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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소녀 Mar 24. 2017

일드 <중쇄를 찍자>

초심을 잃어버린 당신에게

제가 출판일을 정말 좋아했었다는 말은 이전에 쓴 글 '직업으로서의 꿈'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지요? 그 후 다니고 있던 회사생활에 지쳐서 한동안은 회사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는 얘기도요. 언니가 아주 좋아할거라며 신랑이 후배에게 추천 받아온 일드 <중쇄를 찍자>는 처음에는 그런 이유에서 그다지 끌리지 않았답니다. 백수생활에 푹 젖어있는 중인데 굳이 출판일에 대한 향수를 환기시키고 싶지도 않았고, 어쨌거나 사무실을 배경으로 하는 오피스 드라마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어쩌다가 시작한 <중쇄를 찍자>를 다 보아가는 요즘, 마치 죽어있던 연애세포가 살아나듯이 회사에 대한 마음이 회복되고 나도 일하러 가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고 있답니다. 이 기특한 드라마 <중쇄를 찍자>가 부린 마법이라고 할까요.

시종일관 밝고 유쾌하고 긍정적인 분위기의 이 드라마는 만화 주간지인 '주간 바이브스'를 무대로 편집자와 만화가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그리고 있답니다. 우리에게도 '소년챔프' 같은 추억의 만화잡지가 있는 것처럼, 일본의 만화 시장은 훨씬 크고 팬층도 두터워서 '주간 바이브스'는 과연 인기 드라마의 소재가 될만 하지요. 드라마 내내 흐르는 모토인 '중쇄를 찍자'는 말은 출간한 만화책의 반응이 성공적이어서 2쇄에 돌입하게 되는 목표에의 다짐을 말해요. 열심히 그림을 그린 만화가에게도, 만화가와 함께 책을 펴낸 편집자에게도 뿌듯하고 영광스러운 순간이지요. 더없이 밝고 사랑스럽지만 이 드라마가 절대 가벼운 것만은 아니랍니다. 직업 세계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비춰주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직업인들의 애환과, 일과 삶에 대한 철학이 매회마다 녹아들어 있지요. 닮은듯 다른듯 우리의 드라마 <미생>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중쇄를 찍자>의 주인공은 일명 '새끼곰'이라 불리우는 주간 바이브스 신입사원 쿠로사와 입니다. 일본에서 제 2의 아오이 유우로 불린다는(더 씩씩하고 정이 가는 매력이 있는 것 같지만요) 쿠로키 하루가 넘치는 긍정 에너지와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똘똘 뭉친 주인공을 연기했지요. 전직 유도선수였다가 부상 때문에 다른 길로 접어든 만큼, 자신에게 좋은 친구가 되주었던 만화를 직접 펴내는 일에 남다른 열의와 진정성으로 다가갑니다. 쿠로사와의 순수한 호기심과 언제나 파이팅 넘치는 태도는 의도하지 않게 주변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만화가에겐 믿고 의지하는 편집자로 자리매김하지요.



쿠로사와가 일하고 있는 주간 바이브스 편집부에는 편집장('고독한 미식가'의 마츠시게 유타카)과 부편집장(오다기리 조) 휘하에 다양한 캐릭터의 편집자들이 일하고 있어요. 그들은 정말로 만화를 사랑해서 모인 사람들이지만 현재 모두가 재밌고 즐겁게 일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한때는 이 일을 정말로 좋아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열의가 식어버린 사람도 있고, 잡지가 폐간되는 상처를 겪은 경험 때문에 신참 만화가의 단물만 쏙 빼먹는 냉정한 편집자로 돌변한 사람도 있지요. 이런일 저런일 모두 겪어온 두 편집장은 직원들을 다독이고 앞서 혜안을 제공하며 바람 잘 날 없는 주간 바이브스를 이끌어갑니다.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들의 이야기도 또 하나의 축을 담당합니다. 편집자가 다양한 것처럼, 만화가들에게도 각자가 놓인 저마다의 다른 위치와 상황들이 있지요. 오랜 시간 일류 만화가로서의 명성을 지켜왔지만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인터넷에 달린 악플을 보고 상처를 받아 펜을 놓는 만화가, 20년 동안 문하생으로서 연재 데뷔를 기다려왔지만 더는 내 인생을 멈춰있게 할 수만은 없어 떠나기로 한 만화가, 누군가는 오랜 세월 이루지 못했던 간절한 꿈을 지원 한번만에 이뤄내 질투와 시샘을 불러일으키는 천재 만화가. 그들의 직업이 만화가일뿐, 그들이 살아가는 모양은 어떤 직종에서든 어떤 자리에서든 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듯 합니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 간의 관계도 흥미롭게 그려지지요. 편집자는 만화가가 작품에 매진하고 방향을 잘 잡아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만화가는 그런 편집자에 의지하면서도 결국은 홀로 작품을 만들어가야 하는 책임이 있지요. 마음 문을 닫아버린, 기억에서 잊혀진 옛 만화가를 삼고초려 하는 에피소드에서는 편집자와 작가이기에 오랜 세월동안 맺어올 수 있었던 그들의 특별한 관계가 주는 감동에 마음이 짠해지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편집부에서 공들여 펴낸 잡지를 전국의 서점과 온라인에 팔기 위해 영업하는 영업부, 만화책을 독자의 가장 가까이에서 판매하는 서점 직원들도 하나의 책이 만들어져 독자에게 다가가기까지 누구 하나 없이 중요한 사람들이지요.

한회 한회의 에피소드를 볼 때마다 저는 새끼곰 쿠로사와를 비롯한 주간 바이브스 직원들과 만화가들이 부리는 마법에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었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저들을 부러워하기 이전에 나는 초심과 열의를 얼마만큼 잃어버리고 일상에 임했었는지를 돌아보기도 했고요. 총 10부작 중 두 회 정도를 남겨놓고 있는 지금, 드라마를 완주한 뒤에는 내게 어떤 감정이 남을까 궁금해집니다. 봄이 오는 계절에 <중쇄를 찍자>가 내 마음에 비춰준 봄볕만큼, 이 드라마를 보는 누군가의 가슴에도 새순이 돋아나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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