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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Jan 09. 2023

바캉스 사전

바캉스 1 : 휴가철

바캉스는 프랑스어로 ‘비운다’는 뜻이다. 휴가를 떠난 뒤 텅 빈 도시의 모습 때문에 휴가철을 바캉스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바캉스 2 : 알리바이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비틀대며 찾아들어간 카페에서 창을 내다보니 역 앞 표지석에 새겨진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생명이 넘실대는 도시 부산. 넘실댄다는 말을 입 안에서 가만히 굴려보다 충동적으로 부산에서 주말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은 어쩌면 넘실대는 생명이 필요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강남에선 아무것도 넘실대지 않으니까.


강남에서 생명은 넘실대는 대신 직각으로 움직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직으로 움직이거나 지하철을 타고 수평으로 움직인다. 매일 아침 사람으로 꽉 찬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할 때마다 나는 지하철이 꼭 무기력을 유통하는 컨베이어 벨트 같단 생각을 한다. 이것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를 향한 불만이라기보단, 뭐랄까, 문명에 대한 불만이다. 그나마 주말이 있어 다행이다. 이렇게 떠나올 수 있으니.


휴가철이라 웃돈을 잔뜩 주고 구한 숙소는 창밖으로 광안리 바다가 한 눈에 보인다. 월급의 크기란 참 절묘해서, 인생의 걱정을 줄이는 데엔 별 도움이 안 되지만 이렇게 가끔씩 오션뷰 호텔에 묵는 사치를 누릴 순 있다. 숙소에 짐을 푼 것만으로도 이미 오늘의 할 일을 모두 해낸 기분이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아무래도 이거였나 보다. 넘실대는 생명과 쾌적한 하얀 방.


사실 모든 여행엔 ‘아, 이걸 위해 여행을 떠났구나!’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촉각을 곤두세우면 두고 온 삶에 무엇을 부족한지 깨닫게 되는 그런 순간이. 이제 막 짐을 풀었을 뿐인데 벌써 결핍을 두 개나 찾아냈으니 이번 여행은 제법 유능한 편이다. 넘실대는 생명과 쾌적한 공간이 적혀있는 분실물 목록을 다른 말로 다시 적는다면 아마 '영혼과 집' 정도일 것이다. 영혼과 집을 잃어버리다니. 그런데 인간이 영혼과 집을 잃는다면 그게 과연 인간인가. 나는 텅 비어있다. 사람들이 바캉스를 떠나는 이유는 비어있음을 숨기기 위한 알리바이가 필요해서인지도 모른다.




바캉스 3 : 공급망

창밖의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어쩌다 영혼과 집을 잃게 되었나를 골몰해 봤다.일을 시작하면서 잃어버리게 된 것은 맞지만, 모든 책임을 일에 돌리기엔 사실 좀 애매하다.


왜냐면, 어느 회사에서 일을 하기로 결정할 때, 삶은 계약서에 적힌 것보다 항상 더 크게 변하기 때문이다. 연봉이 얼마인지 복지는 어떤지 따위를 설명해 주는 정도에서 회사의 책임은 끝난다. 새로운 일터에서 무엇 때문에 고통받고 누구 때문에 웃게 될 것이며 어디에서 낙을 찾게 될지 미리 설명해 주는 인사팀은 없다. 선택에 앞서 그 선택의 손익계산을 완벽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나도 몰랐다. 하고 싶은 일을 쫓아 서울에 가기로 한 것이 결국엔 집을 잃게 만들 줄을. 그놈의 일을 열심히 해보겠다고 잠을 줄이다 마침내는 자고 싶단 생각만 남게 될 줄은. 전부다 내 선택이니 억울할 건 없지만 점점 비어가는 내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조금 서글픈 일이다.


어쩌면 바캉스란 인간이라는 물건을 조립하기 위해 체결된 협정인지도 모른다. 서울에선 물질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거기서 멀리 떨어진 생명이 넘실대는 다른 도시에선 영혼을 담당하기로 한 것이다. 출근과 퇴근, 평일과 주말은 영혼과 물질의 공급망을 돌리는 각각의 태엽이다. 해변엔 바캉스를 떠나온 사람들이 몰려있다.


바캉스 4 : 비워내기

호텔에 한참을 누워있어도 밖에 나갈 마음은 들지 않는다. 이 게으른 휴가를 정당화해줄 비라도 내리면 좋으련만 바다는 여전히 잔잔하다. 바다는 계속 저기 창 밖에 놓아두기로 하고 대신 욕조에 입욕제를 풀었다. 욕조의 물이 짙은 파란색으로 변한다. 바다를 한줌 떠다 놓은 것 같다. 한 줌밖에 안되는 가짜 바다지만 제법 포근하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욕조를 들락거린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모든 생각을 욕조에 녹여낸 다음 그 물마저 흘려보내고 나면 이 짧은 휴가도 끝날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때는 일요일 밤이다. 잠시 떠나있던 탓인지 서울이 조금은 집처럼 느껴진다. 어딘가를 집으로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은 먼저 그곳을 떠난 다음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닐까. 비어있음을 비어있음으로 채우는 얄팍한 눈속임이긴 하지만 적어도 몇 달은 바캉스의 덕을 볼 것이다.


때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과거로 돌아가는 퇴로를 메우려는 듯 거세게 내리는 비. 타닥대는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이사 온 뒤 처음으로 자는 깊은 잠이었다.(2022.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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