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다른 나라는?
남북전쟁 이후 재건의 시기 동안 미국은 유럽에서 엄청난 숫자의 이민자들이 몰려들며 또다시 큰 변화의 소용돌이에 들어갑니다. 에디슨은 1879년에 상업용 전구를 시연하고 1882년에는 펄 스트리트 발전소에서 맨해튼 남부에 직류 전기를 공급하기 시작합니다. 전기의 공급은 미국이 유럽보다 더 빠르게 공업 국가로 성장하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습니다. 1차 산업혁명으로 사람의 힘으로 기계를 돌리던 공장이 증기로 돌리며 엄청난 성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기계를 돌리는 힘을 증기에서 전기로 바뀌면 공간부터 다른 관리적인 측면에서 아주 유리하게 됩니다. 석탄을 태워서 물을 끓이고 그 힘을 전달해주는 과정에서 필요한 설비들과 석탄 보관을 위한 공간들, 그리고 관리 인력들이 전기의 공급으로 인해 아주 간단해지기 때문입니다. 즉, 공장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 성장 과정이 유럽보다 더 빠르게 진행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역시 어두운 사실들이 있습니다.
노예제도는 공식적으로만 폐지되었을 뿐 남부 지역에서는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민자들로 인해 공장은 저렴한 노동력이 넘쳐났습니다. 새롭게 개발되는 지역들에서 인디언 부족들은 작은 거류지로 이주당했고, 그 땅은 백인 농장주와 목장주가 빼앗아 갑니다. 산업의 성장 뒤로 노동자와 흑인, 인디언들에게는 엄청난 학대와 폭력이 있던 시기입니다. 넓은 땅에서 나오는 풍부한 자원에 하층민의 고통이 더해져 미국의 산업은 급속하게 성장합니다. 그리고 미국 역시 식민지를 갖기 위해 배를 타고 다른 나라로 열심히 뻗어나갑니다.
크림전쟁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 유럽의 나라들도 약간의 질서 정리 시간을 갖습니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만한 변화는 독일과 이탈리아입니다.
독일은 동프랑크에서 이어진 신성로마제국부터 늘 분열되어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을 통해 슐레지엔을 확보하면서 힘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프랑스에게 다시 지배를 받게 되었고, 대 프랑스 동맹을 통해 프랑스 군을 몰아내고 독립적인 지위까지 가지게 됩니다. 그러다 1814년에는 독일 관세동맹으로 뭉쳐야 경제적으로 더욱 성장한다는 것을 다시 깨닫고 1848년 3월에 혁명적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이 때는 성공하지 못하지만 1862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의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분위기는 또 바뀌었습니다.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에 모두 승리한 프로이센은 빌헬름 1세가 황제로 즉위하며 독일 제국을 선포합니다. 로마의 카이사르조차 두려워했던 게르만 민족이 드디어 통일 독일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탈리아 반도는 긴 시간 동안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로마 주변은 교황령이고, 시칠리와 나폴리는 또 다른 나라, 베네치아도 다른 나라입니다. 5개 정도로 나뉜 이탈리아 반도의 나라들은 운영체제도 모두 달랐습니다. 교황령은 교황이 다스리며 교황이 바뀔 때마다 주인이 바뀝니다. 즉, 어느 나라 출신의 사람이 그 지역을 다스리게 될지는 교황의 선출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폴리와 시칠리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기도 하고, 프랑스의 지배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베네치아나 피렌체 같은 곳은 공화정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너무 다르니 하나로 모이기가 어려웠지만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움직이며 이탈리아 반도에도 변화의 바람이 시작됩니다. 1820년대부터 혁명의 분위기는 시작되었고, 수차례의 반란과 독립전쟁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다 1860년대 주세페 가리발디의 활약으로 하나씩 평정이 되며 1870년 9월 로마의 성문이 열리며 지금의 이탈리아로 통일이 됩니다.
이후 1878년에는 루마니아 왕국도 독립하고, 앞서 1839년에 독립한 벨기에는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어 1878년에는 아프리카의 콩고를 식민지로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수백만 명을 학살시킨 사건을 '고무 테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프랑스는 1870년에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나폴레옹 3세가 쫓겨나 다시 공화국으로 전환합니다. 그리고 1875년에 알제리를 식민지로 만들며 80만 명이 넘는 알제리 사람들을 학살합니다.
영국도 1876년에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며 인도 주변을 완전히 장악합니다. 인도 제국은 1858년부터 1947년까지 89년 동안 존속했던 제국이지만 인도 역사상 인도 반도를 통일한 유일한 국가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단일 국가로는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였습니다. 풍부한 자연 자원과 수많은 인력. 영국이 인도에 집착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유럽은 전 세계를 휘저으며 식민지 개척과 대량 학살이 이어지는 시기입니다. 마치 피에 굶주린 악마와 같이 돈에 굶주려 유럽의 백인이 아닌 사람들을 마구 학살하고 다녔습니다.
1차, 2차 아편전쟁으로 수도인 북경까지 털린 청나라는 나름 정신을 지키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양무운동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일본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빠르게 제국주의에 합류한 것과는 다르게 청나라는 썩은 부위를 도려내지 못하고 패망의 길로 향합니다. 그 길의 중심에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이었지만 10대 황제인 동치제를 낳아 황후에 준하는 지위를 얻습니다. 1860년 2차 아편전쟁이 패배로 피난을 가고 영토마저 잃게 되자 함풍제는 병을 얻어 죽고 동치제가 6살의 나이에 황제가 됩니다. 이때부터 동치제의 친모는 함풍제의 정실 황후인 효정현황후와 함께 섭정을 합니다. 이때 효정현황후의 처소는 자금성 동쪽에 있어 동태후라 불렀고, 동치제의 친모는 서태후라 부르게 됩니다.
서태후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합니다. 동치제가 커가면서 친정을 하려 하지만 서태후는 권력을 놓지 않았고 동치제는 20살에 급사를 합니다. 서태후는 다시 황족인 순현친왕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조카를 양자로 입양해 황제로 즉위시킵니다. 이때 즉위한 광서제의 나이는 4살입니다.
영국이 신식 군함 2척을 청나라에 팔려고 했지만 서태후의 생일 비용 때문에 거절한 것이나, 북경에 이화원이라는 거대한 정원을 만든 것만 보더라도 국정보다는 개인의 야욕만 앞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양무운동의 결과는 청일전쟁의 완벽한 패배로 드러나 광서제는 스스로 군대도 키우려 하고, 변법자강운동으로 근대식 입헌군주제까지 꿈꿨지만 서태후에게 막혀 결국 유폐당합니다. 이후 일부 반 외세를 표방하는 세력이 의화단 운동도 벌이지만 단순히 국수주의적인 미치광이 범죄 집단에 불과해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서양 세력들을 화나게 해 다시 북경을 점령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의회를 구성한 일본은 공업을 기반으로 경제 성장에 집중합니다. 내부에서 천황제와 입헌군주제의 모습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바로 서양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가 제국주의를 지향합니다.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조선과 청나라부터 정치, 경제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합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확보하고, 타이완까지 점령합니다. 그리고 부동항 확보를 위해 청나라와 조선으로 내려오는 러시아와 여러 번 부딪힙니다. 하지만 러시아 내부에 문제가 있는 것을 포착하고는 바로 선전포고를 해 결국 1905년에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하며 동북아시아의 최강자가 됩니다.
제국 건설 후 나폴레옹까지 막아내며 성장하던 러시아는 크림전쟁의 패배로 잠시 위축됩니다. 그리고 다른 유럽의 나라들과 격차가 벌어진다는 생각에 알렉산드르 2세는 1855년 차르에 즉위하자마자 근대화에 착수합니다. 공업을 앞세운 산업화 과정에서 1861년에 농노 해방령을 반포하여 2300만 명의 농노를 해방시켰지만 지주뿐만 아니라 너무 적은 토지를 분배받게 된 농노들에게도 인기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해방 농노 출신들이 도시로 몰려 빈곤한 노동자층이 늘어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며 도시 노동자들에 의한 혁명을 꿈꾸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세력을 키워갑니다.
아편전쟁으로 서구 열강들이 청나라에 들어갈 때 숟가락을 얹어 만주 외곽을 할양받는 한편, 알래스카는 미국에 팔아넘깁니다. 그리고 겨울에 얼지 않는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1875년에는 발칸반도로 내려오며 오스만 제국과 충돌합니다. 이스탄불까지 진격했지만 러시아의 힘이 커지는 것이 싫었던 영국이 개입해 제지를 합니다. 군비증강에도 힘쓰며 부강한 나라를 꿈꿔온 알렉산드르 2세는 1881년에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그 이후에 차르로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와 1894년에 이어받은 니콜라이 2세는 보수적인 전제 정치로 회귀하며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1903년에 사회민주노동당 역시 온건파인 멘세비키와 블라디미르 레닌이 지휘하는 급진파 볼세비키로 나뉩니다.
내부가 이렇게 소란스러운 와중에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하자 차르의 권위도 떨어지고 사회도 더욱 불안정해집니다. 1905년에 차르에게 항의하기 위해 겨울 궁전에 모인 군중들에게 발포를 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군주정이 아닌 공화정을 세우려 했고, 대부분의 도시에서 노동자-농민 평의회인 '소비에트'들이 자발적으로 생겨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이미 차르에 의한 러시아 제국은 이름뿐이었고, 니콜라이 2세도 반강제적으로 10월 선언을 하며 입헌제를 받아들입니다.
산업혁명으로 생산과 소비가 더욱 활발해진 유럽과 미국은 인도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지역과 남미로 진출해 식민지를 만들어갑니다. 그리고 일본과 청나라까지 강제로 개항시키고 나니 이제는 조선만 남은 상태입니다. 조선은 고종의 즉위로 흥선대원군이 실제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대원군은 집권 초기에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금을 낮추고, 부족한 세수를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수많은 병폐를 가지고 온 서원을 철폐합니다. 서원은 세금을 내지 않았고, 양반들이 모여 부정과 야합을 주도하는 세도정치의 근거지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선 꼭 손을 봐야 했던 곳입니다.
청나라에서 벌어진 아편전쟁은 대원군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북경까지 침공당한 이유로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집권 초기부터 청나라와의 사대적 외교 이외의 모든 대외 관계를 차단합니다. 1866년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으로 프랑스인 신부를 비롯해 조선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을 처형합니다. 이 사건이 병인박해입니다. 프랑스는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프랑스의 로즈 제독이 함대 7척으로 강화도를 점령하고 책임자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하지만 대원군은 거절합니다. 그리고 양헌수를 중심으로 사격에 능한 500여 명의 포수들이 프랑스를 공격해 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게 됩니다. 이 것을 우리는 병인양요라 부릅니다. 결국 프랑스는 더 이상 교전이 의미 없다고 생각해 1개월 정도 강화를 더 점령하면서 불을 지르고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갑니다. 그중에는 외규장각 의궤도 있었고 역사학자 박병선 박사님의 노력으로 2011년에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박병선 박사님은 직지심체요절이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인 것도 밝혀내신 분입니다.
1868년에는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합니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기 위해 파헤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1871년에는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다시 조선으로 옵니다. 강화도와 김포 사이에 흐르는 염하를 거슬러 한강 쪽으로 올라와 교전이 일어났습니다. 3일간의 교전으로 광성보가 함락되고 어재연을 비롯한 수비 병력 대다수가 사망합니다. 미국은 20일간 통상을 요구하며 주둔했지만 성과는 얻지 못하고 그냥 돌아합니다. 이를 신미양요라고 하고,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 정책에 정점을 찍습니다.
나라 주변의 상황이 이러는 중에 왕실에서도 사건이 발생합니다. 고종과 중전 민 씨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지만 항문이 닫힌 채 태어나는 항문 폐색증을 안고 태어납니다. 엄마인 중전 민 씨는 조선이 이미 들어와 있던 서양의 의술로 치료해보려 하지만 대원군은 왕자의 몸에 칼을 댈 수 없다는 핑계로 거부하고 오히려 산삼을 먹입니다. 결국 아이는 5일 만에 죽고 중전 민 씨는 시아버지 대원군을 향한 증오가 불타오릅니다.
대원군의 며느리와 아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와중에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의 기상을 회복하고자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도 다시 짓기로 합니다. 문제는 당시 조선의 여러 사정이 경복궁을 중건할 만큼의 여력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서원을 철폐하며 조금 늘린 세금으로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양반들에게 강제로 돈을 걷기 위해 당백전을 발행하고, 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양반들 묘지 주변의 나무도 강제로 베어옵니다. 그마저도 부족해 각 마을 입구에 있는 나무도 베어 오고, 중건 초기 20일 사이에 3만 5천 명의 인력이 동원되며 강한 노동으로 인해 불만이 쌓이게 됩니다. 경복궁 중건은 양반과 서민 모두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으로 흘러갑니다. 결국 1865년부터 시작해 1872년까지 이어진 경복궁 중건이 끝난 1873년에 중전 민 씨의 힘을 받은 최익현이 상소를 올리고, 고종은 친정을 결심하며 대원군이 일선에서 물러납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권불십년(權不十年)으로 권력이 10년을 가지 못한다는 의미로 현재의 권력에 교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말이 고종의 친정이지만 사실상 중전 민 씨의 정치력이 커지는 시기입니다. 상소를 올린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공격을 대비해 일시적으로 유배를 보낸 뒤 다시 등용해 승진을 시킵니다. 1874년에는 다시 아들을 낳으니 그가 훗날 순종이 됩니다. 같은 해인 1874년에는 중전 민 씨의 오빠인 민승호에 폭탄테러가 발생해 민승호와 그의 부인, 아들이 죽는 사건도 발생합니다. 민 씨는 배후 세력으로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의심합니다. 이제 흥선대원군과 중전 민 씨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지지만 고종은 아버지와 부인 사이에 중재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척화파들을 제거하고 개화파들이 대거 등용됩니다. 하지만 아직 흥선대원군의 입김도 많이 남은 상태이기 때문에 일본처럼 일이 착착 잘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혼돈의 상태가 됩니다. 그런 중에 1876년에 운요호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문호를 개방하니 조선의 혼란은 더욱 심해집니다.
황비홍은 소림 계통의 남파 무술의 일종인 홍가권(洪家拳)의 고수로 19세기 후반에 청나라에서 활동한 무예인입니다. 1859년에 태어나 17살이 되던 1864년에 광저우에 처음 도장을 열어 제자를 키우다 19살에는 전당포를 습격한 도적 무리를 격퇴하기도 합니다. 황비홍이 유명해진 계기는 독일산 셰퍼드 때문입니다. 20살 때 광저우에 있는 한 영국인이 고도로 훈련시킨 독일산 셰퍼드를 데리고 와 무술인들과 결투를 벌이게 하는 나쁜 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개로 인해 많은 무술인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 이야기에 격분한 황비홍이 직접 도전장을 던지고, 한 번의 발차기로 즉사시켜버립니다. 그리고 26살 때에는 바오즈린(寶芝林, 보지림)이란 이름의 병원도 세워 무예와 의술을 함께 겸비한 사람으로 알려집니다.
이후에도 항일 전쟁에 동참하기도 하고, 부두의 마적 떼도 굴복시키는 등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1919년 둘째 아들이 무술대회에서 우승하자 앙심을 품은 상대방에게 독살당하고, 셋째 아들도 사고로 사망, 1923년에는 광저우의 상단이 폭동을 일으켜 병원마저 불타버려 파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병이나 1924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파산해 관조차 살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생전에 황비홍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