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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소녀 Feb 22. 2017

일드 <도망치는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그들이 가까워지는 방식

이제 다 끝나고야 말았습니다. 2주 동안 우리의 매일 저녁을 책임져준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가 말입니다. 작년 말에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였다는 이 드라마는 드라마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시청률이 한 번도 내려가지 않고 계속해서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고 하죠. 드라마가 끝날 때 배우들이 나와서 추는 춤은 우리나라의 몇년 전 '꼭짓점 댄스'처럼 또 하나의 인기여서, 여기저기서 패러디 영상이 속출하기도 했다고 해요. 우리 부부에겐 <도깨비>보다도 훨씬 재밌어서 볼 때마다 세 장면이 넘어가기 무섭게 깔깔거리며 보았고, 옆에서 박장대소를 하는 신랑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한 번 더 기분이 좋아지곤 했지요. 한 편 한 편이 참으로 재미있고 또 섬세해서 다음편을 이어보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하루에 한 편씩만 아껴가며 즐겼답니다.

드라마가 끝나면 다같이 나와 춤을 춥니다


총 11부작으로 구성된 이 드라마는 (일본 드라마는 모든 방송국의 드라마가 10~11부작으로 구성되어, 다같이 시작하고 다같이 끝나요) '계약결혼'을 주제로 두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어요. 여주인공 '미쿠리' 배역은 십여년 째 일본의 톱스타인 아라가키 유이가 맡았고, 아무리 봐도 유재석을 닮은 호시노 겐이 남자 주인공 '히라마사' 역을 했지요. 우리에게 친숙한 일본 배우 오타니 료헤이는 히라마사의 직장 동료로, 어쩜 나이 들었는데도 저리 아름다울까 감탄사를 매번 연발하게 하는 일본의 유명배우 이시다 유리코는 미쿠리의 싱글 이모로 등장합니다.    


히라마사는 '프로독신남'으로, 학창시절이었다면 눈길 한 번 안주었을 것 같은 평범하고 조용한 시스템 엔지니어이고, 미쿠리는 명랑하고 밝은 성격이지만 망상에 가까운 상상을 쉽게 벌이는 바람에 계약결혼까지 먼저 덜컥 제안해 버리는 사랑스러운 아가씨이지요. 둘의 첫 만남은 남자 혼자 사는 히라마사의 집에 미쿠리가 가사대행 아르바이트로 일주일에 한 번 출퇴근하면서(그것도 아빠의 소개로!) 시작됩니다. 뭔가 무리인 듯한 설정이지만 만화가 원작이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요. 만화같은 요소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드라마 중간중간 난데없이 다른 프로가 등장하는데, 일본의 다른 유명 프로그램의 포맷을 빌려와 주인공들이 그 프로의 주인공으로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해요. 우리로 치면 드라마 중간에 진품명품이나 복권 프로그램이 개입되는 식이지요.

미쿠리가 이번엔 뉴스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등장했네요

              

둘 사이에 감정이 생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 철썩같이 믿었던 두 남녀는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점점 가까워져 갑니다. 연애경험이 없던 그에게 그녀는 늘 두드리는 사람으로 다가오고, 자신의 주제넘는 성격 때문에 많은 것을 망쳐왔다고 생각하는 그녀에게 그는 동등한 눈높이에서 그녀의 특별한 사랑스러움을 늘 존중해주는 고마운 사람이지요. 남녀가 첫 호감을 느끼고 마음을 확인하고 스킨십을 하기까지, 보통의 경우라면 단번에 빼버렸을 이 진도를 <도망부끄>는 어찌나 느리고 풋풋하게 그리는지 몰라요. 그 과정에서 두 주인공의 마음은 같은 사건을 두고 각자의 독백으로 다르고 또 섬세하게 표현되지요. 가까워지면서도 그들 사이엔 늘 예의가 있고(일본 사람들이 그렇듯이), 상대의 영역을 침범한 듯한 언행에 대해 '죄송합니다'를 자주 말하면서도 조금씩 서로의 마음에 침투해 들어가는 그들의 방식을 보게 됩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제목은 헝가리 속담이라고 하는데, 늘 도망치는 걸로 위기를 모면해왔던 주인공들은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더이상 도망치지 않고 나의 감정과 상대 앞에 정직하게 임하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기차간에 나란히 앉은 두사람처럼, 그들은 가깝고 평등한 관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나저나 저는 점점 일본과 사랑에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든답니다. 어느덧 일본 여행 4회차를 찍은 사람으로서 드라마 속 곳곳의 광경들이 반갑고, 일본 작가의 책을 읽을 때도 책 속에 등장하는 가게의 분위기가 그려지며 '나도 거기에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까요. 언어란 문화를 접하는 것이라더니, 과연 일본어에 꽤나 호기심이 가서 슬금슬금 일본어 공부도 시작해볼 정도랍니다. 제게 일본을 접하게 해주고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는 신랑은, 잘하는 사람은 한집에 한명으로 충분하다며 자꾸 중국어나 영어를 해보라고 하지만, 그동안 제 영어실력이 더 늘지 않았던 것은 그쪽 문화에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였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네요. 큰 즐거움을 준 <도망부끄>가 끝나버렸으니 이제 무슨 드라마를 봐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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