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가장 졸렬해 보이는 순간은 언제일까. 칼럼계의 아이유 김영민 교수는 ‘무능한데 욕심은 많을 때’ 인간이 졸렬해 보인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제몫의 음식도 다 먹지 못하면서 타인의 것을 탐할 때, 직장 상사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약자에게 해소할 때. 그런 순간에야말로 인간은 가장 졸렬한 존재가 된다.
며칠 전 비슷한 종류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인간은 언제 가장 한심한 모습이 될까. 남이 끓인 라면을 탐내며 한입만 달라고 구걸할 때? 다이어트를 결심한지 채 한 시간도 안 되어 족발 대자를 주문할 때? 근래 겪었던 우스운 경험을 떠올리다가 이내 정답지에 가까운 장면이 생각났다. 그건 아마도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때, 정확히 지금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한동안 허송세월을 보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염없이 일을 했지만 정작 손에 잡히는 성과가 없었다. 이른 아침 책상에 눌러앉아 무언가를 붙들고 있기는 했지만, 정작 퇴근하는 순간 뒤를 돌아보면 그날의 업무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성실하게 정권을 내질렀지만 주먹에 닿는 감각 하나 없는 느낌. 그 끝을 모를 허탈한 기분. 매일 비장한 마음으로 출근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날들은 무력함만을 가득 채운 채로 퇴근해야 했다. 오늘도 패배감에 눌려 회색 전철 속 터덜터덜 걸어들어갔다.
지인들을 만날 때면 늘 괴로웠다. 근황을 전하려면 내가 느끼는 허탈감과 나의 무능을 가감 없이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나의 무참한 현실을 슬럼프나 일태기라는 말로 포장해 주었지만 사실 능력 부족에 가까웠다. 슬럼프라는 건 자고로 평소에 제 몫을 너끈히 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렇지 못한 경우를 말하니까. 그런 근사한 말로 나의 처참한 꼬라지를 포장하기에는 그 단어가 너무 과분하게 느껴졌다. 분명한 건 나는 제 밥값조차 하지 못하는 열등 직장인이었다는 사실이다.
패배감에 익숙해진다는 것의 무서움은 바로 자신의 디딜 곳을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제대로 된 일꾼으로 살기에 실패한 날이면, 이미 망한 하루를 되돌릴 수 없으니 타인의 성공을 보며 허튼 배를 불렸다. 프로 축구선수의 멋진 골 장면으로 시동을 건 지옥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주인공이 별 계기도 없이 각성한다거나 순식간에 세계관의 최강자로 등극하는 소년만화로 나를 끌고 갔다.
어제의 꼴통이 오늘 갑자기 에이스가 된다는 스토리. 기적에 가까운 만화 속 이야기를 하염없이 부러워만 하며 그렇게 매일밤을 낭비했다. 그 시간 무시로 찾아오는 자기연민까지도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지금 나의 불행은 그저 나의 무능으로부터 시작됐을뿐인데, 갑자기 찾아온 부진이라거나 환경의 탓이라 변명하기가 비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신이 무너지니 덩달아 건강까지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불면은 만성피로를 불렀고 피로감은 가뜩이나 회전력이 느려진 전두엽의 속도를 더디게 만들었다. 무능한 인간의 남은 쓸모마저 말살되는 과정. 그렇게 나는 스스로 끝도 없이 침잠했다.
깊은 무능의 굴에서 몇 달 동안 허덕이던 내게 떨어진 동아줄은 과거 나에게 발신된 글이었다. 스스로에게 썼던 일기부터 누군가 내게 보낸 편지와 카톡, 풀칠으로 보내진 품앗이들까지. 특히나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들이 따숩게 남긴 말들이 듬직한 사슬이 되어 나를 굴 위로 끌어당겼다.
따지고 보면 그랬다. 멘탈이 무너진 건 비단 일의 성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의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스스로를 핍박하고 무기력함을 더하는 강력한 빌런처럼 굴었다. 특히나 나를 향한 응원을 방어하려는 비겁한 스탠스가 이 사단을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스스로를 자조하며 웃기는 부류의 인간인 나는 칭찬에 취약했다. 정말이지 칭찬 노이로제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나이 먹도록 도대체가 남들이 건넨 달콤한 말 한마디를 어떻게 삼켜야 하는지조차 익히지 못했다.
다가오는 호의의 말을 향해 겨우 ‘아닙니다’를 반복하던 지난 날을 돌아봤다. 그건 곧 타인의 배려나 노고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무례한 인간이기도 했다. 누군가 나에게 준 칭찬을 내가 제때 받지 않으면 그건 수취인 불명의 쓰레기가 되고 말 텐데. 그렇게 칭찬을 방어하는 동안 나는 딱 그 정도의 인간이 되고 말았다. 이건 분명 나에게도, 남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3월의 어느 주말, 나를 향했던 과거의 말들을 마음속에 눌러 담으며 슬럼프 비슷한 것에서 탈출한 기분을 만끽했다. 오래 머물렀던 굴에서 탈출해 낯선 햇빛을 기쁘게 바라보는 자연인의 기분. 머리 속을 뒤덮은 뿌연 안개가 휙 하고 사라진 것만 같은 느낌. 난생 겪어 보지도 못한 순간을 난데없이 경험했다.
이날을 기념하며 나의 구원자이기도 했던 일기장에 몇 가지 말을 끄적거렸다. 기억에 남는 칭찬과 함께 다짐 비슷한 것도 적었다. ‘별말씀을요’, ‘아니에요’ 대신에 ‘감사하다’, ‘그럼요’ 같은 말들로 칭찬을 환대하기. 일종의 칭찬 노이로제 극복법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칭찬받을 일은 드물고 귀하니까. 조만간 누군가 나에게 칭찬을 건넨다면 무지막지하게 기뻐하며 받아들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칭찬을 건네주는 사람의 노력이 무용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동시에 내가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내게 닿은 그 따수운 말들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으면서 ‘나’라는 인간의 범위를 조금 더 넓혀가기로 했다. 이것이 내가 무능의 굴에서 얻은 슬럼프 공략법이자 ‘직장인 파주’가 배운 새로운 생존 전략이다.
아매오
어제는 구 직장 상사와 현 직장 상사 그리고 저까지 셋이서 저녁을 먹었습니다(어쩌다 이런 조합이 나왔는지는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 테죠... 후후). 오묘한 관계 구도로 인해 두 분 다 저의 ‘장점'만 짚어줬는데요. 불필요한 야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를 칭찬해주시더군요. 물론 그것도 다 불합리한 업무 지시가 없었기에 가능했겠지만, 속으로 조금 우쭐해졌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아직 한계를 찍어보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좀 더 최선을 다할 수 있는데,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데, 필요하다면 워크와 라이프의 밸런스를 조정할 의향도 충분히 있는데! 사실 제 발 저림에 가까운 아쉬움입니다. 왜냐면, 제 모든 업무가 죄다 ‘진행 중' 상태거든요. 결과물이 없는 거죠. 조바심 내지 말고 진득하게 뿌리면 결국 거둘일 것이라는 조언은... 아무런 소용이 없더군요.
최근 밀도 높은 날들을 보냈습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일’이 생활의 중심에 있었어요. 시간도 시간이지만 에너지를 많이 쏟았죠. 무엇보다 유일한 취미인 ‘읽기’를 마음 편히 누리지 못했어요. 지금의 상황이 과연 내게 건강한 것인지 되묻게 되더라고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스스로를 갉아 먹은 끝에 방지턱 없이 번아웃에 빠지는 이야기는 너무 클리셰니까요.
다만 저는 춤추는 고래라서요. 칭찬 앞에 의연하지 못하고 뚝딱거리기는 하지만 그것을 조금씩 조금씩 뜯어 먹으며 성장해 나가죠. 어제 받은 칭찬이 또 하나의 산소통이 되어줄 것 같다는 예감이 드네요.
마감도비
우선 직장인 파주님의 슬럼프 극복을 축하합니다. 칭찬을 환대하기. 참 좋은 말이네요. 칭찬을 환대할 수 있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 본인 스스로가 자신을 환대하고 있다는 증거인 거 같아서 제 마음도 같이 따뜻해지네요.
일이 그저 일뿐이라면, 우리가 괴로워할 필요는 없겠죠. 자신을 압박하는 게 외부의 압력이나 시선이라면 일을 놓거나 신경을 끄면 그만일 테고요. 그렇지 않다면? 본인의 능력, 성과, 퍼포먼스로 괴로워할 수 있다는 건, 조금 뻔하지만 자기 일과 결과에 대해 욕심이 있다는 증거 아닐까요.
회사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저도 가끔은, 아니 사실 자주 능력 있는 동료, 선배들 사이에서 자괴감을 느껴요. 그들의 결과물을 보며, ‘와... 멋있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나는 왜 이 모양이지’ 따위의 생각을 해요. 그런데 어디 가서 토로할 수가 없더라구요. 내 치부를 보여주는 느낌이고 남들 잘하고 있는 걸 시기하는 것처럼 비춰질까봐 걱정되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저만의 자괴감 탈출 공식을 만들었어요. 제 생각엔 일에 욕심을 낼 수 있다는 자체가 일종의 능력인 거 같아요. 끊임없이 고민하고 학습하고 방법을 찾고 할 수 있는 거 자체가 남들에겐 없는 동력인 거죠.
우리 마음은 가파른 경사로 위에 놓인 쇠구슬 같은 거 아닐까요. 아, 내리막이라고 경계하지 마세요. 약간의 저항만 이겨낸다면,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해본다면. 파주님, 우리는 점점 가파르게 내려가서 마침내 깊어질 거예요.
야망백수
‘성실하게 정권을 내질렀지만 주먹에 느껴지는 감각하나 없는 허탈한 기분’이라, 제가 근 3년간 느껴왔던 기분이네요.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고 나면, 아니 성실하게 살수록 열패감이 찾아오더라고요. 이렇게요. “100년도 못 사는 인생, 귀한 하루를 온전히 투자했는데도 이룬 게 아무것도 없다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인가 봐!”
그런데, 슬럼프가 아예 일상이 되고 나니까 좋은 점이 하나 있더라고요. 그건 슬럼프를 애써 극복하려고 헛심 쓰지 않게 됐다는 겁니다. 어쩌면 슬럼프는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 아닐까요? 배부르면 졸리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처럼요.
찾아보니까, 슬럼프는 원래 체육학에서 쓰던 말이라네요. 운동선수들이야 좋은 기록 내려면 슬럼프를 떨쳐내야겠지만, 우린 운동선수가 아니잖아요. 올림픽 나가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일상을 살아갈 뿐이죠. 그리고... 운동선수들한테 휴식 중요한 거 아시죠? 호날두는 낮잠을 하루에 5번 잔데요. 우린 하루에 고작 한번 자는 데다가 주급을 8억씩 받는 것도 아니니까 스스로를 너무 몰아붙이지 말자구요.
제 올해 목표는 슬럼프 극복이 아니라 ‘슬럼프 후려치기’입니다. 슬럼프는 문제로 삼을 만큼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슬럼프를 문제시하는 게 문제죠. 강박은 일상을 좀먹는 법이니까요.
아이고. 점심을 배불리 먹었더니 배가 푸근해졌네요. 배에 손을 올려두고 되뇌어봅니다. “나는 운동선수가 아니다.” 봄바람이 따뜻하네요. 언제쯤 사람 구실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꽤 살만합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