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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주 Dec 21. 2022

인생정산

정해지는 것들에 대하여

조금 이르게 올해를 복기했다. 한 해 동안 내가 이뤄낸 성과와 벌어들인 작고 귀여운 수입. 어쭙잖게 들어둔 적금과 애써 잊으려던 투자금 같은 것들을 떠올리자 탄식이 터져나왔다. 나이는 성실히 쌓여가는데 내 것이라곤 하나 없는 지금의 삶에 새삼 안쓰러움을 느껴서다. 또래의 지인들은 집이든 차든 자신의 명의로 된 것들을 두어 개쯤 가져가고 있다던데. 내가 가진 걸 돌아보면 당근 무료나눔도 하지 못할 잡동사니뿐이었다.


내 삶에서 정해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서른이 되면 차를 가져야지, 마흔이 되면 내 명의로 된 20평대 아파트는 가져야지. 정작 ‘00살이 되면’이라고 가정했던 나이가 되었지만 해낸 거라곤 그 나이를 먹은 것뿐. 얼핏 평범해 보이던 목표들이 매주 로또 당첨을 기원하듯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최근 만난 친구가 말했던가. 요즘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시즌에 맞춰 새 차를 구입하는 게 트렌드라며, 학교 앞에 픽업하러 오는 부모의 차가 곧 '아이의 위상'이 된다고. 그 쓴맛 나는 말을 듣고 난 직후 소주가 달게 느껴졌다. 아직 있지도 않은 아이를 위해 분수에 넘치는 차를 할부로 구입해야 할까. 쓸모없이 부정적인 상상력을 키워내는 부류의 인간인 나는 덜컥 겁부터 났다.


물질적인 것에 애써 초연한 척하며 2022년을 다시금 점검했다. 올해 본 영화, 새로 접한 책과 음악들을 더듬었다. 그제서야 일년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제대로 가늠할 수 있었다. 곳간에 남긴 건 좁쌀 한 톨도 없었지만 그렇게까지 최악의 한 해를 보낸 것만은 아니었다. 어설프게나마 디깅을 하며 지금껏 몰랐던 가수의 목소리를 찾아 실컷 듣기도 했고, 삶에 행복이 들이친 순간들도 제법 차곡차곡 쌓아뒀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그이와 한 많은 약속 중 하나는 ‘안 해 본 것 하기’였다. ‘이전까지 경험해 본 적 없는 일’을 행하는 데에는 꽤나 큰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낯선 것에 도전하기란 안정적인 것을 선호하는 사람과 겁이 많은 사람이 만나며 할 수 있는 가장 큰 결심 중 하나였다. 만나는 장소나 저녁 메뉴를 고를 때, 그 사소한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처음의 약속을 되뇌며 안 해 본 것들을 시도하려 애썼다.


안 해 본 일들을 대뜸 시도하려 든 건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30대 중반에 시작 못하는 건  키즈모델 말곤 없다’라는 농담 섞인 짤도 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선택의 폭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수시로 솟는다. 그 공포의 핵심은 정확히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점점 줄어가고 있다는 일종의 체념이다. 지금껏 내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선택한 것들, 그 무수한 선택지들이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그러니 앞으로의 내 삶은 이미 어느 정도 정해져버린 게 아닐까 하는.


올해 본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주인공 에블린 또한 같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인생에서 구렁텅이에 빠진 순간, 에블린은 과거의 한 장면을 반복하며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결정 때문에 지금의 이 거지발싸개 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며.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한 자신을 가정하며 다른 삶(멀티버스)을 꿈꾼다. 그리곤 알게 된다. 지금의 에블린이 무수히 많은 멀티버스의 에블리 중 가장 최악의 에블린임을.


아마 그 순간 영화관에서 눈물이 터져나왔던 것 같다. 에블린이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그의 삶에서 나의 현재 혹은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다니는 직장, 내가 향유하는 모든 것들… 결국 지금의 내 삶은 지난날의 내가 선택한 것들의 총합이며, 멀티버스의 무수한 파주 중 분명 최고의 파주일 확률은 아주 희박할 것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 모습이 결코 최악의 파주는 아닐 것임을, 나의 삶이 절대로 구렁텅이에 빠져있지 않음을 믿는다. 영화 속 에블린이 그랬듯. 지금의 불만족스러운 삶에 굴복하거나 미래를 일찌감치 체념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지금의 삶을 포용하며 있는 힘껏 다정하게 대하자고, 정해지는 것들에 대해 미워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 다짐이야말로 인생정산을 통해 돌려받은 환급금이란 생각이 든다.


무수한 선택지를 밟고 성실하게 나이 먹으며 지나온 길. 어차피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계속 가야 한다면 밀린 후회와 질책은 먼 훗날에 해도 늦지 않으리. 꼭 그런 확신이 든다. 잠시 짬을 내 연말정산을 하려던 것뿐인데 인생을 정산해 버리고야 말았다. 서랍 한 칸을 정리하려다가 대청소를 해버린 듯 가뿐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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