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다른 나라는?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세계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세워지고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지역에 사람들이 정착해서 살고, 그 사람들 중에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해서 왕으로 추대됩니다. 그렇게 왕국이 세워지며, 주위의 나라들과 경쟁하면서 성장합니다. 이렇게 왕국의 형태로 나라가 성장하면 왕족이나 귀족계급이라는 상층 지배 세력이 중산층 이하의 평민 계층과 노예 계층이라는 피지배 계급을 다스리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그런 흐름과는 전혀 다르게 생기고 성장한 나라가 있습니다. 피지배 계급인 평민과 노예들이 나라를 만들었고,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가 된 곳이 바로 미국입니다.
대항해시대가 열리며 유럽의 나라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립니다. 후추의 나라 인도를 찾아가기 위해 떠나면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아시아까지 진출합니다.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물자들로 유럽은 조금 풍족해질 수도 있었지만 그만큼 욕심도 더 커지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백년전쟁에 이어 30년 전쟁에 오스트리아 왕위 쟁탈전과 7년 전쟁까지 지속되면서 200년 정도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듭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상대적으로 강대국으로 성장한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영국입니다. 대부분의 전쟁이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면서 땅은 초토화되고, 사람들은 먹고살기도 어려워졌지만 영국은 자신들의 내전을 제외하고는 영국 땅에서 큰 전쟁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 이후로 강력하게 성장한 해군의 힘을 바탕으로 식민지 개척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돈이 생기면 평등하게 분배되기보다는 빈익빈 부익부가 더 심해지기 마련입니다. 부자 귀족들은 더욱 잘 살게 되지만 평민 이하의 피지배층은 힘들어지죠. 특히나 기술력을 가진 중산층의 평민들은 더더욱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고 영국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배를 타고 새로운 식민지인 아메리카로 모여들고 대서양 바닷가를 중심으로 정착하기 시작합니다. 미국 동부의 대서양 주변이 영국의 식민지였다면 프랑스는 영국 식민지 서쪽의 내륙, 스페인은 태평양을 바라보는 미국 서부를 식민지고 갖고 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와 같이 도시 이름에 'san'이 붙은 나라는 스페인어에서 시작했고, 루지애나는 프랑스 왕의 이름인 '루이의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은 전쟁의 피해거 컸기 때문에 일부의 정복자들만이 물자만 착취하는데 급급했지만 영국은 사람들이 이주해서 정착할 여유가 있는 유일한 나라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영국 본섬에서 살기 힘들다고 생각한 피지배계층이 중심이 되어 영국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300만 명이 넘어 미국 동부 지역에 13개 주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초기에 이민 온 사람들 중 3/4 정도는 노예 이민입니다. 몇 년 동안 미국의 식민지에서 노예처럼 지내면 자유와 영주권이 주어지기 때문에 하층 계층의 사람들이 더욱 많이 이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영국 본섬에서도 하층 계급들의 이주가 나쁠 것도 없었습니다. 어차피 식민지에서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뽑아먹기 위해서는 누군가 필요했고, 귀족들만 넘어가기보다는 하층계급들이 알아서 보내주길 바랬기 때문입니다.
사실 영국 역시 7년 전쟁 이후로 재정압박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 식민지에서 충당하려 했습니다. 그 방법이 여러 품목에서 막대한 세금을 부과한 것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은 통화법입니다. 미국 식민지에서도 의무적으로 영국의 파운드화만 사용해야 했는데 문제는 영국의 파운드가 미국으로 넘어갈 때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이자를 붙여서 사가야만 했습니다. 즉, 미국 식민지에서는 거래가 일어나고 물류가 활성화될수록 영국으로 지불해야 되는 세금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것입니다. 불만이 쌓여가는 중에 토머스 페인이 쓴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책이 1776년에 출판됩니다. 주요 내용은 미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기술력도 있고, 땅을 비롯한 자원도 있기 때문에 굳이 영국에 종속될 이유는 없다는 내용입니다. 영국에 종속되면 모두 빼앗기지만 독립하면 빼앗기지 않기 때문에 잘 살 수 있는 것이 상식이라고 주장하자 미국에 정착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게 되며 독립에 대한 정서도 점점 확대됩니다.
이미 1773년에 영국의 지나친 세금 징수에 반발해 보스턴 항구에 정착한 배에 실린 홍차를 바다에 버린 보스턴 차 사건 이후로 영국의 압박이 거세진 상황이었고, 1775년에 보스턴 근처에 있는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영국군과 미국 대륙의 민병대가 전투를 벌이며 독립전쟁이 시작됩니다. 아직은 중립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은 상황이었지만 '상식' 출간 이후에 분위기는 독립 지지로 급변합니다.
결국 정규군인 영국군과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민병대인 미국 식민지 대륙 군의 전쟁은 1783년에 13개의 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으며 미합중국이 시작됩니다.
영국인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는 잃었지만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자 선진국입니다. 증기기관도 이미 개발이 되었는데 1769년에 제임스 와트가 개량한 증기기관이 대량으로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미국 식민지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1776년에 제임스 와트는 상업용 증기기관 제품도 출시합니다. 증기기관은 산업에서 기계가 도입되게 만들었고 산업혁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1차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피뢰침 발명으로 유명한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국 독립군의 외교 사절의 임무를 맡아 유럽 대륙으로 넘어갑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게 독립의 지지를 얻어내고 영국과의 전쟁에 도움을 받기 위한 목적입니다. 결국 프랑스가 참전을 하였고 대서양에서 영국 보급선을 끊는 성과를 거둡니다. 이 해상전투는 당시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해군에게 패배한 유일한 전투이며, 미국 독립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된 요크타운 전투를 미국 승리로 이끌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미국 독립 이후에도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하고 전쟁 비용으로 인해 경제 위기만 더욱 심각해집니다. 이미 30년 전쟁을 지나 오스트리아 왕위쟁탈전에서 이어진 7년 전쟁에 개입하면서 프랑스의 경제 위기는 극에 달한 상태였습니다. 그 결과 1789년에는 민중 봉기로 왕정을 무너뜨리는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합니다. 프랑스는 혁명 이후에 의회를 중심으로 공화정을 시작했지만 단두대에서 사람을 죽이기만 했울 뿐 내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 와중에 유럽 대륙의 강자였던 프랑스가 휘청거리는 모습에 다른 유럽의 나라들도 프랑스를 넘보며 또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때 프랑스를 구하는 영웅이 한 명 등장해 유럽 전체를 휩쓸고 다니니 그 사람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입니다.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은 1770년 호주의 보타니만에 유니언잭 깃발을 꽂고 당시 영국의 왕인 조지 3세의 이름으로 호주 대륙을 영국의 속국으로 선언합니다. 그리고 1788년 이민이 시작되면서 호주도 세계사에 편입이 되기 시작합니다.
호주 대륙에는 이미 6만 년 전부터 에보리진(the Aborigines)이라 불리는 원주민들이 자유롭게 살고 있었는데 1606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드로 페르난데스가 상륙한 이후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찾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초기에는 북서부의 사막지대로 갔기 때문에 그냥 불모지로만 인식해 크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1688년 호주 북서부 지역을 탐사하던 윌리엄 댐피어는 에보리진을 보고 사람과 비슷한 유인원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찰스 다윈은 인종 간의 우열을 나눌 때 백인을 가장 우수한 인종으로 분류하고 호주의 에보리진을 가장 열등한 종족으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은 주목받지 못했던 호주였지만 영국의 제임스 쿡이 1770년 동남부 지역까지 돌아보니 비로소 사람이 살 만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유럽 사람들이 넘어오게 됩니다.
에보리진들은 땅에 대한 소유가 없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영국은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집어삼킬 수 있었고, 미국의 독립으로 식민지 일부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새로운 식민지를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미국으로 보내던 죄수들을 수용할 유배지의 역할로 호주를 이용하기 시작했고, 1788년 1500명의 죄수와 관리를 태운 11척의 배가 호주로 향하는 것으로 호주의 백인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때 함대 책임자인 필립 총독은 귀족 시드니의 이름을 붙여 자신들이 도착한 항구의 이름을 시드니로 정했고 시드니에 상륙한 날인 1월 26일은 호주의 날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이 시기는 우리나라도 잠시 부흥의 시기입니다. 조선이 화려했던 시기가 전기에는 세종대왕 재위 시기라면 조선 후기에는 단연 정조대왕의 재위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정조는 51년 7개월이라는 긴 세월 왕의 자리에 있던 할아버지 영조의 승하 후 1776년에 보위에 오릅니다. 즉위 직후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밝히며 당시 기득권인 노론 세력과 정면 대결을 벌였고, 차근차근 정치적인 입지를 다집니다.
왕실 박물관이자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고, 장용영을 세우며 군사 개혁을 추진합니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었고, 이순신 장군의 일기에 '난중일기'라는 이름도 지어줍니다. 그리고 청나라를 더 이상 오랑캐의 나라로 무시하지 않고 북학파 실학자들과 함께 선진 문물을 배워오기도 합니다. 그렇게 과학 기술을 발달시켜 수원 화성을 만드는 토목 공사에 응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천주교는 사학(邪學)이라고 규정하며 배척했습니다. 1791년에는 신해박해로 권상연과 윤지충을 사형시키며 천주교를 탄압합니다. 1795년에는 중국 천주교 신부 주문모가 밀입국한 것이 발각되는데 이 사건 때문에 거중기를 만든 정약용과 수원 화성 공사의 책임자였던 채제공이 일선에서 밀려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