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요일에 고깃집에서 만난 친구는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 좋은 금요일 밤에 왜 그리 죽상이냐고 물었더니 일을 하나 받았는데, 내일 출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중이라 마음이 너무 괴롭다고 했다. 토요일 출근까지 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은 절대 아닌데, 대충 하기엔 찝찝한 그런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친구가 들려준 자초지종은 이렇다.
오후에 실장이 친구네 팀 팀장에게 담배나 한 대 피우러 가자고 할 때부터 느낌이 쎄했다고 했다. 팀장 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소위 ‘끗발’이 낮은 친구네 팀장은 저렇게 끌려 나갈 때마다 일을 한 보따리씩 받아와서 팀원들에게 나눠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자리로 돌아온 팀장은 아니나 다를까 친구를 따로 불러냈다고 한다. 친구는 이제는 화도 나지 않는 기분으로 회의실에 갔는데…근데 글쎄 회의실엔 김대리도 있었다는 게 아닌가.
아, 먼저 김대리 이야길 잠깐 해야겠다. 최근에 이직해온 김대리는 친구의 회사 생활에 새로이 떠오르는 빌런으로, 내겐 이미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익숙한 인물이다. 친구는 계약직으로 벌써 2년째 일하고 있어서 어지간한 사업들은 대충 다 꿰고 있다. 반면 김대리는 직급은 친구보다 높지만 이직해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아는 게 별로 없다. 김대리가 온 날, 팀장은 친구를 콕 집어 김대리를 ‘잘 챙기라’고 했고, 그때부터 친구는 직급도 나이도 자기보다 많은 김대리의 사수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처음엔 친구도 잘 해보려고 제법 애를 썼다고 한다. 가르치되 부려먹을 수 없다는 점이 열받긴 했지만 어쨌든 오래 같이 볼 사이니까. 둘 사이가 틀어진 건 회식 날이었다(친구네 회사는 요즘에도 종종, 어떻게든 회식을 하는 미스터리한 곳이었다.). 만취한 김대리가 회식에서 글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친구가 자기에게 텃세를 부린다는 식으로 뼈 있는 농담을 갈겼다는 것이다. 당황한 친구는 그날 밤 즉시 여명 기프티콘을 보내며(잘 들어가셨어요? 푹 쉬시고 내일 봬요)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지만 김대리는 여명만 홀랑 바꿔 먹고 답장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이 사라진 기프티콘 메시지를 내게 보여주며 친구는 말했었다. “이젠 진짜 전쟁이야”
다시 회의실, 팀장은 친구와 김대리를 앉혀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실장님이 많이 힘드시다네요”
“헉 왜요”
“그…박 팀장님이 너무 말을 안 듣는다고 하시네요”
“아이고…”
“그래서…실장님이 저한테 그렇게 하소연을 해놨으니…옆 팀에서 새로 시작하는 사업 기획 아이디어를 아무래도 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두 분이서 다음 주까지 몇 개 생각해서 알려주세요.”
팀장은 한숨을 푹푹 쉬며 말했다고 한다. 마치 자기도 실장에게 당했다는 듯이. 팀장 중 막내여서 제가 맨날 당하고 사는 거 알죠, 휴…정말 회사 생활 쉽지 않네요, 우리는 한 팀이니까 여러분은 무슨 말인지 알죠, 우리는 깐부 맞지요,라고 말하는 듯한 한숨. 친구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무릇 능력 있는 팀장이라면 최대한 일을 적게 벌려서 팀원들이 이미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순간 목구멍까지 치솟기도 했지만 내년 1월의 정규직 전환 심사를 생각하며 재빨리 삼켜냈다고. 대신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넵 알겠습니다.”
2
다시 금요일 밤의 고깃집. 나는 금요일에 일을 받고 퇴근한 친구가 불쌍하긴 했지만 그냥 할 일이 생긴 것일 뿐, 왜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는 일’이 되는 것 인지는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그런데 친구 말이 일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고 한다. 남의 팀 일이니까 혹시라도 성의 있게 해서 냈다가 아예 자기 할 일이 되어버리는 수가 있어서 마냥 열심히 할 수도 없는데, 그 얄미운 대리랑 같이 일을 시켜서 열심히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란 것이다. 대충 했다가 혹시라도 김대리가 멋진 아이디어를 낸다면 그 얄미운 놈이 자기보다 유능해 보이게 되는 거라면서. 그러면 자기는 일도 잘 못하면서 텃세 부리는 사람이 되는 셈인데 그건 죽기보다 더 싫다고 한다. “근데 나 여기서 일 더 맡으면 진짜 죽을 수도 있는데” 을과 을의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진 친구의 표정은 한없이 착잡해 보였다.
“근데 그 옆 팀 팀장 말이야. 실장 속 썩인다는.”
“어"
“그 팀장이 이번 주에 무단결근을 했거든. 근데 그럴 만해”
“엥?”
“그 팀장이 맨날 대충 다니다가 요즘 꾸미고 다닌단 말이야. 향수도 뿌리고 그랬더니 실장이 팀장한테 사람들 다 있는데 요즘 바람피우는 거 아니냐고 그러는 거 있지.”
“헉”
“다음 날 전화도 꺼놓고 무단결근해서 그 팀 주임이 댁에 찾아가 봤거든. 근데 그냥 러닝셔츠 바람으로 문 열어주더라니까.”
“대체 왜…?”
“향수 좀 뿌렸다고 바람피우느냔 소리 들은 게 열받아서…개판으로 사는 거 보여준다, 뭐 그렇게 시위하는 거 아닐까”
“근데 그래도 되는 거야”
“몰라. 근데 팀장이랑 실장이랑 입사 일자 차이가 별로 안 난다나. 그래서 그런지도?”
나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회사라고 생각하며 친구의 이야길 곱씹었다. 등장인물도 많고 권력관계와 감정선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아침드라마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 실장이란 사람,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자기랑 비슷한 짬밥의, 다루기 어려운 팀장은 감정적으로 도발해서 무단결근을 유도했다. 결국 근태 기록에 남는 건 바람 핀 거 아니냐는 말이 아니라 무단결근일 것이다. 심지어 친구네 팀장에겐 그 팀장 때문에 힘들어죽겠다고 하소연까지 했다지 않은가. 막내 팀장이 그 하소연을 암묵적인 업무지시로 받아들일 것이란 걸 그는 몰랐을까? 피해자 코스프레와 업무지시를 동시에 하다니…실로 치밀하게 계산된 전략이다.
그러고 보니 친구네 팀장도 한가닥 한다. 친구와 김대리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을 같은 사무실에 있는 관리자가 못 알아차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김대리와 친구에게 동시에 일을 시킨 것은 팀원 사이의 불편한 기류를 업무 경쟁을 위한 동력으로 바꿔내다니. 거의 연금술에 가까운 용인술이 아닌가.
“역시…내일…출근 찍어야겠어…”
친구는 아예 내일 출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막스 베버는 권력을 ‘다른 누군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지금 친구에게 영향을 미치는 힘은 막스 베버 선생의 권력보다 훨씬 세련된 무언가 같다. 막스 베버는 저항을 말하기라도 했지, 친구는 고민이야 좀 하긴 했지만 자발적으로 토요일에 출근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권력의 정의에 ‘알아서 기게 만드는 힘’이란 구절을 추가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종종 도대체 회사란 것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데 오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답을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회사를 굴러가게 만드는 것은 다년간의 사회생활 끝에 고매한 경지에 오른 용인술이다. 인간의 본성과 권력의 작동에 대한 물샐틈없는 이해가 있어야만 자발적인 주말 출근을 가능케 할 수 있으리라. 심지어 실장과 팀장이 한 것은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라 ‘하소연’이다. 역시 팀장이니 실장이니 하는 직급은 딱지치기로 얻을 수 있는 타이틀이 아닌가 보다.
3
토요일 출근을 결심한 친구는 술을 많이 마시더니 이내 주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생각할수록 열받는 게 뭔지 알아? 다... 나한테 도와달라고 한다는 거야. (때마침 식당 티브이에선 유력 정치인이 지지 호소문을 발표했다는 헤드라인의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저거 봐. 정치인도 자기 좀 도와달라고 하고. 요새는 브랜드도 그냥 자기네들 좀 키워달라고 카피를 쓰더라니까. BJ도 도와달라고 하고. 실장은 팀장한테 도와달라고 하고. 팀장은 나랑 김대리한테 도와달라고 하고. 근데 나는 김대리도 도와줘야 되네.(친구는 맥주를 또 한 모금 마셨다.) 부끄러움이 없어 부끄러움이. 다들 자기들이 주인공이야. 주인공이니까 부끄러움이 없는 거지... (친구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일? 얼마든지 시키라 이거야. 자기들끼리 소문을 내던 개판을 치던 여우짓을 하던 상관없어. 근데... 도와달라고 하는 건... 안돼... 그동안은 내가 착해서 참았지만... 더 이상... 이건 아닌 거지... 도와달라고 하는 건...(맥주 한 모금 더) 나 고기 좀 구워줘"
나는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친구를 위해 온몸에 냄새가 베일 때까지 고기를 굽고 또 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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