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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Sep 28. 2021

우리가 나라를 빼앗길 때 다른 나라는?

우리나라


고종의 집권 시기는 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아내인 중전 민 씨의 대립이 크게 작용했던 시기입니다. 둘의 사이는 처음부터 나쁘진 않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 씨 세력으로 대표되는 세도 정치를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래서 왕의 외척이 되어도 세력을 강하게 표현하기 어려워 보이는 여흥 민 씨 가문의 민자영을 며느리로 선택했습니다. 여흥 민 씨 가문은 흥선대원군 본인의 처가이자 외가 집안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 모두 여흥 민 씨입니다. 

하지만 1871년 왕자의 사망, 1873년 흥선대원군의 탄핵과 고종의 친정 시작, 1874년 민승호의 폭탄테러 사망 등의 사건으로 흥선대원군과 중전 민 씨의 대립은 매우 심각해집니다. 문제는 고종이 아버지와 아내 사이의 대립을 조정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그 상황에서 서양 열강들과 먼저 성공적으로 개혁하고 스스로가 다시 제국주의를 지향하는 일본의 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척화를 외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각자의 입맛에 맞는 외세의 힘을 등에 없고 나름의 개혁을 추진하는 혼돈의 시기가 이어집니다. 


고종 친정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은 1876년에 운요호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도 청나라가 아닌 외세와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종도 김옥균이나 박영효 같은 지식인을 나라를 대표해 외국으로 보내 선진 문물을 배워오게 하는 등 나름의 개혁정책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내부 갈등에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 마음의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은 개방정책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씩 터지기 시작하는데 그 시작이 하필이면 군대입니다. 

고종은 외세의 군을 보고 나름 조선의 군대도 신식으로 바꿔보려 별기군을 만들지만 구식 군대에 대한 차별이 심했습니다. 임금이 13개월이나 밀렸는데 그나마 지불한 것도 쌀에 모래와 겨를 섞었으니 그걸 받고 폭발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였지요. 결국 구식 군대에 소속된 군사들은 반란을 일으키니 이 사건이 1882년에 발생한 임오군란입니다. 물리적인 힘을 갖고 있는 군대에서 일어난 반란을 수습하기에는 고종의 힘이 너무 부족했고, 결국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다시 정계에 복귀합니다. 봉기했던 구식 군대가 대원군을 추대하는 방식이었고, 10년 전 대원군의 탄핵을 주도했던 중전 민 씨는 대원군의 아내이자 시어머니인 부대부인의 도움을 받아 겨우 충주로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달 뒤 청나라는 중전 민 씨와 손을 잡고 흥선대원군을 납치하니 대원군 역시 복귀 1개월 만에 다시 실각합니다. 청나라를 등에 업은 중전 민 씨는 다시 권력을 잡았지만 밀려오는 외세에 제대로 대응하려는 마음보다는 본인의 사치와 향락에 몰두합니다. 청나라에 서태후가 나라를 망치고 있었다면 비슷한 시기에 조선에서는 중전 민 씨가 본격적으로 말아먹는 중이라고 보면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니 다른 개화파들의 마음은 다급해지고 일을 하나씩 벌이기 시작합니다. 그 시작은 1894년에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입니다. 청나라에 의존해 나라 재정을 거덜내고 있는 민 씨 세력을 비롯한 수구 세력을 몰아내고 개화 정권을 수립하려고 했습니다.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서 민 씨 정권의 핵심 인사들을 제거하면서 정권을 잡지만 다시 청나라 군대가 개입해 3일 천하로 실패합니다. 갑신정변은 청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의 힘을 가져왔다는 한계점도 있지만 자주 근대화를 위해 위로부터 시작한 정치 개혁으로 반침략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민간에서는 최제우에서 시작된 동학사상이 널리 퍼지고 사회 개혁 세력으로 우뚝 성장합니다. 동학의 지도부는 흥선대원군과도 만남을 가지며 나름의 방법으로 조선의 변혁을 꿈꾸다 결국 1984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부정과 횡포에 맞서 봉기를 일으킵니다. 이 봉기는 단순 농민 봉기를 넘어 갑오개혁까지 이끌어내는 동학 혁명으로 성장했지만 중전 민 씨가 다시 청나라 군대를 부르고, 청의 개입을 빌미로 일본군까지 들어오게 됩니다. 결국 우금치 전투와 여러 전투에서 외국의 군대에게 패배하며 농민군은 흩어졌고,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청일전쟁이 발발합니다. 

청일전쟁의 완승으로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잡은 일본은 친일이 아닌 세력을 제거하며 조선을 완전히 손에 넣으려 합니다. 그 음흉한 야욕의 시작은 1895년 10월 8일 조선의 궁에 들어가 중전 민 씨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입니다. 조선 여인의 최고 수장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손으로 죄를 물어야 하는데 다른 나라인 일본의 손에 죽으니 순식간에 애도와 분노의 물결이 몰아칩니다. 을미사변 이후 집권한 을미내각에서는 바로 단발령을 시행하며 본격적으로 변화의 바람을 불어옵니다. 이때 고종의 상투를 직접 자른 사람은 조선 공식 1호 유학생이자 미국과 유럽의 유학 경험을 글로 쓴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입니다. 분위기가 거의 일본 위주로 돌아가자 고종은 다시 위기감을 느끼고 1896년에 러시아의 공관으로 피신을 합니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하고 다음 해인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합니다. 사실상 조선은 1897년에 끝이 났고, 우리나라는 대한제국으로 다시 시작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미 나라의 힘은 없으니 말뿐인 대한제국은 어디에서든 인정받지 못했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마저 박탈당합니다. 그리고 결국 1910년에는 대한제국의 모든 권리를 일본에게 넘기는 한일병탄 조약을 맺으면서 조선과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맙니다


중국


서태후와 아편으로 인해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청나라도 변화는 시작됩니다. 1900년 의화단 운동 이후 열강들의 침략이 더 강화되자 청나라 조정은 신정운동으로 나름 정치개혁 시도를 합니다. 신정운동은 서태후의 주도로 진행되었고 9년 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입헌군주제로 나간다는 계획입니다. 하지만 이미 떠나버린 민심은 납세 거부를 하고, 서양 세력의 대표 형태로 보이는 기독교 세력을 배척하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합니다. 

1905년에 쑨원은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삼민주의를 외치며 혁명파를 이끌고 반청 무장투쟁을 시작합니다. 이때 삼민주의는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입니다. 1908년에 서태후가 사망하고, 1911년에 청나라 조정이 철도를 국유화하면서 철도를 담보로 외국에 차관을 빌려오려 하자 민중들은 결국 폭발합니다. 쓰촨에서 먼저 봉기가 일어나고 쑨원이 이끄는 신군도 10월 10일에 우창에서 봉기를 일으킵니다. 쑨원의 봉기 이후 2달 만에 17개 성으로 봉기가 확대되며 청나라 조정에 독립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1912년 1월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하였지만, 청나라 조정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위안스카이와 타협해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청나라에 반대하는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모든 권한을 갖고 간 위안스카이가 오히려 반군의 대표가 되어 청나라를 멸망시킨 상황입니다. 

어찌 되었건 1911년 신해년에 일어난 이 혁명이 청나라를 멸망시켰으니 신해혁명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우창에서 최초로 봉기를 일으킨 10월 10일은 지금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신해혁명기념일'로 아주 중요한 국경일인 '쌍십절'입니다. 


유럽


기술발전에 따른 구조적인 불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생산기술이 발달해 팔아야 하는 제품은 늘어났지만 그 제품들을 사줄 시장이 부족해서 생기는 불황입니다. 요즘도 간간이 나오는 말이지만 이 이론이 현실이 되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1873년부터 1896년까지 이어진 장기 불황(Long Depression)입니다. 생산은 계속되지만 소비가 되지 않으니 결국 물가는 대폭 하락합니다. 곡물 가격은 1/3 수준으로, 면화 가격은 1/2 정도 떨어집니다. 물가가 내리면 좋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농가들 입장에서는 수입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농가들이 붕괴되어 도시 빈민이 늘어나고, 인건비는 더 내려가지만 결국 생산된 제품을 소비할 시장이 완전히 붕괴가 되어 생산에 의미가 없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거기다 경쟁적으로 철도 부설 공사를 하며 세계 곳곳에 철도를 놓으며 성장한 철강 산업 역시 붕괴되어 철도회사마저 파산합니다. 비엔나부터 시작해 증권거래소마저 폐쇄되는 불황이 이어지니 유럽의 나라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영국의 물가 하락률도 40% 정도가 되고, 미국과 독일과 같은 신흥 국가들의 성장하며 영국 중심의 국제 질서가 무너집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유럽의 나라들은 다시 경쟁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립니다. 예전에는 원자재 확보가 식민지의 가장 큰 역할이었다면 이제는 생산된 물건을 소비할 수 있는 무역 거점으로서의 역할이 더 필요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유럽에서 힘을 쓸 수 있는 나라들은 모두 자신들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를 휘저었습니다. 대항해시대 이후 다시 식민지 쟁탈 전이 벌어지고, 이제는 증기기관을 비롯한 근대화된 장비로 무장해 전 세계를 마구 휩쓸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마치 피에 굶주린 악마와 같이 돈에 굶주려 식민지 개척과 대량 학살을 이어갑니다. 


아프리카


유럽인들에게 식민지를 개척할만한 마지막 신세계는 아프리카입니다. 1800년대 초만 해도 아프리카는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 때문에 죽음의 대륙이었습니다. 그런데 1840년대에 말라리아 특효약인 키니네(Quinine)가 개발되고, 맥심 기관총과 증기선이 나타나자 아프리카는 더 이상 죽음의 대륙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해안가에서 머물렀던 유럽의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내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프랑스는 1870년에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나폴레옹 3세가 쫓겨나 다시 공화국으로 전환합니다. 그리고 1875년에 알제리를 식민지로 만들며 80만 명이 넘는 알제리 사람들을 학살합니다. 

1839년에 독립한 벨기에는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어 1878년에는 아프리카의 콩고를 식민지로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수백만 명을 학살시킨 사건을 '고무 테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벨기에마저 아프리카에 진출하자 역시 뒤늦게 식민지 개척에 뛰어든 독일도 무언가 이익을 가져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884년에는 독일의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베를린 회의가 개최됩니다. 이때 합의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니다. 하나는 '콩고는 자유무역국으로 벨기에 국왕(레오폴드 2세) 개인 자격으로 통치한다'이고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 특정 지역을 식민지로 인정받기 위해 그 지역에 대한 통치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즉, 그 지역의 상황이나 의견은 필요 없고 자신들이 판단하기에 저 나라가 지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인정하면 그냥 그 나라의 식민지로 인정된다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입니다. 이미 아프리카는 노예무역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이어지는 진짜 고통의 시작은 바로 이때부터입니다. 


영국은 이집트 북부에서 시작해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이어지는 종단 계획을, 프랑스는 조금 서쪽에서 이미 식민지로 만든 알제리를 기반으로 해 아프리카 서쪽 지역을 장악하고 바로 동쪽으로 이어지는 횡단 정책을 추진합니다. 그렇게 야금야금 먹어가니 언젠가는 부딪히게 되고, 결국 1898년 11월 3일 지금 수단 남부 코독(Kodok)에서 충돌합니다. 당시 이 지역의 이름이 파쇼다(Fashoda)였기 때문에 이 사건을 파쇼다 사건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미 수많은 전쟁 패배로 겨우 걸음을 이어가는 푸들과 같은 프랑스는 힘은 좀 빠졌지만 굶주린 불독과 같은 영국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충돌은 마무리가 되었고 1914년 1차 대전 직전까지 이렇게 유럽 제국주의는 아프리카 거의 대부분을 먹어 치웁니다. 


이때 아프리카에서 식민지가 되지 않은 나라는 미국의 해방 노예들이 만든 라이베리아와 스스로의 힘으로 이탈리아군을 물리친 에티오피아 단 두 곳입니다. 


동남아시아


1885년 프랑스는 인도의 동쪽을 점령합니다. 그래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나라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라는 이름으로 식민지를 만듭니다.

1898년에는 필리핀이 미국의 식민지가 됩니다. 1521년 마젤란이 도착한 이후 스페인은 여러 번 탐사대를 필리핀에 파견했습니다. 1543년에 러이 로페스 데 비야로보스가 사마르 섬과 레이테 섬을 필리페 2세의 이름을 따서 라스 이슬라스 필리피나스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필리핀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스페인은 1565년에 세부섬부터 식민지 기지를 건설하며 긴 세월 필리핀을 지배합니다. 하지만 1898년에 스페인의 다른 식민지였던 쿠바 독립전쟁에 끼어든 미국에 스페인이 패배하면서 필리핀까지 내어주게 됩니다. 당시 필리핀도 독립을 준비 중이었고, 스페인과 전쟁을 할 때 미국을 독립을 지원해주는 척하며 이용했지만 스페인이 물러나 독립을 요구하는 필리핀 사람들을 대량 학살하는 미국-필리핀 전쟁을 치르며 1902년에는 완전한 미국의 식민지가 됩니다. 그래서 내부의 독립 투쟁마저 잔인한 학살로 정리된 시기는 1902년이지만, 미군에 의한 식민지배는 1898년부터 시작이라 보면 됩니다. 

영국도 1858년에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며 인도 주변을 완전히 장악합니다. 인도는 16세기에 건국된 무굴제국이 300년 정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산업혁명 이후 신식 무기로 무장한 서구 열강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이, 그다음엔 네덜란드가 인도를 노렸지만 결국 영국이 1857년에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완전히 영국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세포이 항쟁은 동인도회사에 소속된 인도인 용병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한 반영(反英) 항쟁입니다. 그래서 1차 인도 독립전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영국은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후 동인도회사를 폐지하고 인도를 직접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무굴제국을 대신해 영국령 인도 제국을 출범시킵니다. 영국에 의해 강제로 시작되었지만 인도 제국은 인도 역사상 인도 반도를 통일한 유일한 국가로 1858년부터 1947년까지 89년 동안 존속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단일 국가로는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였습니다. 풍부한 자연 자원과 수많은 인력. 영국이 인도에 집착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영국은 인도를 발판으로 1886년에는 미얀마도 인도 제국에 합병하고 이름을 버마라고 부릅니다. 


아는 척 더하기 - 용어 정리


1. 을사조약? 아니죠 을사늑약입니다

1905년에 조선을 이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는 을사늑약이 맺어집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교과서부터 많은 곳에서 '을사조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를 먼저 본다면 조약은 국가 간의 권리와 의무를 국가 간의 합의에 따라 법적 구속을 받도록 규정하는 행위, 조문, 협약, 협정, 규약, 선언, 통첩, 의정서입니다. 

그리고 늑약은 억지로 맺은 조약을 말합니다. 즉, 서로 간의 합의가 아니라 한쪽의 일방적인 요구에 의해 강제로 맺어진 조약을 늑약이라고 합니다. 

1905년에 고종황제와 일본 사이에 맺어진 조약은 그냥 합의에 의한 조약이 아니라 강제로 합의를 흉내 낸 조약이기 때문에 고종황제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07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도 보냈던 것이죠.  

1905년에 맺은 것은 을사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입니다


2. 한일합방? 아니죠 한일병탄입니다.

1910년에 우리나라의 주권이 완전히 일본에 넘어가 식민지가 된 것을 두고 한때는 '한일합방' 또는 '한일병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를 먼저 본다면 합방은 둘 이상의 나라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말합니다. 병합 역시 둘 이상의 기구나 나라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말합니다. 조약 중에서도 강제로 맺은 조약을 늑약이라고 하는 것처럼 합방 중에서도 강제성이 들어가면 단어가 '병탄'으로 바뀝니다. 병탄의 사전적인 의미는 '남의 재물이나 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만든다'입니다. 일반적인 합방은 서로의 권리가 어느 정도 대등하게 유지되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이지만 식민지 지배와 같이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쪽으로 흡수가 될 때에는 합방이라고 표현하면 안 되고 병탄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경영학적 용어에서도 병탄 합병은 어느 한 회사가 다른 회사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합병하는 것을 말합니다. 1910년에 우리는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하고 모든 것을 빼앗긴 채 흡수당했기 때문에 한일병탄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3. 중국 사람과 지명 이름

지금 중국의 지명이나 이름을 보면 누구는 공자, 유비, 관우와 같이 한자어를 그대로 부르지만 또 누구는 마오쩌둥, 시진핑과 같이 중국식 발음으로 부릅니다. 왜 다르게 부를까요? 

이는 1948년 문교부에서 제정 공포한 '들온말 적는 법'이 너무 전문적으로 복잡했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눈을 피해 어렵게 우리말을 지키다 보니 연구가 체계적으로 진행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힘든 상황에서도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은 늘 가져야 합니다. 

이후 몇 차례 외래어 표기법에 대해 논의와 수정을 진행하며 발생된 문제점들을 정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개정작업에 착수하여 1986년 1월 7일에 외래어 표기법을 공포합니다. 그 과정에는 1980년대 동구권을 비롯해 수많은 외국과의 교류가 늘어나 표기해야 할 외래어, 외국어가 많아졌다는 점도 반영되었습니다. 여기서 핵심 원칙은 원음 원칙입니다. 최대한 그 나라에서 실제로 불리는 원음에 가깝게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한자어 문화권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경우에는 약간의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공자'와 같이 우리에게는 '공자'가 익숙한데 원음 방식으로 표현해버리면 '쿵쯔'가 됩니다. 완전히 낯선 단어가 되어버리죠. 그래서 이미 익숙한 옛날 사람과 지명은 한자식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요즘은 중국 현지에서 부르는 방식으로 표현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가 옛날이고, 언제부터가 요즘일까요?

그 기준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결정했습니다. 신해혁명 이전에 사망한 사람과 지금은 없는 지명은 우리에게 익숙한 한자식 독음으로 사용하고, 신해혁명 이후에 사망하거나 현재까지 이어지는 지명은 지금 중국에서 불리는 방식으로 표현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공자나 삼국지의 주인공들은 한자식 표현 그대로 부르게 되고, 요즘 사람인 시진핑이나 지금의 수도인 베이징은 중국에서 부르는 방식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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