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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Sep 11. 2021

나폴레옹이 유럽을 휘저을 때 다른 나라는?

그때 다른 나라는?

유럽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난 후 프랑크왕국에 세워지고, 다시 분열된 이후 1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럽 대륙의 큰 형님은 프랑스였습니다. 우선 땅이 넓어 인구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걷을 수 있는 세금도 많아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유했습니다. 유럽은 바이킹이 누비고 다니다 정착하고 서로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서로 간에 결혼 동맹도 많이 일어나 모든 나라가 서로 연결되어있다고 보아도 될 정도입니다. 왕족은 아무래도 혈연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하게 되는데 어느 나라에서 왕위쟁탈전이 벌어지면 누구라도 참전할 명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유럽은 하나이자 여러 개의 나라인 상태가 계속 이어져왔습니다. 그 시기가 이어져오면서 유럽의 대표 언어는 프랑스어입니다. 십자군 원정 때 잉글랜드의 왕인 사자왕 리처드 역시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7년 전쟁 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도 위기에 몰렸을 때 프랑스어로 유서를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는 유럽의 중심이자 큰 형님의 역할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왕들의 콧대를 하늘을 찔렀고, 태양왕 루이 14세에 이르러서는 극에 달합니다. 유럽의 모든 전쟁에 참전하며 국가 재정이 위기인 상황에서도 화려한 궁전을 짓고 사치와 향락의 생활에 푹 젖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1685년에는 프랑스 기술력과 상공업 발달의 주축세력인 위그노들마저 추방해버려 프랑스 산업 전반에 큰 악영향을 끼칩니다. 위그노는 칼뱅주의 개신교도들을 말하며 상공업과 기술직의 핵심 세력입니다. 이어지는 루이 15세 재위 시기는 본인의 사치와 향락은 대폭 감소했지만 또다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과 7년 전쟁에 참여합니다. 그 와중에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개척 영국의 방해로 역시 지지부진해지면서 프랑스 재정이 사실상 회복 불가능 상태까지 이릅니다. 나라의 상태가 그 모양인데도 불구하고 루이 16세는 미국의 독립전쟁까지 개입합니다. 

당시 프랑스는 인구의 2% 정도인 성직자와 귀족계급이 전체 토지의 40% 이상을 차지하며 면세인 상황에 제3계급인 평민 부르주아가 정치에 참여할 기회인 삼부회는 1614년을 마지막으로 175년 동안 열리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1789년 루이 16세가 세금 문제로 삼부회를 열었지만 표결 방법에 대한 의견차이고 사실상 해산되어버립니다. 이렇게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한 세금을 98%의 평민에게 떠넘기니 민중들의 불만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거듭되는 흉년으로 먹고 살기 더 어려워지는 가운데 1785년에는 사기꾼 라 모트 부인이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도용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입하는 이른바 '목걸이 사건'마저 발생하니 민중들의 원성은 왕실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삼부회가 해산된 1789년 7월에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하며 프랑스혁명이 시작됩니다. 혁명 이후 루이 16세는 사실상의 모든 권력을 잃어버리고 잠시 입헌군주의 역할로 있다가 결국 1793년에 단두대에서 처형당합니다. 

새롭게 정권을 잡은 혁명 세력 역시 국정 운영 능력이 매우 부족하였고, 단두대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 말고는 하는 것이 없으니 전국에서 반란도 계속 일어납니다. 농민을 비롯한 서민들의 불만에 왕당파들이 지도자로 나서며 자코뱅파가 이끄는 혁명정부에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의 상황이 이렇게 되니 유럽의 다른 전제군주 국가들도 긴장을 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프랑스의 영토를 차지할 기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대 프랑스 동맹이 형성되고 모두 프랑스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외국의 침공에 마땅히 상대할 군인 장교들 조차 단두대에서 처형하고, 해외로 망명해 별로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런 기회를 하급 장교였던 나폴레옹은 잘 이용합니다. 1793년 툴롱 전투를 시작으로 나폴레옹은 초고속 승진을 하며 군부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를 찾아갑니다. 전투 능력에 정치적인 감각도 겸비한 나폴레옹은 몇 번의 전투 승리로 국민적 인기가 올라갔고 결국 1799년 쿠데타를 성공해 제1통령에 취임합니다. 그리고 5년 뒤인 1804년에는 황제로 취임합니다. 이후 전 유럽을 상대로 계속 전쟁을 이어오다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패배하며 엘바섬에 유배됩니다. 탈출해 다시 전쟁을 벌이지만 1815년 벨기에의 워털루 전투로 권력을 완전히 상실하며 나폴레옹의 시대는 끝이 납니다. 


남미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한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가는 남미에 있는 풍요로운 식민지인 브라질로 피신을 갑니다. 이후 브라질은 리우데자네이루는 한 때 포르투갈의 수도로 선포되기도 할 정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 패배로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자 왕인 주앙 6세는 1821년에 다시 포르투갈로 귀환하지만 아들인 페드루 1세는 브라질에 그대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1822년 9월 7일에 독립을 선포하고 10월 17일에는 브라질 제국을 선포하며 포르투갈과는 완전히 별개의 나라가 됩니다. 


스페인 역시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합니다. 그리고 직접 통치할 생각으로 1810년에 친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임명합니다. 그 소식이 식민지인 아르헨티나에 전해지자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민들은 1차 의회를 조직합니다. 자치론자와 중앙집권론자들의 견해 차이로 시간이 흐르는 동안 1811년에 파라과이가 먼저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후 호세 데 산 마르틴이 이끄는 군대의 활약으로 아르헨티나 역시 1816년에 스페인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후 1825년에는 볼리비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1826년에는 브라질의 속주이지만 독립을 시도하는 시스플라티나주를 두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전쟁을 합니다. 그리고 1828년에 정전 협정을 맺으며 독립을 하고 이름을 우루과이라 정합니다. 


우리나라


19세기가 되면서 조선 사회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정치적으로는 노론 세력인 안동 김 씨로 대표되는 세도 정치 시기입니다. 순조, 헌종에 이어 강화 도령 철종에 이르기까지 왕은 안동 김 씨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경제적인 변화는 훨씬 커집니다. 작은 수공업자들의 전문성이 강화되면서 전업 무역상으로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청나라와의 무역은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어있지만 이미 암암리에 성행하였고 그에 따른 큰 부자도 등장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부를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 부가 집중되면 빈익빈 부익부라는 계층 갈등은 더 깊어지기 마련이고, 정치적으로도 이미 통제할 여력도 의지도 없는 상태라 몰락하는 양반과 농민들도 늘어납니다. 

그런 상황에서 과거 대과 시험에서 낙방한 홍경래가 1811년 12월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당시 과거제도 역시 부패해서 권문세가의 자제는 그냥 급제하지만 다른 양반집 자제들은 매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평안도 사람들은 아예 급제자에서 제외하였습니다. 그래서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킨 공식적인 명분 역시 평안도 주민을 일컫는 서북인 들을 관직에 등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제 한동안 서북인들이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선조 때 율곡 이이가 서북인의 등용을 건의한 것을 보면 국가 정책적으로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라 보입니다. 

홍경래의 난은 큰 세력으로 성장했지만 반년만에 진압당합니다. 그리고 홍경래에게 잡혔다가 가족을 살리기 위해 항복한 양반 중에 김익순이 있었습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항복한 것은 나중에 용서가 되었으나 홍경래의 부하인 김창시를 조문형이 죽였으나 조문형에게 돈을 주고 자신이 죽인 것처럼 거짓말을 한 것이 발각되어 왕을 기만한 죄로 처형당합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10여 년 뒤 안동 김 씨 집안의 김병연이 과거 시험을 보는데 김익순에 대해 논하라는 시제가 출제됩니다. 김병연은 김익순을 마구 비판했지만 알고 보니 자신의 할아버지란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할아버지를 욕했다는 부끄러움과 아버지가 화병에 걸려 죽게 만든 장본인이 할아버지란 것을 알게 되어 하늘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평생 삿갓을 쓰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병연이라는 이름보다는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더 알려졌습니다.  


미국


나폴레옹은 유럽 대륙 대부분을 정복했지만 러시아의 강추위와 바다 건너에 있는 영국에게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22년간 이어진 나폴레옹의 전쟁 후반부는 사실상 거의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로 진행됩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해상 봉쇄령을 내려 영국과의 교역을 막고, 영국 역시 바다에서 프랑스와의 교역을 막아버립니다. 문제는 이 불똥이 미국으로 튑니다. 당시 유럽은 전쟁으로 초토화되었고 프랑스나 영국과 교역을 할 수 있는 나라는 바다 건너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미국뿐입니다. 영국과 교역하기 위한 배는 프랑스에게 막히고, 프랑스와 교역하는 배는 영국에게 잡힙니다. 대항해시대가 시작될 때 서로 해적질을 하던 모습이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이 당시 영국은 대영제국이라는 깃발을 휘날리며 아메리카를 넘어 아시아까지 무한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릴 때였고, 해군력은 세계 최강입니다. 유럽 대륙의 나라들은 전쟁으로 국가 재정 전체가 휘청거리고 있었지만 지리적으로 바다 건너에 있었던 영국은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더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문제가 발생합니다. 막강한 해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배도 계속 만들어야 하고, 그 배를 운용할 수 있는 인력도 계속 필요합니다. 배는 만들면 되지만 배에 승선할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집니다. 웅장한 배와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선원 생활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채찍질을 당해도 배에서는 도망을 갈 수 없기 때문에 체벌 역시 매우 일상적이라 선원들은 영국 배에 타기를 꺼립니다. 사람이 부족해지자 강제 징집을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배에 타면 도망을 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가장 많이 도망가는 곳이 바로 미국입니다. 영국에서 넘어간 사람들이 독립한 곳이 미국이라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질감이 매우 적었고, 미국의 배를 군함이 아니라 상선이기 때문에 보수와 대우 역시 더 좋았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영국은 미국의 배만 나포할 뿐만 아니라 사람마저 강제로 끌고 갑니다. 명분은 영국에서 도망간 사람들을 다시 데리고 가는 것이지만 마구잡이로 끌고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체사피크호 사건까지 터지면서 미국에서의 반영국 분위기는 매우 고조됩니다. 체사피크호 사건은 영국이 미국 국적의 배인 체사피크호에 포탄까지 발사하며 강제로 세워 20명에 가까운 사상자도 발생하고, 끌고 간 4명 중 진짜 영국인은 1명뿐인 사건입니다.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 내부에서도 영국과 마찰이 생깁니다. 당시 미국의 고민은 서부 인디언들의 땅을 개척하는 것과 캐나다의 땅마저 갖는 것입니다. 서부 인디언들을 몰아낼 때 프랑스의 도움을 받았는데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는 별 필요가 없는 광산업자나 사냥꾼 같은 사람들을 보냅니다. 그 사람들 중 상당수는 거의 깡패 수준이었기 때문에 인디언들과의 싸움에서 매우 거칠었습니다. 그러니 인디언들은 '적의 적'인 영국과 손을 잡게 됩니다. 즉, '미국+프랑스' vs '아메리카 인디언+영국'의 구도가 만들어집니다. 게다가 캐나다 지역에 정착한 프랑스 출신의 사람들이 미국 편에 서줄 것이라는 야무진 착각도 하고 있어 캐나다에 군대를 이끌고 올라가면 캐나다도 쉽게 합병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싫어 이주했지만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이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집단인 미국을 좋아할 리 없었고, 유럽 본토에서도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 중이라 아메리카에서도 막상 싸움이 시작되면 프랑스 출신 사람들이 미국 편을 들것이라는 것은 미국만의 착각일 뿐입니다. 

그런 대내외적인 상황에서 미국은 모든 문제가 영국과 연결이 되자 1812년에 영국에 선전포고를 시작하고 전쟁을 시작합니다. 29년 전에 한 번 이겨서 독립했던 자신감으로 싸움을 걸지만 세계 최강의 영국을 상대하기엔 신생 독립국인 미국의 힘은 매우 빈약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실각하면서 유럽의 전쟁마저 끝나버리니 영국의 힘이 아메리카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민병대 수준의 미군들은 영국 정규군을 상대하기엔 너무 벅찼고, 캐나다 지역에서는 환영받지 못합니다. 결국 영국군은 워싱턴을 점령하고 백악관을 불태워버립니다. 하지만 미국은 그냥 도망 다니며 싸움을 질질 끌었고, 영국 역시 미국 전체를 모두 점령하기에는 다른 식민지 관리에 부담이 가기 때문에 3년 만인 1815년에 전쟁을 마무리합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캐나다를 더 이상 넘보지 않게 되었고, 영국 역시 캐나다 동부 지역을 무역 근거지로 확보합니다. 미국은 이 전쟁을 계기로 각 주마다의 독립성 못지않게 나라 전체를 관할할 수 있는 연방정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통합을 준비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마찰은 발생하고 결국 내부에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게 바로 노예해방이라는 명분을 갖고 벌인 남북전쟁입니다. 그리고 불타버린 백악관이 그을림으로 지저분해 보이자 하얀색으로 색칠을 합니다. 그때부터 백악관을 'White House'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비록 수도 워싱턴이 함락되며 백악관이 불타기는 했지만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영국마저 별 소득 없이 철수하면서 미국은 사실상 유럽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은 제2의 독립전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아는 척 더하기


- 미터법의 시작

우리가 길이를 재는 표준 단위로 m(meter, 미터)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미터법은 언제부터 시작했을까요? 그것은 프랑스에서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일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790년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인 C. 탈레랑의 제안으로 파리 과학 아카데미에서 십진법을 활용한 도량형 단위법을 정했습니다. 빛이 진공에서 2억 9979만 2458분의 1초 동안 이동한 거리를 1m, 각 모서리의 길이가 1/10m인 정육면체와 같은 부피의 4℃ 물의 질량을 1kg, 그 부피를 1ℓ로 정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1840년에 강제로 미터법을 사용하게 했고, 1875년에 국제적인 미터 조약이 성립되면서 점차 전 세계적으로 퍼지기 시작합니다. 지금은 미국과 미얀마,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미터법을 표준 단위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근'이나 '평'을 많이 사용하고는 있지만 표준은 미터법입니다. 그래서 1근을 600g으로, 1평을 3.3㎡로 표기하는 것이 표준입니다. 

참고로 미국은 미국 단위계를 사용하는데 거리는 피트와 인치, 마일과 야드를 사용하고, 무게나 부피는 파운드와 온스와 같은 단위를 사용합니다. 미터법과는 다른 미국만의 단위계를 사용하기 때문에 미 항공우주국 NASA에서는 1999년 9월에 3.3억 달러짜리 화성 기후 궤도선을 날려먹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미얀마와 라이베리아는 옛날 영국에서 사용했던 단위계인 야드 파운드 법을 표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통조림의 시작

참치캔부터 수많은 음식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통조림. 그 시작은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보급이 중요하고 그중에서도 식량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기존과는 새로운 방법으로 전투 식량을 운반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영양이 풍부하고, 맛이 좋고, 휴대에 편리산 식품'을 개발하는 사람에게 1만 2천 프랑이라는 상금을 주겠다고 합니다. 당시 서민의 1달 생활비가 1천 프랑 내외였다고 보면 적지 않은 상금입니다. 여기에 조건은 소금이나 설탕과 같은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파리 동쪽에 살던 니콜라 아페르(Nicolas Appert)는 1795년부터 유리병에 고기를 넣고 코르크 마개를 덮고 가열한 후 입구를 녹인 버터로 밀봉합니다. 이렇게 하니 오랜 시간이 흘러도 부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른바 '병조림'의 탄생입니다. 그리고 연구 시작 10년 만인 1814년 심사에 합격해 1만 2천 프랑의 상금을 가져가지만 모스크바 원정이 실패하면서 상용화되지는 못했습니다. 

현대식 통조림은 1810년 영국의 피터 듀란드가 주석 깡통으로 밀봉하는 특허를 얻고, 1921년에 미국 보스턴에서 통조림 가공공장이 설립되면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1차,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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