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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Dec 17. 2021

수목원으로부터


나는 늘 점심시간이 되기가 무섭게 짐을 싼다. 점심시간마다 백팩을 싸 들고 사라지는 신입은 어쩌면 조금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11시 50분부터 결연하게 짐을 싼다. 어떤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이. 출근한 지 한 달째, 이제는 ‘동료들이 00님, 같이 밥 드실래요?’라고 물어오는 일도 없다.


 


일부러 동료들과의 식사를 피해야겠다고 맘을 먹기라도 한 건 아니다. 더 중요한 일을 찾았을 뿐이다. 첫 출근하기 전날, 혹시라도 점심 메뉴를 고르게 될 일이 있을까 지도로 회사 근처를 살펴보다가 회사 바로 옆에 수목원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때 마침 날씨가 좋은 가을이었으므로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날, 공교롭게도 팀원들은 전부 외근이거나 휴가였다. 첫 출근 날 혼자 밥을 먹게 된 나는 전날 본 지도를 떠올렸고 김밥을 한 줄 사서 수목원에 갔다.


 


그 다음 날 부터 난 나는 회사에 가기 위해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수목원에 가기 위해 출근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물론 월급을 주는 회사에 대한 배신이겠지만, 나는 수목원에 가기 위해서라면 그만한 배신 쯤이야 몇번이라도 했을 것이다. 수목원에서 대체 무엇을 봤길래 그러느냐고? 그것은...일종의 수수께끼였다. 갑자기 삶에 나타나, 그것을 풀어내기 전엔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인생을 진전시킬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 그런 종류의 수수께끼.




까짓 수목원에 수수께끼랄게 무에 있다고 그리 호들갑이냐고 면박을 주고 싶은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을 위해 오늘은 수수께끼까지 가는 짧은 여행 프로그램을 준비했다.(나는 늘 가이드가 되고 싶어했었다.) 수목원으로 떠날 준비는 되었는지? 대체로 편안한 여행이겠지만, 예상치 못한 장소가 등장할 수도 있다.







자, 좋다. 수목원 입구까지 가는 길엔 산책로가 나 있다. 일렬로 서 있는 잘생긴 침엽수들 아래로 노란색의 폭신한 아스콘이 깔려있다. 산책로엔 눈치 볼 상사가 없어 아무 때나 나와 담배를 피워도 상관없는 어른들이 하루 종일 모여있다. 혹시나 상사를 마주치게 될 지도 모르니 서둘러 산책로를 빠져나가자. 수목원의 쪽문을 통과해 야트막한 오르막을 오르면 세갈래 길이 나온다. 아직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건 아니지만 오르막 때문인지 더 이상 번잡스럽진 않다. 좌측의 길은 상수리나무숲으로, 우측의 길은 굴참나무숲으로 향하는 길이다. 양쪽 숲속엔 형광색 운동복을 차려입은 초로의 남녀가 숲을 부지런히 걸어 다니고 있다. 아마 그들은 동틀 무렵부터 지금까지 줄곧 걷고 있었으리라. 가운데 길엔 유혹하듯 관리가 잘 된 깔끔한 화장실과 그늘막, 나무 테이블과 벤치가 동료들과 잠깐의 소풍을 즐기려는 회사원들을 유혹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수목원에서 발견한 수수께끼는, 당연하게도 보다 깊은 곳에 가야 만날 수 있다. 혹시 화장실을 다녀와야 한다면 지금 다녀오시길. 그러나 서둘러야한다. 점심시간은 이제 56분밖에 남지 않았다!




가운데 난 길은 버드나무숲 안으로 나있다. 버드나무는 물가에서 잘 자라는 나무다. 발목에 힘을 실어 내리막길을 달리고 나면 작은 개울이 나온다. 징검다리를 건너고 뒤를 돌아보자. 이제 형광색 등산복도 흰 셔츠를 입은 중년도 보이지 않는다. 작은 언덕을 하나 넘었을 뿐인데 아주 멀리 온 것 같다. 작은 푯말이 있다. 푯말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습지원. 늘 무언가를 머금고 있는 이 단어는 얼마나 신비롭게 들리는지. 지나쳐온 숲들은 습지원을 동그랗게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저기, 푯말 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나의 수수께끼가 서 있다.




그것은 풀과 나무가 가득 찬 이 공간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탑이라고 해야할지, 계단이라고 해야할지 애매한, 자주색과 초록색 페인트로 어설프게 나무 흉내를 낸, 적어도 7-8미터 정도는 되어 보이는 강철로 만들어진 나선형의 구조물. 하지만 단순히 그 구조물의 크기와 재료가 이질적이란 이유만으로 내게 그토록 중요한 수수께끼가 된 것은 아니다. 내가 그것을 수수께끼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전에 내가 전혀 다른 공간에서 그것과 거의 흡사한 것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강렬한 데자뷔가 나를 데려간 곳은 리스본이었다. 그래, 리스본, 포르투갈의 수도. 눈부신 태양 아래 흰 벽과 분홍색의 지붕이 반짝이는, 바다로 느껴질 만큼 큰 강가에 언덕이 겹치고 겹쳐져 만들어진 미로 같은 도시.














혹시...수목원에 수수께끼가 어쩌고 하더니, 갑자기 무슨 놈의 포르투갈이냐는 생각을 하고 계신지. 그렇다면 당신은 정상이다. 이래서 예상치 못한 여행이 있을 수 있다고 얘기했던 거다. 그러나 저 나선형 계단이 수수께끼인 이유를 설명하려면 반드시 리스본에 가야만 한다. 다행히 아직 점심시간은 꽤 많이 남아있다.




내가 리스본으로 떠났던 이야길 하려면 2년쯤 전에 감행했던 내 인생 최대의 일탈의 기억을 되살려야만 한다. 그러고 보니 그때 다니던 회사도 이 근처였다. 위치만 비슷한게 아니다. 규모도 비슷했고, 내가 맡은 업무도 비슷했으며, 심지어 탕비실에 놓인 간식의 구성까지 비슷했다. 여하튼, 2년 전의 나는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지 반 년쯤 지났을 때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다. 평생 이 재미없는 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재미없는 일을 하다 배가 나오고 병에 걸려 누구의 존경도 얻지 못한 채 죽을 것이란 악몽에 시달렸으며, 일을 하는 동안엔 인생을 권태와 훼손으로 채우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괴로웠다.


 


비탄에 빠져 있는 이들 중 특히 구제불능인 이들이 대게 그렇듯이, 나는 해결책을 책에서 찾아보려고 했다. 어느 날 퇴근 후 들린 중고서점 방금 팔고 간 책 코너에서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책을 본 나는 그 자리에서 첫 장을 펼쳐 조금 읽어보았는데, 즉시 그 내용에 매혹되고 말았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은 출근길에 나는 와중에 우연히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책을 읽게 되었는데, 글쎄 그 책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이 비 오는 날 다리 위에 서 있던 여자가 이마에 쓴 전화번호 때문에 충동적으로 직장을 때려치우고는 야간열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떠나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이거야말로 내가 찾던 이야기이며 모든 퇴사 중 가장 탁월한 이미지라고 느꼈다. 나는 그 이야기가 일종의 계시라고 받아들였다. 즉시 주인공을 쫓아 리스본에 가야 하며 그러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란 뭐 그런 계시. 권태에 살짝 돌아버린데다가 아직 젊다는 오만 가득 차 있던 나는 계시를 받아들여 바로 다음 날 비행기 표를 예매했고, 보름 뒤엔 퇴사를 했다. 그렇게 나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리스본으로 향했다. 야간열차 대신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탄 다음, 야간 버스를 13시간 동안 타고서.


 


리스본에 도착한 날. 나는 일단 무언가 중요한 걸 맡겨놓은 것처럼 무작정 찾아온 이 낯선 도시를 높은 곳에서 일단 한번 봐야겠다 싶어 호스텔 직원에게 전망을 볼 만한 곳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가 추천해준 곳이 산타후스타 엘리베이터였다. 리스본은 언덕이 많아서 엘리베이터가 동네와 동네를 이어주는 대중교통이라고 한다. 나는 엘리베이터 중 가장 유명하고, 규모가 크며, 관광객 용인 산타 후스타 엘리베이터 위에 있는 전망대에 가보기로 했다.


 


구글맵을 켰다. 전망대를 검색했는데 숙소 근처에 명소 표시가 찍혀있었다. 산타 후스타 엘레베이터(전망대). 전망대면 전망대고, 엘레베이터면 엘레베이터지, 엘레베이터(전망대)는 뭐란 말인가. 검색창에 물어봤다. 아하, 리스본은 언덕이 많아서 엘리베이터가 동네와 동네를 이어주는 대중교통이라고 한다. 그중 제일 유명하고, 또 규모가 크고, 관광객 용인 산타 후스타 엘리베이터는 저 유명한 에펠의 조수가 설계한 건축물이며, 심지어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건축물 1000이란 책에도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엘리베이터만큼 빠르고 편리하게 우리를 상승시켜주는 것이 또 있을까. 엘리베이터 덕분에 삽시간에 도착한 어느 언덕의 꼭대기엔 수목원에 있는 것과 똑같은 나선형 계단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탄 덕분에 힘이 남아있던 나는 별로 지치지도 않고 계단을 올랐다. 전망대에서 본 리스본은 아름다웠다. 나는 거기서 나를 슈퍼스타로 만들어 줄 야심찬 계획들을 세웠었다.


 


하지만 그것은 벌써 2년 전 이야기고, 내가 그 일탈에서 돌아온 지도 어느새 1년 하고도 9개월이 지났다. 1년 9개월 동안 나는 앞의 3개월 동안 세운 계획을 죄다 말아먹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아마 몰랐더라면 더 좋았을 만한 통찰을 몇가지 깨닫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인생은 내가 계획한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살아지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란 것. 또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행복하다는 말은, 어쩌면 마케팅메세지로 활용되는 말랑말랑한 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 누군가 이런 통찰에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 절대 없기를! 이것들은 실용적이지도 않은데다가 값을 메기자면 개평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까! 나는 호기 넘치게 걸어봤지만, 죄다 잃었다. 남들이 자동차와 보험과 주택청약통장 같은 것들에 투자하는 동안에 방랑에 걸어봤지만 원금도 챙기지 못하고 빈털터리가 되어가지고서는, 어떻게든 인생을 수습하기 위해 처음 시작했던 그 동네의 이름만 조금 다른 비슷한(사실은 더 작은) 회사에 거의 비슷한 업무로 돌아온 첫날, 그 빌어먹을 리스본에서 올랐던 나선형의 탑이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제 수수께끼라고 표현한 이유를 아시겠는지. 나는 이 나선형의 탑이 다시 나타난 의미가 무엇인지 풀어내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점심시간마다 매일 그 탑을 보러 갔다. 벤치에 앉아서 고철 덩어리를 노려보며 저것은 내 방랑을 수미쌍괄식으로 마무리하는 마침표인지, 아니면 새로운 방랑의 시작인지를 골몰했다. 어느 날엔 좀 열받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인생을 다시 제 궤도에 올리려는 첫날 다시 눈앞에 이 탑이 나타날 건 뭐란 말인가. 아, 혹시 세상이 보내는 조롱인건가. 2년이 지나 같은 동네에서 비슷한 일을 한다면 지난 2년은 살았으나 살지 않은, 그야말로 날려먹은 그런 세월이다 뭐 그런….


 


조롱이라고 생각했더니 부아가 슥 났다. 여기에 뭐가 볼 게 있다고 전망대가 있단 말이냐. 이 동네는 내가 훤히 아는데, 전망대라고 서 있는 이 나선형 고철 덩어리의 꼴이 훨씬 우스운 게 아니냐. 엇, 혹시 그런 건가. 영화 속에서 비슷한 상징에 낚여서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 그런 뻔한 클리셰. 그렇다면 이 나선형 철제 계단은 함정이다.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이 계단을 오르다 발을 헛디뎌 목이 부러지거나 새똥을 맞고 균형감각을 잃고 추락해 척추가 부러지는 운명을 타고난 가련한 등장인물이고. 그러나 이미 나는 인생이란 영화와 전혀 다른 무언가란 걸 배우지 않았나? 해볼 테면 해보라지. 수목원을 다니기 시작한 지 영업일 기준 7일이 되던 화요일, 나는 습지원에 덩그러니 놓인 나선형 계단에 올라가보기로 했다.


 


누구나 어렸을 때 한 번쯤은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 본 적 이 있을 것이다.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것은 통쾌한 상승이라기보단 길을 잃고 헤매는 기분과 더 비슷하다. 계단이 끝없이 이어지는 좁은 탑을 오르는 동안엔 발 밑을 보느라 고개를 들기가 어렵다.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을 찍는다면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과 같은 발자국이 나올 것이다. 그렇게 충분히 같은 자리에 발자국을 찍고 나면 별안간 하늘 아래 서 있게 되는 것이 나선형의 계단이다. 계단의 끝은 위태롭고 좁아서 아래의 벤치보다 편할 것도 없지만, 언제나 탑을 오르는 사람들은 있었다. 도대체 그들은 왜 같은 자리를 맴돌면서 탑을 오르는 걸까. 여기에 뭐가 있다고. 그러다 마침내, 나는 탑 꼭대기에 도착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탑 꼭대기에서 수수께끼를 풀었다. 지금의 이 수목원 여행을 계획한 것도 내가 얻어낸 답을 자랑하고 싶어서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하려니 조금은 쑥스럽다. 내가 얻은 답은 분명 남들이 보기에는 별 거 아닐 것이며, 나 보기에만 특별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미 점심시간의 대부분을 투자한 마당이니 끝을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내가 탑 꼭대기에서 본 것은…당연한 얘기긴 하지만…수목원이었다. 탑 위에서 본 수목원은 그 아래에서 보던 수목원과는 완전히 달랐다. 탑 위에서는 수목원 한가운데 있는 연못을 볼 수 있었으므로.


 


위에서 내려다본 연못은 멋졌다. 아니, 멋지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아름다웠다. 충격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연못엔 연잎이 가득 차 있었고 그 연잎의 한가운데엔 작은 섬이 있었는데 섬 자체가 갈대인 것처럼 갈대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바람이라곤 불지 않는 날인 것 같았지만 갈대는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갈대의 섬 한가운데엔 물오리나무가 딱 한 그루 심어져있었다. 무언가를 기념하듯이. 나선형의 탑에서 내려다본 물과 잎과 바람과 나무로 이루어진 봉분은 해석하는 법이 잊혀진 어떤 문자가 가득 기록된 피라미드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머지 않은 미래에 반드시 갖게 될 모든 사랑했던 기억의 무덤 같아 보이기도 했다. 연못을 바라보면서 난 탑을 오르기 전에 고민했던, 대체 이 탑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수수께끼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리스본에 있던 탑이 여기 왜 또 나타났느냐고 다시 묻는다면 지금 눈앞의 이 광경을 보고 경이를 느끼기 위해서라고 답하면 그만이었다. 이것은 실제로 진실이다. 이전에 이 동네에서 일할 땐 수목원에 와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또 왔더라도 리스본에 다녀오지 않았으면 이 탑은 내 눈길을 끌지 못했을 게 분명하니까. 그날 나는 신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연못을 내려다보며, 탑 위에서 남은 점심시간을 보냈다. 연못을 발견했으니 언젠가 다시 헛바람이 들어서 멀리 떠나는 일이 생겨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잠깐은 했던 것 같다.    











그 다음 날부터 나는 탑 앞에서 멈추는 대신 곧장 연못으로 갔다. 탑 앞에 있던 벤치는 연못 앞에 비하면 그늘지고, 벤치도 늘 축축한 좋을 것도 없는 그런 자리였다. 김밥을 사서 연잎과 갈대와 물오리나무가 잘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점심시간을 보낸다. 지금 이 회사와의 계약은 아직 꽤 남았으므로 나는 그동안 계속 이 연못을 탐구할 시간이 있는 셈이다. 점심시간의 연못 주변엔 종종 아이들이나 젊은 연인들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연못 주변엔 우리 모두가 앉고도 남을만큼 벤치가 많았다.


 


연못 앞에서의 점심시간은 언제나 넉넉했다. 아니, 사실 50분여의 시간은 언제나 짧았지만, 끝이 나는 게 두렵다거나 조바심이 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넉넉했다. 나는 50분 동안 노래를 들으며 김밥을 먹고 책을 잠깐 읽거나 공책을 꺼내 메모를 하거나 그것도 지루한 날엔 오리를 관찰하며 시간을 보낸다. 나는 늘 연못 앞에서 보내는 점심시간을 여행이라고 느낀다. 이곳은 수목원 밖 사무실과 완전히 다른 세계 같으므로 여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여행은 편안하다. 과거에 빚진 것을 셈하느라 머리가 아플 것도 미래를 쫓느라 숨찰 것도 없다. 나는 현재에서 아주 오래 머문다.


 


그래도 끝나는 시간은 있는 법, 어느새 12시 55분이다. 이젠 여행을 끝내야 하는 시간이다. 때맞춰 자리에 가 앉기 위해선 달려야한다. 달리는 동안 나는 늘 기분이 좋다. 종종 인스타 스토리에 점심시간 3시간을 법제화하라!라는 구호를 남기는 엄살을 부려보기도 하지만 그런 아쉬움과 상관없이 기분이 좋다. 옷에 풀이 들러붙어 어딜 헤매다 온 것 같은 몰골로 사무실로 돌아가는 날도 있지만, 이렇게 돌아올 곳이 있으니 나의 점심시간 여행은 결코 방랑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방랑과 여행의 차이는 돌아올 곳의 유무다. 이것은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좋다는 생각으로 떠난 방랑도 돌아올 곳을 찾기만 하면 여행으로 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고통받는 방랑자는 팔자좋은 여행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여행자란 자기가 멀리서 얻은 가장 좋은 것을 기념품이란 이름으로 가방에 가득 채워 돌아오는 자들이다. 오후 1시의 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해질 수 있는 기분이 찰랑거리는 걸 느끼며 회사로 돌아간다.


 


옆자리 동료가 오늘도 수목원에 다녀왔냐고 묻는다. 나는 그녀에게 오늘도 정말 아름다웠다고,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수목원에 같이 한번 가자고 대답 한 달 내내 같은 대화를 나누고도 한 번도 따라오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같이 수목원에 가게 될 일은 없을 거라곤 알지만, 나는 1시마다 정성을 담아 초대를 하고 있다. 기념품으로 들고 온 엽서를 돌리는 것이라 생각하며.


 


또한 1시는 쌓여있는 메일에 답장을 보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메일은 늘 내가 정말로 휴가라도 다녀온 것처럼 쌓여있다. 나는 메일 건너편의, 단지 이름만 알뿐 얼굴도 나이도 모르는 열심히 일하는 이들을 상상해 본다. 내가 휴가를 떠나있는 동안에도 그들은 일을 하고 있었을 것 같다. 반대로 그들이 휴가를 떠났을 때 내가 일을 하고 있을 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일상과 일탈을 반복하며 여행하는 존재며 서로 방랑을 빚지고 있는 사이다. 방금 일탈을 마치고 온 나는 그동안 일상을 지키고 있었을 메일의 수신자에게 존경의 마음을 가득 담아 애정어린 장난을 건네본다. 메일 끝에 ‘000 드림’ 대신 ‘수목원으로부터’라고 한번 적어보는 방법으로. 이것 또한 작은 일탈이다. 그러나 역시 이건 업무 메일에 어울리지 않는 티가 나기 때문에 지워버리고 다시 ‘000 드림’이라고 적었다.

 


이메일 말미에 진짜로 '수목원으로부터'라고 보내는 대신 이렇게 썻다 지운 문장만으로도 충분하다. 리스본에 다녀온 내가 수목원 옆 동네로 다시 돌아온 것이 아예 떠나지 않았던 것과 다른만큼 '수목원으로부터'를 썻다 지운 자리에 다시 적은 ‘000 드림’은 그저 기계적으로 ‘000 드림’이라고 적은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펜으로 쓴 비밀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은 코믹한 기분이 되어서는 종이비행기 모양의 버튼을 누른다. 메일을 다 보낼 때 쯤엔 옆자리 직원이 메신저를 보내 겨우 두시밖에 안됐다고 투덜거리겠지만, 나는 코믹한 기분 덕분에 ‘겨우 두시’라는 말까지 기쁘게 들을 자신이 있다. ‘그래! 이제 겨우 두시를 지난 것뿐이야!’ 하고 말이다.


 


이렇게 메일을 보내며 오후를 시작하는 것은 내겐 거의 수목원에 가는 일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메일을 다 보내고 나면 정말 일탈을 마치고 일을 해야할 시간이다. 우리 회사는 2시부터 4시까지를 '코어타임'으로 정해두고 있으니까. 나는 서둘러 오늘의 마지막 메일을 마무리한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수목원으로부터. 존경을 담아. 000 드림.


 


아차차, 이게 아니지.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000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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