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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주 Nov 24. 2022

AI와 밥그릇 엎어치기 한판

*풀칠 112호 표지는 인공지능 이미지 생성 툴, 'DALL E 2'를 사용해 작업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입력한 명령어 : 사람과 인공지능이 밥그릇을 사이에 두고 싸우고 있다”


“마케팅 문구, AI가 대신해드려요.”


얼마 전 메일함에 매혹적인 제목의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마침 카피 한 줄 쓸 때마다 머리를 쥐어짜내느라 애꿎게 머리카락을 뜯어내던 참이었는데.  견인성 탈모의 문턱에서 만난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메일 속 링크를 클릭해 들어가 보니 ‘최신 광고 트렌드를 학습한 AI가 직접 광고 카피를 작성해 줍니다’라는 소개문구가 보였다. 포함됐으면 하는 키워드 몇 개와 내가 원하는 스타일 같은 걸 입력하면 AI가 자동으로 SNS 광고문구, 세일즈 이메일, 제목까지 그 목적에 맞는 문구를 뽑아준다고 했다.


간단한 가이드에 따라 몇 개의 키워드를 입력했다. 손흥민, 축구, 맥주, 이벤트. 공란에 대강 떠오르는 단어를 입력하면서 한편으로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싶었다. 이럴 시간에 한 자라도 더 쓰는 게 현명하고 성실한 직장인의 태도일 텐데. 잔머리 원툴의 직장인인 나는 의심 9할, 기대 1할의 마음으로 글쓰기 인공지능을 작동시켰다.


충분히 실망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나의 기대보다 글쓰기 인공지능의 능력은 출중했다. 자동 생성을 누른 뒤 나타난 문장은 두서없이 나열한 키워드를 이리저리 잘 뒤섞어 만든 그럴듯한 SNS용 문구였다. 더 놀라운 건 자동 생성을 누를 때마다 새로운 카피를 하나씩 단 0.5초 만에 만들어낸다는 거였다. 이까짓 카피 몇 줄 뽑아내는 일이야 새로고침 할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듯이.


글쓰기 인공지능이 꽤 잘 작동한다는 걸 확인하자 이것저것 시도해 보기 시작했다. 간단한 SNS용 문구뿐만 아니라 구글 검색 광고, 당근에 올릴 글과 내일까지 써내야 할 보도자료까지. 온갖 종류의 글에도 글쓰기 인공지능이 제법 잘 작동했다. 


‘S급 쳇 베이커 LP 이건 못 참지’, ‘떡볶이 많이 먹으면 빨리 죽는 이유’…. 한껏 신이 나 쓸 곳도 마땅치 않은 카피를 잔뜩 만들어대다가, 나보다도 더 Z세대스러운 바닥글을 뽑아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문득 두려움이 엄습했다.


자율주행 자동차의 상용화를 앞두고 일자리 불안을 토로하는 운전기사나 그림 그리는 AI '달리2'로 인해 위기감을 토로하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의 모습이 꼭 이랬을까. 직장인에게 무서운 건 귀신이나 유령 따위가 아니라 나의 밥그릇을 위협하는 존재라는 것. 그것도 나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AI라는 걸 자각하자 알 수 없는 공포가 솟았다.


인공지능이 내 밥그릇을 앗아가는 건 먼 미래의 일이라고 믿어왔건만. 대책 없던 낙관은 순식간에 필요 이상의 두려움을 가져왔다. 어디서 읽었던가. 일본에서는 인공지능이 쓴 소설로 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던데. 나의 어설픈 작문 실력으로는 글쓰기 인공지능에게 밥그릇을 뺏기는 게 아닐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만간 그럴 날이 도래하지는 않을까. 누군가 21세기판 *러다이트 운동을 벌인다고 나서면, 기꺼이 동조할 마음까지도 슬며시 솟아났다.


*러다이트 운동 : 19세기 초 영국에서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 섬유 기계를 파괴하는 등 신기술에 반대했던 사회운동


‘10배 빠른 글쓰기. 이제 글쓰기 고민은 그만!’ 메인 페이지에 있는 저 카피도 분명 글쓰기 인공지능의 작품이겠지. 그 기똥찬 슬로건 앞에서 고민이 깊어졌다. 5초면 충분하다는 글쓰기 인공지능 앞에서 5분을 내리 고민하며 겨우 한 줄을 쓰고 마는 나의 능력이 몹시도 미천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괜한 허탈감에 무의미하게 문장 생성을 반복해서 눌러댔고, 그럴 때마다 인공지능은 점점 더 완성도 높은 문장을 만들어냈다. 마치 인간의 질투가 나의 힘이라는 듯. 인공지능의 무능함을 증명하려 애쓸수록 인공지능은 조금씩 유능해졌다.


그 순간 나는 내가 할 일을 알고 있었다. 내가 당장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건 글쓰기 인공지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단체방에 자리비움을 고지하곤 화장실로 뛰쳐들어가 뜨거운 물로 온몸을 씻어냈다. 피부가 따갑다고 체감될 정도의 고온이었다. 온갖 잡념과 두려움이 온수와 함께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흘렀을까. 글쓰기 인공지능이 수 백 개의 카피를 써냈을 만한 시간을 샤워로 할애한 뒤 한껏 가뿐해진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덜 말린 머리를 급하게 닦아내면서, 바나나맛 우유를 들이키고 난 뒤 키보드를 무작정 두들겼다.


아까는 한참을 고민해도 나오지 않던 문장들이 얇은 귤껍질을 까듯 술술 흘러나왔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몇 개의 문장을 써냈다. 아까 글쓰기 인공지능이 생성했던 문장과 나란히 두어 비교해봤다. 아무래도 나의 취향이 반영된 편파판정일 게 뻔했지만. 역시나 내가 쓴 쪽이 약간은 더 나아 보였다. 


누구도 패하지 않았지만 혼자서 승리감에 도취된 채 남은 우유를 마저 들이켰다. 글쓰기 인공지능에게 한껏 반했다가 갑자기 열패감을 느끼고 도망치고, 다시 자긍심을 되찾고... 허튼 시간을 낭비하느라 그날 해야 될 일이 잔뜩 지체된 채였다. 따지고 보면 패배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지금은 글쓰기 인공지능에게 외주를 주거나 열등감 같은 걸 느끼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먼 미래를 걱정하며 조급해 할수록 퇴근만 늦어질 뿐. 언젠간 인공지능이 내 밥그릇을 빼앗으러 올 게 분명하지만. 이른 퇴근에 하등 도움되지 않을 막연한 불안감은 묻어둔 채. 오늘만큼은,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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