의 아르헨티나는 1, 2차 세계대전 모두 중립을 선언하며 유럽의 식량창고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엄청난 경제적인 호황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잇따른 정책의 실패로 몇 차례 국가부도의 사태까지 이릅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미국이 주도해 국제연맹을 만듭니다.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명분으로 1919년에 기획되어 1920년에 설립되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이상한 상황을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민족주의가 파시즘으로 번지고, 독일에서 히틀러의 광기가 시작되어 2차 대전이 발생하기까지 국제연맹은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미국 역시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엄청난 호황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급하게 찾아온 경제적 호황으로 인한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게 나타납니다. 

1929년에 상위 1%의 부자가 전체의 60%에 해당하는 재산을 갖고 있었고 최상층 6만 가구의 저축액은 하위 2,500만 가구의 저축액보다 많았습니다. 부의 편중현상이 매우 심하게 나타난 것이죠. 장사가 잘 된다는 생각이 드니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설비도 크게 확장합니다. 하지만 1928년부터는 소비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생산이 되어 재고가 쌓입니다. 재고가 쌓이니 생산을 줄이고, 생산을 줄이니 공장에서도 대량 해고사태가 벌어집니다. 해고가 된 노동자들은 돈이 없어 다시 소비를 못하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집니다. 주식 역시 호황일 때 폭등하며 투기 붐이 일어났지만 1924년 10월 24일 '마의 목요일'에 갑자기 붕괴하며 거품이 꺼집니다. 농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차 대전 때 농경지는 늘어났지만 1924년부터 밀 가격은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농산물의 가격이 떨어지니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향하지만 결국 잉여인력이 되어 도시 실업난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런 악순환이 결국 '대공황(Great Depression)'이 되어 1939년까지 10년 동안 이어집니다. 20세기 미국의 가장 큰 경제 위기라 평가되는 사건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나라를 빼앗길 때 다른 나라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