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야기발전소 Sep 18. 2021

영국이 홍콩을 빼앗을 때 다른 나라는?

그때 다른 나라는?

중국


유럽 대륙에서 여러 나라들이 전쟁과 독립을 반복할 때 바다 건너에 있는 영국은 열심히 식민지 쟁탈에 매진합니다.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로 진출해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만들며 알짜배기 이익을 챙겨 세계 최강국이 됩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은 당시 영국이 얼마나 지구 곳곳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입니다. 아마 그 정도로 여유가 생기니 찰스 다윈과 같은 학자가 연구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찰스 다윈은 1859년에 '종의 기원'을 발표하며 진화론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영국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나라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중국입니다. 당시 중국은 청나라입니다. 중국은 명나라와 청나라 초기까지는 드넓은 영토와 자원,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문화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융성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럽은 지속되는 전쟁으로 과학을 발전시키고, 시야를 돌려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반면 중국은 서양의 오랑캐들이 자신들에게 무언가를 빼먹어간다는 생각만 하고 결국 문호를 닫아버리는 쇄국정책을 취하게 됩니다. 본인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중화사상이 결국 스스로를 우물 안의 개구리로 가두어버린 셈입니다. 

이미 증기기관을 개발하고 실전으로 강화된 화포로 무장한 영국이 청나라에 왔을 때도 청나라는 서양의 오랑캐 거지 취급합니다. 이때 영국은 식민지 정책이 변화되고 있는 시기입니다. 예전에는 약탈만은 위한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생산된 물건을 소비시켜 본국의 부를 증가시키는 수단으로 식민지를 관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영국은 청나라와의 교역을 하고 싶었지만 청나라는 자신들의 제화만이 우수하고, 서양의 물품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교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 청나라의 차(茶)가 유럽에서 인기를 끌게 됩니다. 결국 식민지에서 약탈한 은이 차를 구매하기 위해 청나라로 흘러가는 구조가 되어버립니다. 영국은 무엇을 팔아서 청나라로 흘러들어 가는 은을 다시 회수할까 고민하다 인도 변방에서 재배하는 아편을 청나라에 팔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청나라는 차를 팔아 아편을 수입하는 이상한 경제구조가 자리 잡습니다. 아편은 마약이고 당연히 그로 인한 문제가 계속되자 청나라는 아편을 금지시키고, 영국은 그에 반발해 결국 전쟁을 일으킵니다.  마약의 유통을 막았다고 일으킨 추악한 전쟁인 '아편전쟁'이 1839년에 영국의 침공으로 시작되고 청나라의 완패로 마무리됩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홍콩을 영국이 100년 동안 관리하며 경제적인 문호를 개방시킵니다. 이후 청나라의 개방정책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영국은 또다시 아편전쟁을 일으킵니다. 1856년에 일으킨 이 전쟁을 애로호의 영국 국기를 훼손한 것을 핑계로 시작되어 2차 아편전쟁 또는 애로호 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전쟁에는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러시아도 함께 참전해 베이징까지 함락당하며 청나라가 이제는 완전히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됩니다. 


미국


2차 미영 전쟁 이후 미국의 팽창정책은 계속되었습니다. 산업도 더욱 발달하게 되는데 지역적인 특색이 있어 북부 지역에는 산업화, 도시화가 되면서 노예의 필요성이 낮아지는 반면 남부 지역은 면화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 기반 경제구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노예가 아직 필요했습니다. 유럽에서 새롭게 오는 이주민들도 당연히 북부 지역에 더욱 많이 정착했고, 남부 지역에서 북부로 이동하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이어지니 남부에서도 땅을 많이 갖지 못한 백인들은 불안감이 커지고 방어적이 되어갑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남부와 북부의 갈등을 커져갑니다. 표면적으로는 노예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대립이지만 그 바탕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1860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갈등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 당시 미국은 34개의 주가 있었는데 1861년에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비롯한 남부의 7개 주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아메리카 연합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주장합니다. 기존의 연방정부와 대통령인 링컨은 당연히 남부의 아메리카 연합국을 나라로 인정할 수 없었고 둘의 전쟁은 시작됩니다. 1861년 4월 섬터요새를 시작으로 전쟁은 시작되었고, 1863년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전쟁은 극에 달합니다. 이 과정에 1863년 1월 1일에 링컨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흑인 노예 해방을 선언하고, 영국의 개입을 두고 치열한 외교전도 벌입니다. 남부는 영국이 면화 수입을 위해 자신의 편이 되어주길 바랬지만 이미 영국은 미국의 면화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고, 오히여 북부 지역에서 생산되는 옥수수가 더욱 필요했기 때문에 영국은 전혀 개입하지 않습니다. 1865년에 북부가 승리하며 미국에서의 노예제도는 공식적으로 끝이 납니다. 당시 미국 인구의 3%에 해당하는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마무리된 전쟁을 복구하기 위해 미국은 1877년까지 재건시대를 열어갑니다. 


유럽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쫓겨난 후 다시 루이 18세에서 샤를 10세로 이어지는 왕정체제가 이어집니다. 잠시 보나파르트 왕조로 갔다가 다시 부르봉 왕조로 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언론탄압, 의회 해산, 시민의 선거권 제한 등의 보수 회귀 정책으로 시민들의 불만을 사게 됩니다. 결국 다시 혁명을 일으키고 샤를의 먼 친척이자 1789년 혁명 때 큰 역할을 한 오를레앙의 아들인 루이 필립을 왕으로 옹립합니다. 이 혁명의 소식은 유럽으로 퍼져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주었고, 1831년 벨기에가 독립에 성공합니다. 흔히 프랑스혁명의 상징처럼 보이는 그림이 있습니다. 어느 여인이 가슴을 드러내고 깃발을 들어 사람들을 이끄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작품으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모습이 아니라 외젠 들라크루아가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것입니다. 

새롭게 왕에 오른 루이 필립 역시 일부 부르주아의 이익만 대변하는 정책으로 서민들과 하층민의 불만이 고조됩니다.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이념이 널리 퍼지는 시기였기에 서민과 하층민들, 즉, 프롤레타리아들의 의식화가 시작되고 힘을 다시 집결하기 시작합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 2월 21일 '공산당 선언'을 출판합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848년 2월 22일 프랑스에서는 다시 혁명이 일어나 루이 필립은 영국으로 도망쳤고 프랑스는 공화정이 시작됩니다. 

이 혁명의 영향은 다시 유럽으로 퍼집니다. 우선 헝가리에서 독립운동을 벌입니다. 헝가리는 오스만 튀르크의 슐레이만 대제에게 정복당한 후 분할되었다가 16세기부터는 오스트리아가 지배를 합니다. 이후 지속적으로 반항아처럼 조금씩의 반발은 있었지만 7년 전쟁 때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에 충성하며 잠시 조용하게 지냅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혁명에 영향을 받아 다시 독립운동을 펼치고, 이번에는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는 자치권을 인정받은 성과를 올립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커져가는 러시아 제국에 맞서 오스만 제국, 영국 (당시 이름은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프랑스 제국과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등 4개국이 연합해 전쟁이 일어납니다. 예나 지금이나 러시아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부동항 확보입니다. 워낙 추운 곳에 있다 보니 겨울에는 배가 움직일 수 없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겨울에도 얼지 않고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부동항을 갖고 싶은 것이 러시아의 큰 목표입니다. 러시아 제국은 지중해로 내려오려 했고, 그 땅은 오스만 제국의 관할이었습니다. 러시아의 팽창은 당시 세계 최강국인 영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게다가 바다를 확보하기 위해 내려온다는 것은 해상 강국인 영국이 더욱 싫어할만한 이유입니다. 결국 영국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이 1853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며 전쟁이 시작됩니다. 주요 전쟁지역이 크림반도이기 때문에 크림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몇 번의 격전이 이어지다 1855년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 마저 사망하자 러시아의 전투 의지는 많이 상실되고, 수많은 병력 손실과 재정 파탄으로 러시아 내부의 민심도 많이 돌아섭니다. 결국 1856년 러시아의 패배로 끝난 이 전쟁에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배우게 됩니다. 영국의 한 간호 장교가 사망자들을 보니 전쟁으로 죽은 사망자들보다 전염병과 같은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무질서한 병원에 규율을 세우고 위생관리를 철저히 시키자 환자의 사망률을 42%에서 2%로 뚝 떨어졌습니다. 병원에서 위생관념을 도입하게 한 이 간호 장교의 이름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입니다. 


일본


전국시대가 끝나며 시작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외교에 관해 독점적인 권리를 가지면서 무역을 통제하다 보니 자연스레 쇄국 정책을 취하며 지내옵니다. 하지만 이미 서구 열강들이 뻗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진출한 경험이 있었지만 제한적인 개방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나가사키 주변만 서양의 세력이 주둔하도록 했지만 이제는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더 생겼습니다.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 이후 서둘러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지중해 일대는 물론이고 아시아까지 배를 몰고 갔습니다. 그리고 1853년에는 일본을 압박해 1854년에는 미일 화친조약을 체결하고, 1858년에는 미국,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까지 포함된 통상조약이 체결됩니다. 물론 이때의 조약은 관세 자주권도 없고, 서양인의 치외법권도 인정해야 하는 등으로 내용이 서양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개항 초기에는 천황이 아닌 막부에서 조약을 체결한 것이 더 큰 문제가 되고, 막부 내부에서도 내분이 일어나며 일본 내부에서 시끄러워집니다. 

결국 사쓰마번과 조슈번에서 서양인과 마찰이 생겼지만 막부는 무력하게 박살 납니다. 이때 막부는 힘없는 본인들의 처지를 깨닫게 되고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권력을 다시 천황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이미 막부 반대 세력이 뭉치기 시작하고, 천황 중심의 체제로 가자는 의견도 많은 상태라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16살의 무쓰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합니다. 이때의 연호를 메이지(명치, 明治)라고 했기 때문에 메이지 천황이라고도 합니다. 천황은 부국강병의 기치를 내걸고 적극적으로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며 개혁정치를 시행합니다.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지향하면서도 경제와 군사, 교육적인 면에서 서구의 모습을 많이 따라갑니다. 그리고 1889년에는 제국 헌법을 공포하고, 1890년에는 의회도 열어 아시아에서 최초로 민주주의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의미로 유신(維新)이라 하고, 연호인 메이지를 붙여서 메이지 유신이라 부릅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중세 봉건적인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넘어가게 됩니다. 


우리나라


청나라와 일본이 서구의 세력에 의해 강제로 경제적인 문을 열기 시작할 때 우리나라인 조선은 힘겹게 그 바람을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안동 김 씨의 세도 정치는 이미 순조, 헌종에 이어 강화도령 철종까지 왕을 바꿔가며 완전히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족들의 삶은 그리 편안하지도 풍족하지도 않았습니다. 절대 빈곤까지는 아니지만 왕족으로서의 최소한의 체면만 유지할 정도일 뿐이지 아무런 실권도 없고, 경제적으로는 더더욱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때 인조의 넷째 아들인 인평대군에서 이어지는 왕족 중에 이하응은 기회를 엿보기 시작합니다. 어릴 때 추사 김정희에게 글과 그림을 배우기도 한 이하응은 한 때 그림을 팔아 연명할 정도로 왕족이라고 하기에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삶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호준을 통해 조성하와 사촌동생 조영하를 만나고, 그 형제들을 통해 조대비에게 접근합니다. 조대비는 헌종의 어머니로 당시에는 대왕대비이며 왕위 계승에 결정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입니다.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아들 이재황을 양자로 입양합니다. 이렇게 이재황은 효명세자와 조대비 순정 왕후의 아들이 되며 익성군(翼成君)으로 불리다 바로 왕에 즉위합니다. 1863년 12살의 어린 나이에 갑자기 왕이 된 익성군 이재황은 고종이며,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든 이하응은 흥선군입니다. 흥선군은 왕의 아버지가 되었기에 대원군이 되었습니다. 조대비는 잠시 수렴청정을 하다가 이내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고종의 보필을 맡기며 물러나니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편, 흥선군은 조대비에게 접근하기 위해 만났던 이호준에게 양자를 입양할 것을 권하고, 그때 흥선군이 추천해주어 이호준이 입양했던 사람이 바로 대표 매국노인 이완용입니다. 


호주


백인의 초기 이주 목적은 영국의 죄수들이 유배입니다. 1788년 1500명으로 시작되어 80년 동안 약 16만 명이나 되는 죄수들이 호주로 넘어왔고, 그들은 초기 식민지 개발에 동원되는 중요한 노동 자원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형기를 마친 죄수들이 자유인이 되기도 하며, 그들이 정착할 땅도 필요하기 때문에 불모지 개척이 더 본격화됩니다. 그러다 1850년대에 금광이 발견되면서 호주 대륙은 갑자기 기회의 땅으로 변신합니다. 1840년대에는 인구가 40만 명 정도였지만 1877년에는 200만 명을 돌파합니다. 이런 골드 러시는 죄수의 땅이 금광으로 인해 기회의 땅으로 바뀌게 되고 이때 유입된 인구는 유럽인들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이 많았습니다. 금광 채굴에 노동력이 많이 필요했는데 유럽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적기도 했고, 아편전쟁과 같은 청나라 내부의 문제를 피해 도망친 중국인들도 상당수 되었습니다. 그렇게 넘어온 중국인들은 자신들끼리 차이나타운을 만들며 독자적인 생활을 하고, 금광에서 캐낸 금을 호주에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이민이 목적이 아니라 돈을 벌어 본국으로 금의환향하려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폐쇄적인 생활에 금의 중국 소환까지 여러 부분에서 백인들과 중국인들 사이에 갈등이 심해지고, 이런 정서는 나중에 백인이 아닌 사람의 이민을 제한하는 백호주의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는 척 더하기 - 개틀링 기관총


1차 대전 당시 엄청난 살상력으로 악마의 무기로 불린 기관총. 세계 최초의 기관총은 개틀링 기관총입니다. 개틀링 기관총은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에 의사였던 리처드 조던 개틀링이 개발해 본인의 이름을 붙인 총입니다. 

개틀링은 자신의 고향인 인디애나에서 너무 많은 사망자들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이 적어지면 희생자도 적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방법입니다. 병사 1명이 더 많은 총을 쏘게 되면 참전하는 병사도 줄어들 것이라고 오해를 한 것이죠. 개틀링은 병사 1명이 100명의 몫을 할 수 있는 총을 개발한다는 생각으로 발명을 하게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기관총에 본인의 이름을 붙여 개틀링 기관총이라고 했습니다. 

실제 개틀링 기관총은 사용상의 불편함이 많아 그리 오래 사용되지는 않았고, 이후 1883년 하이람 맥심이 제대로 된 기관총을 발명했고, 1차 대전을 거치며 빅히트 상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대량 살상을 불러온 악마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