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버는 것보다 쓴 돈이 더 많다고…?’
올해 초 연말정산 결과를 받아든 날, 가계부 앱으로부터 ‘월급이 통장을 스쳐갔지만 최대 환급을 받았어요!’라며 조롱 섞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하긴 몇 달 전에는 소비가 월급을 넘어섰다며 가계부 앱이 혼을 내기도 했는데. 한 해 동안 폭주하듯 돈을 탕진한 모양이다. 문제는 도대체 뭘 샀는지도 모르겠다는 거다.
세상에, 연간 수익보다 소비가 더 많다면 나는 지난해를 어떻게 살아낸 것일까. 당근이라도 해서 뭐라도 메꿔야 할까. 그제서야 위기감을 느끼곤 방을 뒤졌다. 서랍 구석구석에는 도대체 왜 샀는지 모를 온갖 잡동사니들이 가득했다.
챙겨 먹지 않는 영양제, 사용법을 익히지 못한 저주파 마사지기, 한 번도 듣지 않은 바이닐, 카페에서 보고 냅다 손민수 해 온 버섯 모양의 전구. 포장만 뜯긴 채로 쓰이지 않는 물건들이 지난 나의 소비를 증명하고 있었다. 냉장고 야채칸에는 야식을 대신한다는 명목으로 통 크게 10개 묶음을 구매한 메밀소바 밀키트가 웅크리고 있었다. 유통기한이 다 지날 때까지 고작 하나 먹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버려야 했다. 딱딱하게 굳은 면을 음식물 쓰레기봉투 안에 넣으며 내가 하는 소비를 되짚었다.
나의 소비를 요목조목 뜯어보면 물성보다는 기분에 집착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 물건의 쓰임새보다는 그 물건을 구입함으로써 생기는 즐거움을 사는 거다. 어쩌면 나의 소비는 물건의 효용을 누리려는 게 아니라 퇴근 후 집 앞에 가지런히 쌓인 택배박스를 보는 기쁨을 사는 행위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얕은 구매욕도 참지 못하는 데다 지독한 맥시멀리스트 성향까지 갖추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낭비에 최적화된 환장의 콜라보였다. 매번 소비를 줄이자고 스스에게 다짐하지만 그건 ‘오늘부터 술 끊는다’는 주당의 허풍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소비는 계속되어야 한다. 밥벌이하는 처지에 그나마 위안을 주는 건 소비의 자유니까. 숨 쉬는 것 빼고 먹고 하는 일이 모두 돈이 드는 세상. 맛있는 하이볼 한 잔 마시는 것도 시간이 아깝지 않은 영화 한 편을 보는 것도 죄다 돈이 든다. 소비는 숙명이고 그중에서도 아깝지 않은 소비는 미래의 나를 위한 적금인 셈이다. 그러니 지금의 소비는 일종의 '적극적인 취향의 확장'이라며 변명에 가까운 결론을 내렸다.
2.
“서른다섯이 넘으면 메탈 음악을 들을 수 없다.”
몇 년 전 라디오에 출연한 패널이 스쳐가듯 뱉은 말을 나는 일종의 계시처럼 믿고 살았다. 서른다섯이 되면 취향이 타고 남은 초처럼 단단히 굳어져서 계속 서른넷 마지막 밤의 모습인 채로 백 살까지 살게 될 거라고. 만으로 서른다섯이 되는 날의 디데이까지 적어가며 애써 취향을 늘리려 필사적인 시도도 해봤지만, 메탈에 좀처럼 애정을 붙일 수 없었다. 되려 우울한 기분을 조금 더 우울하게 만드는 포크음악이 내 취향임을 확신하게 만들 뿐이었다.
메탈에 정붙이는 일은 일찌감치 포기한 채 다른 것들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평소 즐기지 않는 장르의 킬링타임 영화를 예매한다거나 질색하던 음식에 다시 도전한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애매한 사이의 지인과 술자리 약속을 잡거나… 물론 그중 대부분은 소비라기보단 낭비라는 기분만을 남길뿐이었다.
3.
오래도록 품어온 이 믿음(서른다섯이 넘으면 메탈을 들을 수 없다)을 깬 건 바로 부모님이다. 타향살이를 하느라 두어 달에 한 번 꼴로 보게 되는 부모님은 쑥쑥 자라는 아이처럼 볼 때마다 다른 모습이 된다. 갱년기를 지난 부모님은 더이상 내가 아는 부모님이 아니다. 내가 아는 존재는 서너 달이면 사라지고, 매번 조금 더 유쾌하고 귀여운 부부가 된다.
예컨대 느끼한 거라면 질색하며 한식을 줄곧 고집하던 엄마의 최애 메뉴는 이제 크림 파스타다. 그것도 치즈가 듬뿍 올라간 것어야 한다. 게다가 꼭 본인 몫의 메뉴를 주문하고 챙겨두는데, 맛있는 것을 권해도 자신과 가장 먼 쪽으로 그릇을 밀던 엄마가 달라진 거다. 늘 음식을 나누어주기 바쁘던 엄마는 사라지고 자신의 밥그릇을 챙길 줄 아는 인숙이 됐다. 나는 이 모습이 낯설고도 반갑다.
부모님에게도 취향이 생겼다는 것.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인숙과 정표가 자신만의 취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게 최근 내가 누린 가장 큰 기쁨이다. 그리하여 내가 요즘 자주 찾는 나의 보장된 행복은 부모님을 위한 소비다. 인숙이 알게 된 동네맛집을 함께 손잡고 가는 것. 집에 가는 길에 정표가 좋아하는 흑당버블티를 하나 챙겨들고 들어가는 것.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이 좋아하는 걸 손수 하나하나 짚어가는 게 내게는 그 어떤 성취보다도 큰 기쁨을 가져다준다.
이번 여름휴가도 사실 그 연장선에 있었다. 속초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숙과 정표가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음식을 섭렵했다. 네이버지도에 난잡하게 찍힌 즐겨찾기의 흔적들은 나의 이들을 위한 노력의 증표이기도 하다. 서른다섯의 곱절 가까이 되어가는 인숙과 정표는 자신들의 취향을 마음껏 드러내고 늘려가고 있다.
짧고 고된 여행이 끝났다. 대전으로 향하는 버스 꽁무니를 향해 손을 흔들며 생각했다. 나는 이 귀여운 존재들과 자주 함께이고 싶다고. 이 사랑스러운 부부의 취향을 양껏 늘려주고 싶다고. 부모님을 오래도록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고. 그제서야 좋아하는 이를 위해 쓰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소비라는 확신이 섰다.
4.
먼 길을 돌아 이제서야 돈을 제대로 쓰는 방법을 알게 됐다. ‘오늘부터 소비를 끊는다’는 허언을 내뱉는 대신 돈을 잘 쓰겠다는 결심을 한다. 냉장고나 서랍 구석탱이에 처박힐 물건이 아니라 지금의 기분을 북돋는 소비를 할 거라고. 힘들게 번 내 돈, 제대로 쓰겠다고.
오늘은 좋아하는 밴드의 LP를 주문했다. 그들이 오래도록 음악을 했으면 하는 응원을 보내기 위한 소비였다. 내일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여행에 적지 않은 돈을 쓸 계획이다. 세상 가장 귀여운 부부가 이번에도 원 없이 행복한 표정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죄책감이 사라진 덕분일까. 이전과 통장 잔고가 새어가는 속도는 여전하지만, 이전과는 사뭇 다른 가뿐한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