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생각식당 (2023.06.19)
마케팅 대행 초기에는 광고주를 소개받으면 아이디어를 먼저 제시하곤 했다. 당시 난 마케팅은 기획과 크리에이티브에서 승부가 난다고 믿었고, 돈은 광고주가 쓰는 매체비로 벌면 된다고 생각했다. 광고주의 매체비는 마케팅 에이전시의 가장 큰 수익모델이다. 만약 광고주가 1억의 매체비용을 쓴다고 가정하면, 그 비용은 에이전시를 거쳐 매체사(언론, 방송, 플랫폼 등)에게 지급되고, 에이전시는 다시 매체사에게 일정 수수료를 청구해서 수익을 돌려받는 구조다. 기획비는 매체비 수수료에 포함되거나, 크리에이티브 제작비용에 녹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즉 나의 기획은 아무리 훌륭하고 성공적인 캠페인으로 이어지더라도 결국 값이 없는 노동이었다.
이후 소셜미디어가 등장하고 디지털 마케팅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면서 마케팅은 크리에이티브의 시대를 지나 퍼포먼스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퍼포먼스 마케팅도 전통 마케팅의 수익구조와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전통매체(방송, 신문, 라디오, 잡지)가 디지털 플랫폼으로 전환되었을 뿐, 매체비 수수료를 돌려받는 구조는 같았다. 마케팅 에이전시들은 검색엔진 최적화, 빅데이터, 그로스 해킹 등의 용어로 무장했지만, 결과적으로 돈을 버는 구조는 광고주와 플랫폼의 중개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중개업의 본질은 수수료 싸움이다. 에이전시의 경쟁력은 크리에이티브가 아니라 광고주로부터 얼마나 많은 매체비를 따내느냐의 영업력으로 고착되었다.
나는 에이전시를 운영하면서 고객들의 PR과 마케팅대행을 오랫동안 해왔고, 우연히 대선과 선거 캠페인에도 참여해 보았고, 운이 좋아서 외국계마케팅회사의 임원으로 큰 큐모의브랜드캠페인도 수행할 수 있었다. 요즘 내게 마케팅고민을 토로하는 지인을 만나면, 예산을 먼저 물어보는 편이다. 이기는 마케팅을 하고 싶다면, 총알부터 확보하고 에이전시를 만나라고 조언한다. 고착된 산업구조 속에서 광고주의 예산은 가장 중요한 마케팅의 성공 조건이기 때문이다. 예산이 적으면 큰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효율만 강조하는 광고주는 하나의 전술로 전쟁을 치르겠다는 장수와 다르지 않다. 운이 좋아 승리할 수도 있겠지만, 병사들을 모두 죽일 수도 있다.
전쟁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고, 전투의 목적은 승리의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는 화력을 일시에 집중해야 한다. 확률을 높이는 일이 확실한 효율이다. 광고주는 전쟁을 책임지는 총사령관이다. 사선의 병사들에게 총알과 물자를 넉넉히 챙겨주어야 한다. 이기는 마케팅은 돈 좀 쓸 줄 아는 광고주가 만든다. 코로나19, 경기침체 그리고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마케팅 산업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물론 광고주가 가장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맨손으로 전쟁을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케팅에 정답은 없지만, 전쟁에는 정답이 있다. 정당성과 강한 군사력으로 무장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 물론 운이 따라주어야 한다. 운은 정성이 만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