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와 계급 vs 개인의 경쟁력
1. 사람은 순서 매기는 일을 본능적으로 좋아합니다. 순서는 자연스럽게 순위가 되고, 순위는 계급으로 고착되기 마련이죠. 작게는 책과 영화의 순서에서 크게는 학교와 직장의 순서가 계급이 됩니다. 물론 순서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에서 뇌가소성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2. 그러나 이를 악용하는 사례도 많습니다. 최근 OTT 콘텐츠의 랭킹이 그렇습니다. 한 플랫폼 내에서의 순서는 당연히 공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데이터를 공유하지 않는 플랫폼 간의 랭킹을 발표하는 것은 자칫 시청자의 선택을 오도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3. 영화의 랭킹은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기준은 관객의 돈과 숫자였죠.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미국의 기준에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OTT 콘텐츠는 다릅니다. 정기 구독을 하는 이용자의 시청 시간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데이터 취합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4. 최근 영화 시상식에서도 OTT 시리즈에 상을 줍니다. 특별상이라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본상이라면 심사의 절차와 기준이 명백해야 합니다. 현재 OTT 콘텐츠의 통합 데이터 베이스는 어디에도 없고, 그 많은 콘텐츠를 모두 검토하고 심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5. 이런 이유로 OTT 콘텐츠의 랭킹이나 시상은 결국 화제성이 기준이 됩니다. 랭킹과 수상은 콘텐츠의 재집중을 유도하고, 인기를 얻은 콘텐츠는 계속 인기를 얻는 동력을 얻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성은 소멸합니다. OTT 업계에 젊고 새로운 창작자가 스며들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겠죠.
6. 물론 대중성은 콘텐츠를 평가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준입니다. 하지만 전부는 될 수 없고, 대중성이 화제성과 동일시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구독자가 많은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반드시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조회수가 높은 동영상이 꼭 좋은 작품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죠.
7. 플랫폼과 미디어는 기본적으로 우상향 성과지향이 목표이고, 큰 투자를 하는 만큼 소기의 성과를 얻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작품성이라는 순서의 가장 중요한 기준을 지금처럼 외면하면 곤란합니다. 당분간 OTT 플랫폼의 전성시대입니다. 공정한 순서를 만드는 일에도 신경을 쓰면 좋겠네요.
8. 넷플릭스에 지난 11월 2일 공개된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라는 4부작 시리즈가 있습니다. 현재 국내 랭킹 사이트 자체 평점 지수 100%를 받고 있죠. 그러나 콘텐츠 통합 랭킹 20위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현재 랭킹 사이트 1위는 평점 지수 24.06%의 “독전 2”가 올라 있습니다.
9. 인기가 기준이 되는 순서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별점을 주는 일도 재미를 위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사랑하는 K-무비, K-드라마 업계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기입니다. 제가 가장 우려하는 점은, 고인 물은 썩어가고 새로운 피는 수혈되지 않는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10. 이런 일도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주장은 거부합니다. 저 옛날 박세리 박찬호 선수도, 김연아 손흥민 선수도, 봉준호 황동혁 감독도 국가가 순서를 매겨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개인의 경쟁력이 이 나라 K-컬처를 만들었다고 믿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창작자 만나고 박수치면 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