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릉길을 걸어서 여주장까지 가자 능서생막걸리가 기다린다.
사서한 고생인데,
막걸리는 참 푸근하다
걷고나서 마시는 막걸리는 참 푸근하다. 사서 한 고생이라도 막걸리는 걷기의 고단함을 말 없이 알아준다. 걷기가 힘들참이면 어여 걷기를 끝내고 시원한 막거리 한 잔 하겠다 생각에 힘을 냈다. 그렇게 마시다보니 걷기 길마다 새로운 막걸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함께 걷던 친구들이 의기투합하여 지역의 특색있는 길을 걸으며 지역 막걸리를 마셔보자는 여행을 생각했다. 이름도 지었다. '막걸어 막걸리'. 이번 여행은 재윤과 김해가 함께했고 뜨란과 테우리가 게스트로 참여했다.
여주장 서는 날,
막걸리 마시기 딱 좋은 날
이번 걷기 길은 경기도 여주의 '여강 길'이다. 이곳에서는 신륵사 앞 남한강을 '여강'이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걸은 여강길 4코스는 산길, 마을길을 걸어 여주장에 이르는 강과는 좀 떨어진 길이다. 우리가 걸은 날은 5일 마다 열리는 장 날이었다. 막걸리 마시기 딱 좋은 날이다.
'여주명당길'이라 부를란다
여강길 4코스의 별칭은 '여주5일장길'이다. 하지만 나는 '여주명당길'이라 부르고 싶다. 풍수가들이 말하길 길이 시작되는 세종대왕릉은 하늘의 신선이 내려와 탄생한다는(天仙降誕形) 천하명당이고, 길이 끝나는(혹은 시작하는) 곳에 위치한 신륵사는 봉황의 꼬리라 알을 품어(鳳凰胞卵形) 재물과 자손이 풍성한 곳이기 때문이다. 보기드믄 명당길이라 '여주5일장길' 만으로는 아까운 이야기가 풍성한 길이다.
장남을 잃을자리?
원래 세종대왕의 릉은 서울 내곡동 헌릉에 있었다. 세종 사후 첫째 아들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요절하였다. 이후 잘 알려진 것처럼 둘째 수양대군이 단종을 죽이고 즉위 하였다. 세조는 평생 나병과 악몽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후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가 가위 눌림으로 20세에 훙서하였다. 당대의 풍수가 최양선은 세종의 묏자리를 잘못 썼 때문이라 하였다. 그곳은 "후손이 끊어지고 장남을 잃을 자리"라는 것이다. 계속되는 왕실의 흉사를 막기위해 무엇이라도 해보아야 했을 것이다.
왕실에 복을 내려줄 명당
왕실은 흉사를 막고 복을 내려줄 명당을 찾아야 했다. 당시 일급 지관들은 세종의 새로운 묏자리를 찾아 다녔다고 한다. 일급 지관 안효례도 같은 임무를 띄고 북성상 정상에 올라 땅을 살폈다. 그곳에서 산아래 천신이 내려와 탄생할 명당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오니 그 곳이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고한다. 마침 오는 비를 피하여 돌다리를 건너 누군가의 사당에 몸을 피하였다. 알고보니 바로 그곳이 안효례가 찾던 천하명당이었단다.
그곳은 원래 세조 반정을 도운 공신 한산 이 씨 이계전과 공신 광주 이 씨 이인손의 묘가 있었다.. 실록에서는 천장을 위해 두 가문의 후손에게 지극 정성으로 사례를 하고 여주 다른 곳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1469년 3월 일이다. 안타깝게도 그해 12월 예종이 승하하셨다. 즉위 1년만인 19세의 나이였다. 조금만 빨리 천장했더라면 어땠을까?
'능서생막걸리'를 만드는
능서탁주 협동제조장
여강길 4코스에는 여주 대표 막걸리를 만드는 능서탁주 협동조합이 있다. 여기서 '능서생막걸리'를 생산한다. 양조장의 외관과 구조는 여느곳과 비슷했다. 우리는 막걸리를 출고장까지만 들어갔다. 때가 때이고 술 만드는 곳이니 만큼, '안에 술 만드는 우물이 있을까?' 이런 호기심은 접고 나왔다. 걷기가 끝나는 여주장에서 마실것을 기대하며 세종대왕릉 방향으로 출발했다.
논밭길 트레킹의 매력
"원더블 논밭뷰!"
우리는 자전거길로 안내하는 네비대신 논밭길을 찾아 걸었다. 느리게 가더라도 딱딱하고 부드러운 흑을 밟으며 조용히 가고 싶었다. 강렬한 냄세를 뿜어내는 우사를 지난다. 누렁소 한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음매에~~ 음매에~~하고 말을 건다. '너 누구야? 어디서 왔어? '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 그건 개인정보라...', 비온 뒤 고인 물에서 모기들이 튀어 오르고 있었다. '와~ 먹을 거 온다 준비해~!!' 모기들이 광분하여 외치고 있었다. 해충 방지제를 몸에 잔뜩 뿌리고 후다닥 웅덩이를 뛰어 건넜다. 우아한 백로가 깃털을 고르며 논 한가운데 서 있었다. 뜨란님이 '원더풀 논밭뷰!' 을 외친다.
낡은 창고 모서리에서 <세종대왕릉 가는 길> 이란 녹슨 표지판을 발견헸다. 일부러 지도와 다른 길을 걸었는데 세종대왕릉가는 또 다른 길을 만난 것이다. 오늘은 명당이 운명이가 보다. 그런데 여기 아이스커피 파는 가게가 있었으면 좋겠다. 목도 마르고 잠시 쉬고싶었다. 뜨란님과 진지하게 즉석 '구두' 사업계획을 세워보았다. 다양한 막걸리를 팔자는 의견이 더해 졌다. 대충 따져보니 본업에 충실하기로 했다.
천하명당을 뒤로하고 한발 한발 산길, 데크길, 차길, 강길을 걸어 목적지 대로사로 향했다. 강길은 자전거 도로였다.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복사열과 여강 습기가 섞여 숨이 턱턱 막힌다. 한참을 걸어도 탈출할 계단이 나타나지 않았다. 드디어 계단 발견! 탈출에 성공하여 강둑에 오르니 강바람이 시원하다.
아재 농담을 누르고
우리가 잠시 강바람을 즐기던 곳이 알고보이 목적지 '대로사' 앞이었다. ' 많이 화났니대로사?' 끌어 오르는 아재 농담을 어렵게 누르고 있는데 정신차리라며 소나기가 한차례 쏟아졌다. 대로사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배향하는 사당의 이름이다. ''大老" 는 덕망이 높은 노인을 뜻하는 말로 성시열 선생을 지극히 높여 부르는 존칭이라고 한다.
담장 밖으로 넘실넘실 바람난 능소화옆을 지나 대로사로 들어갔다.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 내삼문 안쪽에 대로사가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평소에는 홍살문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마당에는 여강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대로서원'이 있다. 단아한 자태가 품격있고 아름답다. 흥선대원군이 강제로 서원을 철폐할 당시 이름을 '강한사'로 바꾸고 화를 면하였다 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강해져서...' 폭팔하는 아재 개그를 꾹 누른다. 그나저나 저런 곳에서 어찌 공부를 했을까? 누어 자기 딱 좋...
송시열 선생님 사당이
왜 여주에 있어?
정조대왕이 직접 비문을 쓰셨다는 대로사비를 보았다. 군더더기 없이 힘 있고 조형미가 넘치는 아름다운 서체를 보노라니 왠지 현빈님이 생각나는... 이때 테우리님이 "송시열 선생님 사당이 왜 여주에 있어?"라고 물어본다. 앗!... 그.. 그것은요 후다닥 안내판을 스캔한다. 대로사는 세종대왕 능역에 위치한 효종의 영능(寧陵)과 관련 있다. 평소 열리지 않는 홍살문과 사당의 방향이 영릉을 향하고 있다. 어째서일까?
열능의 주인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병자호란 이후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하였다. 소현세자가 선교사나 청인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배우려 노력할 동안, 동생은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복수하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소현세자가 급사한 후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은 북벌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송시열은 효종의 북벌론을 군부국(君父國)인 명에 대한 신자국(臣子國)의 의무라는 복수설치(復讐雪恥)라는 논리로 뒷받침하였다.
선생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의료사고였을 뿐 아니라 사후 시체가 부풀어 관에 넣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송시열은 세종대왕의 영릉(英陵) 좌측이 효종의 능소를 정하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후 선생은 여주에 올 때마다 효종의 능을 바라보며 밤이 새도록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음... 송시열의 사당이 여주에 있는 것은 효종 때문이고 영릉이 세종대왕 묘역에 있는 이유는 천하 명당이기 때문이고 이후로... 숙종, 영조, 정조와 같이 사극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시는 분들이 조선의 후기를 담당하셨으니 ... 아! 송시열 선생님은 선생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여주장, 대로사 바로 앞
그러나 어찌 여주5일장을 지나칠 수 있겠는가? 대로사 앞이 바로 앞이다. 네비 믿지말고 그냥 동네 어르신들께 여쭤보면 되시겠다. (우린 네비따라 가다 뜻밖의 매력만점 여주시내 잘 감상했다.) 조선시대에 수운은 정부의 세곡(稅穀)을 운반하는 수송로로써 중요하게 관리하였다. 이를 위해 용산강에서 충주까지 7개의 관리소를 설치하였는데.(水路轉運所完護別監) 여주의 여강(驪江)은 이중 하나로 충주의 연천(淵遷 ; 金遷), 천령의 이포(梨浦), 양근의 사포(蛇浦), 광주의 광진(廣津, 광나루), 그리고 한강도(度)·용산진이다. 여주에 큰 장이 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여주시사에 따르면 여주 일대가 짐배들과 떼배들이 쉬어가는 나루와 여각이 발달하였다. 한강을 이용한 상선들은 주로 농산물, 임산물을 수송해 가고, 올 때는 소금, 새우젓 등 해산물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여주에서 외지로 수출되는 수출품 중 도자기가 있었다. 지금도 여주는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지로 좋은 도자축제를 개최한다. 여주장에선 도자기를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시장은 여주 한글시장과 여주장이 길게 이어져있었다. 때가 하 수상한지라 오일장은 앞으로 2주간 휴장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시절이 수상하니 500백년 시장도 한산했다.
캬~ 그래 이맛이지!
우리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막걸리 먹기 최적의 식당을 찾았다. 테우리님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할머님들에게 다가가 맛집을 추천을 부탁한다. '그곳에서 막걸리도 마실 수 있나요?' 묻자 맛집에 자신있단 할머님은 잠시 멈칫하셨다. "그.. 그럼 그럼! 술은 다있어 다!" 알려주신 시장 뒷길을 지나 시장 안 빈대떡.. 만두.. 두부.. 식혜...된장..고추장...을 다 파는 집으로 들어갔다.
시장통에 빨간 플라스틱 테이블을 펼쳐주셨다. 기름 넉넉히 부어 바삭하게 구어낸 빈대떡은 녹두 맛이 알알이 살아있었다. 절대 마트에서는 먹을 수 없는 고소한 모두부에묵은지를 곁들어 능서생막걸리를 마셨다. 캬~ 그래 이맛이지.. 균형이 잘 잡힌 고운 막걸리맛이다. 누가 마셔도 괜찮다고 할 시원한 막걸리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강길 4번 코스, 내가 마음대로 이름붙이 여주명당길은 안타까운 이야기로 가득한 길이다. 조선 사람이라면 이 길의 사연에 마음 아프지 않을 이가 있을까?
여주장에서 들이킨 시원한 능서생막걸리와 정성 들여 만든 음식 덕분에 개운하게 여행을 마쳤다. 정말 좋은 걷기 코스다. 무엇보다 막막맴버 재윤과 게스트 뜨란, 테우리 덕분에 즐거웠다. 이 길 추천한다. 막걸어 신선한 막걸리를 맛보시길
* 걷기모임 느리게걷기의 '막걸어 막걸리 프로젝트' 글입니다. 김해, 재문, 재윤이 함께 만듭니다.
에필로그
여주장 가기전 잠시 모 식당에서 들려 능서생막걸리를 시켰다. 한입 머금은 순간 벳어버리고 싶을 만큼, 상한것을 내 놓았다. 병목을 살펴보니 6월 19일에 생산되어 7월 8일까지 유통하는 것이다. 벌써 이틀이나 지난 것이었다. 원래 막걸리는 묵혀먹는 것이라는 주인 말에 웃으며 막걸리를 물리지 않았다. 성격 좋은 멤버들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막걸리를 마셨다. 여주에 실망하지 않기위해 서로 노력한 것이었다. 이 하나가 여주의 전체는 아닐터이니..
부평 막걸리는 하루 600병만 생산한다고 한다. 양조장에서 먼저 나와 유통기한 넘기도 전에 막걸리를 수거해 간다고 한다. 맛과 품질 처음 부평 막거리를 마셨을때 기대하지도 맛에 놀라 칭찬하였다. 사전 정보가 없는 사람도 느끼는 맛이다. 식당 사장님께서 묻지도 않은 부평 막걸리 유통 관리 이야기를 해 주셨다.
오래된 막걸리를 팔면 식당 손님만 잃지 않는다. 지역 막걸리는 소중한 지역의 문화자산이다. 오랜시간을 두고 천천이 쌓이는 명성이다. 사람들을 여주로 부를 관광 콘텐츠가 될 , 로고나 슬로건으로 만들 수 없는 진짜 지역브랜드인 것이다.
보도 여행자들은 방문한 지역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그곳에 머물며 밥도먹고 시장도가고 막걸리도 마신다. 능서생막걸리가 물 좋고 쌀 좋고 땅 좋은 여주의 대표적인 산업이 안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식당의 양심과 양조장의 자부심에게 맡길 문제는 아닌것이다.
경기도 여주 여강길 4코스
세종대왕릉역 - 여주오일장길 (약 11km)
능서 탁주협동조합 능서생막걸리
2021년7월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