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도저히 못 해먹겠어서 찾아오셨다고요.
그래, 도저히 못 해먹겠어서 찾아오셨다고요. 그런 생각은 얼마나 자주 드시죠? 한 달에 한 번 정도…최근엔 조금 더 자주 드는 것 같고…그런데 한번 하기 시작하면 그날은 멈출 수가 없다라…그럴 수 있죠. 원래 ‘못 해먹겠네’란 생각이 한번 들기 시작하면 쉬이 진정이 되는 게 아니거든요. 구역질처럼요.
특효약은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삶이란 놈이 원래 그런 건지, 아니면 우리 몸이 원래 그런 건진 몰라도 살다 보면 어떻게든 탈이 나게 되어있나 봐요. 그래도 너무 울적해하진 맙시다. 점심시간이 이제 막 시작됐잖아요. 일 생각은 잠깐 내려놓고 망중한을 즐깁시다. 자, 이리 창가로 와보세요. 식당을 향해 가는 직장인들의 행진을 봅시다. 저들 모두가 나름대로의 못 해먹겠는 이유들이 있을 거예요. 제가 아는 사람 얘기 하나를 들려드리죠.
1. 너무 유능한 직장인의 이야기
옛날에 어떤 직장인이 살았습니다. 이 직장인은 배짱이 보다는 개미에 훨씬 더 가까운 성격이었습니다. 아주 부지런한 사람이었단 말이죠. 공부도 열심히 했고, 저축도 열심히, 일도 당연히 열심히 했습니다. 직장인에게 직업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루고 싶었던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꿈이란 놈은 배신을 잘합니다. 아니, 회사가 배신을 잘하는 걸까요? 아니면 직무가?
아무튼, 이 직장인의 직무를 그대로 공개하기는 좀 그렇고, 적당히 바꿔치기를 좀 해서 <에디터>라고 해두겠습니다. 직장인은 이 <에디터>라는 이름이 굉장히 만족스러웠어요. 정보를 편집해서 글로 엮어내는 게 재밌었거든요.
직장인이 에디터로 일한 지 세 달 정도 되었을까, 그의 상사가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00씨는 텍스트를 잘 다루네요. 광고성 문자 메시지를 한번 써보면 어때요?" 팀에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하고,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직장인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 일을 맡습니다. 그런데 이 광고성 문자 메시지가 대박이 난 겁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클릭을 했죠.
그다음 날, 상사는 직장인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00씨 덕분에 많은 고객들이 문자 메시지를 열어봤는데, 상세페이지가 별로라서 그런지 매출은 안 나왔네요. 상세페이지를 한번 써보면 어때요?" 직장인은 이번에도 까짓것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일을 덥석 맡았죠. 워낙에 뭐든 열심히 하는 성격이다 보니 상세페이지에도 공을 많이 들였고, 이번에도 대박이 났습니다. 상사는 직장인이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이메일, 디스플레이 광고, 영상 기획, 옥외 광고, 팝업 스토어, 현장 세일즈, 커뮤니티 운영 같은 일들도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해치우면서 직장인은 회사 안에서 점점 더 중요한 사람이 되어갔고요. 힘은 들었지만 보람찬 날들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교 모임에서 만난 누군가가 직장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하세요? 직장인은 에디터라고 대답하려다가 순간 멈칫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에디터가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든 거죠. ‘내가 에디터일까?’ ‘이직을 한다면 에디터로 할 수 있을까?’ ‘회사에다가 에디터로만 일하고 싶다고 한다면 나를 쓸모없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한번 시작된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고민을 과식한 탓인지 직장인은 그만 입맛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며칠 뒤, 영 기운이 없어 보이는 직장인이 걱정이 된 상사는 그를 불러내어 식사를 한 끼 대접하며 물어보죠. “00씨, 요즘 무슨 일 있나요?” 직장인은 대답했습니다. “아, 아닙니다. 요즘은 통 입맛이 없네요”
그러고 보니 식사는 하셨나요. 아, 입맛이 없으시다고요. 그럴 수 있죠. 제 경험상, 일을 못 해먹겠을 때는 어쩐 일인지 밥도 덩달아 챙기기가 어렵더라고요. 점심엔 회사 주변의 건물 그늘이나 공원을 배회하면서 차오르는 독기를 빼느라 밥을 거르고, 퇴근 후에도 집까지 데려온 업무들과 씨름하다 보면 밥을 해 먹을 시간을 내기란 참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럼 제가 혹시 커피를 한 잔 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좋습니다. 그런데 혹시 커피를 못 드시는 건 아니시겠죠. 예전엔 이런 일이 있었거든요…
2. 너무 착한 팀장과 팀원의 이야기
이번엔 어떤 팀장과 팀원의 이야기입니다. 둘 다 정말로 착한 사람들이었어요.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폭력에 진심으로 반대하며, 자연과 교감할 줄 알고, 자기보다 남을 먼저 챙기는 호감 가는 사람들이었죠. 둘은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들이었어요. 딱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팀원은 커피를 못 마시고, 팀장은 커피를 아주 좋아한다는 점이었죠.
팀장은 팀원과 진심으로 잘 지내고 싶었습니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 같은 나라, 같은 회사, 같은 팀에 속하게 된 경이로운 우연을 소중히 여긴다는 마음을 표현해야겠다 싶었죠. 그래서 팀원에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카페에서 포장해 온 커피를 한 잔 선물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팀원은, 앞서 말했다시피 커피를 못 마십니다, 한 잔만 마셔도 일주일 동안 속이 쓰리고 두통이 올라오고 심장이 빨리 뛰는 체질이에요. 커피를 선물 받은 팀원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약을 바라보며 고민을 시작합니다. '아, 이걸 어쩌지. 분명 날 생각해서 사다 주신 걸 텐데. 그냥 못 마신다고 솔직히 얘기할까, 그런데 그럼 무안해하실텐데. 그래. 일단 받고, 딱 한 모금만 마시자. 그 정도는 괜찮을 거야. 나를 위해 노력해 주셨으니까 나도 약간은 노력해야 하지 않겠어?' 팀원은 커피를 받아서 홀짝 한 모금 마시고, 팀장을 향해 수줍게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팀장과 팀원은 모두 서로를 향한 자신의 노력에 뿌듯함을 느끼며 그날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무래도 회사인 만큼 회의가 없을 순 없겠죠. 팀장과 팀원은 논의 끝에 서로 의견이 갈리는 사안이 있단 걸 깨달았습니다. 워낙에 착한 사람들이라서 서로 예의 바르게 의견을 주고받았고, 각자의 의견이 모두 일리가 있다는 데 동의했고, 다음 회의 전까지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결론을 냈죠. 그렇게 회의를 마치고, 팀장은 잠시 환기도 시킬 겸 커피를 사러 가면서 생각했습니다. ‘흠. 내가 어제 자기 생각해서 커피도 사다 줬는데 내 의견에 하나하나 반박을 하네. 물론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걸 알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서운한 마음이 약간은 드는걸.’
한편 팀원도 자리에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자기 무안할까 봐 마시지도 못하는 커피 꾹 참고 마셨는데, 내 의견을 이해하기 위해서 커피 한 모금 정도의 노력은 해주셔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이거랑 그건 상관없다는 걸 알지만, 왠지 모르게 서운한걸’
둘 다 워낙에 착한 사람들이었기에 이런 속마음을 굳이 겉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회의가 열릴 때마다 둘은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난 다음, 둘은 서로를 생각하기만 해도 마음이 왠지 모르게 답답해지는 사이가 되어버립니다. 이제 둘은 출근길에 서로의 얼굴을 떠올리며, 혼자만 들을 수 있게 읊조립니다. “아, 못 해먹겠네.”
다행히 제가 드린 커피는 거의 다 드셨군요. 저 불쌍한 팀장과 팀원 사이에 일어난 일이 우리에겐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도 괜찮겠죠? 좋습니다. 이제 점심시간도 거의 끝나가고 있고요.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떠나고 싶지 않으신 것 같네요. 휴게시간을 조금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려나요. 이해합니다. 그럼 남은 커피를 다 마실 동안에 끝낼 수 있는 짧은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죠. 여길 찾는 여타의 직장인들처럼, 아주아주 바빴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3. 너무 바쁜 직장인의 이야기
옛날에, 엄청나게 바쁜 직장인이 살았습니다. 일은 잘할 때도 있었고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주식시장도 오를 때가 있고 내릴 때가 있잖아요. 사람도 비슷한 거죠.
여하튼, 이 직장인은 아주 크고 오래 걸리는 프로젝트를 끝내고, 드디어 집에 갑니다. 집에 가는 길에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신호음이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울렸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더군요. 걱정이 된 직장인은 한달음에 달려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애인은 어디에도 없더군요. 직장인은 밤새 원인을 분석했지만 답을 찾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았고, 다시 출근을 했죠. 아침에 아마 중요한 회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회의에선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겨났고, 직장인은 다시 한번 그 프로젝트에 뛰어들게 됩니다. 긴 시간이 지나고, 그 프로젝트도 우여곡절 끝에 종료가 됩니다. 마침내 여유가 생긴 직장인은 오랜만에 본가에 가보기로 하죠. 그런데 막상 서울역에 갔더니, 아무리 기억해 내려고 애써도 본가가 어디인지 떠오르지 않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직장인은 그냥 플랫폼에 있는 패스트푸드점 여기저기를 기웃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가서, 그냥 집에 돌아갔습니다. 맥주를 한 잔 먹고, 잠에 들었죠. 여태껏 해왔던 프로젝트만큼이나 긴 잠이었습니다.
다음 날 직장인은 지각을 했습니다. 계획한 시간에 못 일어났다는 사실이 짜증 나는 건지, 혼날 생각에 짜증이 나는 건지 헷갈리는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다행히 크게 혼나진 않았네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상사가 그를 회의실로 불러서 새로운 프로젝트 설명을 해줍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여태껏 해온 모든 프로젝트를 다 합친 것보다도 더 큰 프로젝트입니다. 직장인은 잠시 생각합니다. '안 할 이유가 있나? 애인은 사라졌고, 고향은 잊었지. 하지만 내겐 아직 시간이 있어.' 직장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열심히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는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이야기 속 직장인이 어느 순간 “못 해먹겠네”란 말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약속할 미래도 없고 돌아갈 과거도 없는, 쪼개지지 않은 시간을 누리는 게 그럭저럭 나쁘지 않아 보이시나요? 모든 게 너무 복잡한 요즘엔 쪼개지지 않는 시간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누구나 갖고 있기 마련이잖아요.
하지만 우리의 점심시간은 이제 정말 끝을 향해 가고 있네요. 그만 돌아가시죠. 저도 제 자리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월급날까지도 증세가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 다시 뵙는 걸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