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에 관심 없다고 말하는 이는 그 대상에 미친 사람이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건 내가 꼭 그런 부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서른, 서른이라는 단어에 미쳐살았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서른 즈음에>, <서른 살, 비트코인으로 퇴사합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서른’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이면 무엇이든 쉽게 마음을 쏟곤 했다. 나는 서른에 무관심하다 말하는 동시에 서른에 매몰되어 있었다.
미디어가 주입한 서른의 공포 때문이었을까. 서른이 된다고 해서 고작 며칠 전과 달라진 것 하나 없는데 괜스레 싱숭생숭했다. 몸이 아프면 괜히 세포의 노화 때문인 것만 같고 누군가 나이를 소재로 개그를 하면 나 혼자 찔리는 그런 느낌. 어떤 노랫말처럼 ‘아무렇지 않지 않지 않은 않은’ 마음이랄까. 빌어먹을 서른, 이게 별것도 아닌데 자꾸 사람 속을 긁는다.
서른을 기점으로 분명하게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지인들과의 대화 소재다. 사회초년생 시절 함께 밥벌이의 고단함과 회사의 부당함을 토로하곤 했던 이들 중 몇몇은 이제 젊은 팀장이 됐다. 직장에서 제 몫을 하는 것에 급급하던 그들은 이제 다른 이들을 바라봐야 한다. 그게 바로 팀장의 일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과 함께 일하는 팀원이 당최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요즘 애들이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하소연하기도 한다. 여전히 내게 할당된 일 하나 건사하기 급급한 나는, 자신의 업무에 더해 동료의 성과와 회사의 매출까지 고민해야 하는 젊은 팀장들이 대단하게만 보였다.
얼마 전 영화관에서 <스파이더맨>을 보고 나오던 길에도 그들을 생각했다. 선배들이 히어로를 닮았다는 건 아니고 영화 속 명대사가 현실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싶어서다.
‘큰 힘에 큰 책임이 따르는 거면, 큰(높은) 연봉에는 큰 책임이 따르려나?’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답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뭐하세요?’라고 물을 때면 늦은 밤에도 늘 회사에 있다고 말하는, 주말 이틀 중 하루를 전부 업무에 할애하던 선배가 단번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큰 책임을 진데도 높은 연봉이 보장되지 않은 회사가 많다고들 하던데. 연봉협상 후에도 가열차게 일하는 걸 보면 다행히도 선배는 자신이 책임지던 무게만큼의 연봉을 무사히 쟁취한 모양이다.
여러 회사를 오가며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연봉에 책임을 지는 사람들을 보기도 했다. 15년의 짬으로 오류 없는 기계처럼 일을 해치우던 부장님. 팀원들의 답답한 모습을 참지 못하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던 팀장님. 물론 자신이 저지른 실수까지도 은근슬쩍 팀원의 실수로 포장하는 탈출 고수형 임원도 있었지만. (얼마 안 돼 그 태극권 고수형 임원이 사실상 좌천됐다는 소식을 건너건너 들었다.) 역시나 큰 책임 없이 높은 연봉을 받는 건 백두혈통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일까.
애매한 나이만큼이나 애매한 연봉을 받던 과거의 나는 옆자리에 앉은 또래의 사수와 이런 얘기를 시시덕거리며 퇴근시간을 기다리곤 했다.
“선배, 팀장 자리라는 거 너무 힘들어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까요. 저는 팀장 되면 무서울 거 같아요. 평생 사원 대리만 했으면 좋겠다니까요.”
문득 옛 팀장님이 내게 했던 말도 함께 곱씹는다.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저는 책임지라고 파주씨보다 회사에서 돈을 더 많이 주는 거니까.”
그때는 몰랐다. 그게 충분히 멋지고 인자한 어른만이 꺼낼 수 있는 말이라는걸. 서른을 기점으로 달라진 게 또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책임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서른이 성큼 온 것처럼 나도 언제까지나 사원 대리일 수만은 없을 테니. 언젠가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낄 만큼의 연봉 혹은 직급을 맞닥뜨리게 될 테니까. 마음가짐이나마 나름의 준비를 해놓아야겠다는 위기감이 수시로 찾아온다.
새삼 꾸준히 밥벌이를 하려면 지금 같은 속도로 내달려서는 안 된다는 부담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아직도 사원 대리를 벗어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일까. 이미 멀찍이 지나온 서른을 체감하지 못한 탓일까. 다들 헤르미온느처럼 부지런히 살아가는 이 반도에서, 나 혼자만 제 나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덜떨어진 인간처럼 느끼는 순간을 종종 맞닥뜨리곤 한다.
멋진 커리어와 내 소유의 차량. 혼자 살기에 넉넉한 크기의 전세집까지. ‘서른이 되면’ 충분히 손에 쥘 것이라고 믿었던 목표들을 이루지 못한 채로 나이만 먹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누군가 지인A가 청약이 되었다거나 결혼을 한다는, 그게 아니면 고급세단을 장만했다는 식의 배 아픈 소식들이 유난히 잘 들려온다.
괜시리 센치한 마음이 되어 냅다 <서른 즈음에>를 틀었다. 뻔하고 주책맞은 선곡이었다. 서른 즈음이라면서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가사를 내뱉다니. 고작 서른 주제에 곧 죽을 사람처럼 구는 가사가 부담스러워서 이내 소리를 줄였다. 솔직히 말하면 내 서른의 무게가 이 정도까지 무겁지도, 절절하지도 않은데.
아무래도 모든 사람의 서른이 같을 순 없겠지. 나의 서른은 길을 잃지 않았다고, 조금 천천히 가고 있을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덜떨어진 어른처럼 보여도 좋으니 아주 당분간은 죄책감 없이 조금 가벼운 서른으로 살아보자고. 그렇게 다짐했다.
마감도비
김광석의 노래 <서른즈음에> 때문일까요. 20대의 저는 서른이 되면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일종의 공포였죠. 서른이 되면 노랫말처럼 그저 삶의 속절없음을 곱씹게 되는 걸까 두려웠습니다. 서른을 흘려보낸 지 한 달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반은 맞고 맞은 틀리다는 생각을 합니다.
생애주기와 진로 설정이라는 관점에서 삶이 가능성으로만 가득 차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서른이 되고서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자기개발서의 설명과는 달리, 분명 어느 지점에서는 한계가 찾아오더라구요. 사회생활을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참 중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반면에 스스로에게 약간의 노하우가 생겼다는 생각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게 됐습니다. 회식 다음 날 뒤집어진 속과 깨질 거 같은 머리를 싸매고 마감을 해야 했던 날이었는데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컨펌을 요청했더니 “아주 좋은데? 잘했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어리둥절함. 이 또한 서른인 거겠죠.
파주님이 서론에 쓰셨다시피 서른, 잔치는 끝났네요. 더 이상 초대받을 수 없는 나이인 거죠. 물론 남이 열어준 잔치에 국한해서요. 서른은 이제 자기가 잔치를 열어야 하고, 또 열 수 있는 나이가 아닌가 해요. 그런 마음으로 서른 그 다음을 살고 있습니다.
야망백수
저는 종종 우리네 인생이 어떤 에스컬레이터 위에 놓여져있는 것 같단 생각을 하곤 합니다. 양 옆의 난간을 꼭 붙든 채, ‘정석루트’로 굳어진 시간과 경로로 한 층 한 층 올라간다는 점에서요. 에스컬레이터에 머물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한다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요. 서른은…그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탈 수 있는 마지노선처럼 느껴지고요.
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한번 벗어나봤는데요, 계단으로 남들 가는 속도에 맞춰 뛰려니 무릎은 쑤시고 심장은 터질 것 같습니다. 20대에도 이러니 서른이 지나고 나면 더 뒤쳐지겠죠. 이것 참. 세상의 압박과 나의 무능, 둘 중 하나를 골라잡아서 영원히 산꼭대기로 굴려 올려야하는 시지프가 된 기분입니다.
1월엔 주저앉아 숨을 골랐습니다. 중2병을 앓느라고 딱 서른까지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는데(고점에서 팔고 싶은 마음이란…!), 올해가 가고나면 저도 서른이네요. 꼭대기에 오른 롤러코스터가 내리막으로 치닫는 순간의 울렁거림이 싫다고 놀이동산을 통째로 멀리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분명 재밌기도 할 텐데요.
그나저나…'나 혼자만 제 나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덜떨어진 인간처럼 느껴졌다'구요…? 4대보험에 가입되어있고, 지난 에세이에선 부모님 모시고 효도여행도 다녀왔다고 한 양반이?! 파주님의 엄살은...뭐랄까...놀이동산에 울려퍼지는 즐거운 비명처럼 들리는데요. 파주님도 제겐 대단한 헤르미온느랍니다. 파주님을 보면서 서른의 버킷리스트(4대보험, 효도여행)를 만들 정도니깐요. 그러니 앓는 소리는 그쯤 하시고...엽떡이나 한 그릇 하시지요...
아매오
막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을 때 함께 스터디를 하던 분이 생각나요. 그 분의 나이가 서른이었죠. 서른은 '젊은 팀장' 타이틀을 갖는 나이인 동시에 신입사원이 되는 나이이기도 하더라고요. 물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각자에겐 각자의 스테이지가 있는 것이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건 참 대단한 용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평탄치는 않았지만 다행히 원하던 일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한 살 두 살 먹을수록 그때의 그 분에게 더 큰 응원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불쑥 생기곤 하는데요.... 실은 그건 어쩌면 지금의 저 자신을 응원하려는 마음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