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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Oct 28. 2022

딸깍, 외향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누가 내 MBTI를 물어볼 때마다 추궁당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낯선 장소에 가고 낯선 사람을 만나는 걸 어려워한다. 단체 행동에선 말수가 적고 조용한 편이다. 내 속내를 쉽게 밝히는 성격도 아니다. 전형적인 I형 인간, 내향적인 인간이다.


그래서 가끔 나는 내 인생이 비극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내 직업이 매일 새로운 장소에 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글 쓰는 영업직이라고 할까. 직업을 선택하기 전까지는 마감노동자가 글만 쓰면 된다고 생각했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걸 몰랐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해가 거듭할수록 외향성을 요구하는 업무가 손에 익어갔다. 전화 걸기 전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도 통화버튼을 누르면 상대가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말이 많은 인간이 된다. 잘 지내셨느냐, 오랜만이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냐, 못 본지 오래 됐다 등등 멘트로 양념을 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너스레를 떨다보면 늘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전화로 온갖 너스레를 떨며 이제 연말인데 곧 한번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내가 그쪽 회사 근처로 가겠다고 빈말을 내뱉다가 상대가 “저, 마감도비님, 그런데 저희 O일에 뵙기로 약속 잡지 않았나요?”라고 말하며 헛웃음을 짓기에 “아아.... 그쵸, 그쵸. 제가 너무 설레서 그만. 하하, 하하하”라고 답했지만 정말이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풍월에 너무 무아지경이었던 셈이다.


내 경험에 비춰볼 때, I형 인간도 자의건 타의건 E형 스위치 하나씩은 지니고 있는 거 같다. 누르면 외향적인 사람으로 돌변할 수 있는 일종의 스위치 말이다. 누구나 사회 생활을 위한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거보다 좀 더 절박하다고 보면 된다. 뭐랄까, 일종의 필살기 같은 거다.


소년 만화를 보면 천재들 사이에서 노력형 캐릭터가 딱 한 번 남들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필살기가 있지 않나. 이걸 쓰면 너는 일시적으로 그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너의 수명은 절반으로 줄어들고 말 것이다 등등. I형 인간에게는 E형 스위치가 그런 의미다.


어쩌다보니 나는 매일같이 필살기를 쓰는 사람이 됐다. 낮에는 어색한 사람들과 밥을 먹으면서 업계에 도는 소문, 전 직장 험담, 재태크 꿀팁, 사는 얘기 등을 하며 한참 떠들고 웃는다. 빈말, 과장된 웃음, 어색한 몸짓, 정직한 침묵. 그리고 몇 번의 반복.


일행들과 길을 나서서 나란히 대로변에 서면 모든 극이 막을 내린다. “아, 네, 저는 이쪽으로 가려구요. 저기 택시 오네요. 조심히 들어가시고, 또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사람 좋은 미소와 정중한 허리 인사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돌아서면 어디 전봇대 옆 쓰레기봉투 옆에 잠시 쭈그려 앉고 싶은 심정이 된다. 아, 빈말을 너무 많이 했어, 티가 나면 어쩌지, 그 말은 하지 말걸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압도하는 피로감.


I형 인간도 사회생활을 하면 E형 인간이 된다. 대신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E의 모든 획이 I로 길게 줄지어 서면서 그 길이만큼 자괴감과 피로감도 길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고민을 하게 된다. 다른 직업을 찾아봐야 하나,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나랑 맞지도 않는 직업을 골라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등등.


그런데 최근엔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다. 거래처(라고 하자)의 누군가가 내가 미국으로 출장을 간 줄 알았던지 몹시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플랑크톤인지 오미크론인지 하는 게 심해서 현지 상황이 안 좋다는데 나더러 미국에서 괜찮으냐는 거였다. 금방 오해를 바로 잡았지만 I형 인간인 나는 그게 또 너무 고마워서 한동안 그 걱정을 머플러처럼 두르고 다녔다. 따뜻하게.


I형이어서 사람으로부터 오는 타격도 크지만 동시에 수혜도 컸던 셈이다. 밥은 드셨어요? 목소리가 왜 이렇게 안 좋아요, 아프지 마세요, 저번에는 감사했습니다, 큰 도움이 됐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편안한 저녁 되세요 등등. 아직은 어색한 미소 사이로 흘러들어와 나를 따뜻하게 채워준 말들이다. 그리고 한 번 들어본 말은 나도 다른 사람에게 곧잘 하게 된다.


타고난 외향형 인간들 사이에서 노력형 외향형인 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래도, 나에겐 필살기가 있으니까. 어느 순간엔 나도 가장 진심으로 외향적인 인간이고, 그 순간이 쌓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 모두들 나의 진심을 받아줘!






야망백수

얼마 전에 회사 동료들이랑 같이 밥을 먹었는데요, 물론 MBTI 얘기를 나눴지만 지나고 나니 기억에 남는 건 알파벳 4개가 아니라 제가 좋아하는 메뉴를 기억해 주는 것 같은 따뜻한 배려더라구요.


이런 걸 보면 '내 성격은 뭐 입네'하는 얘기들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성격 테스트가 기승을 부리곤 있긴 하지만요) 스스로 ‘E’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고 스스로 ‘I’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요.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건 언제나 상대의 행동이고요. 어쩌면 성격이란 내장된 소프트웨어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매 순간의 행동으로 결정되는 관계의 온도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요.


저는 이왕이면 ‘그 사람, 성격이 어떠어떠하다’가 아니라 ‘그 사람이랑 대화하면 따뜻하다’고 기억되고 싶은데요. 그러려면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로 성격 뒤에 숨어 관계를 가꾸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걸 정당화하지 않는 연습을 좀 해야겠네요. 마감도비님 표현을 빌리자면 ‘E 스위치’를 키는 일이 되려나요? 흠. 근데 스위치란 표현은 아무래도 좀 기계적인 것 같은데, 관계의 온도를 덥힌다고 하는 건 어떨까요? 조금 더 인간적으로요.



파주

저는 외향형이라고 오해받는 지독한 내향형 인간인데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TMI(태몽부터 버거킹 아메리카노 구독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이야기)를 떠벌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절대 철면피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요. 찰나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쏟아내고 마는 것이죠. 이런 지독한 버릇 탓에 적당히 친한 사람들과 만난 뒤에도 '나, 너무 헛소리 한 게 아닐까'하고 이불킥을 자주 갈기곤 합니다.


한동안 저는 밖에 나설 때마다 외향을 선크림처럼 발라야 하는 저의 성격이 저주스럽다고 자책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외향을 꾸미는 내향형인간 만큼) 외향을 억눌러야 하는 외향형인간도 힘든 일이 많겠다는 생각이 스치네요. 사실 한국사회에서는 외향보단 내향의 덕목이 필요할 때가 많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 같은 한국속담만 봐도 그렇죠. 참, 어느 쪽이든 다들 고생들이 많네요. 지금도 어디선가 저와 정반대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외향형 동지들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아매오

성격에 딱 맞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도 일은 여전히 만만치 않은 과제일 거예요. 추측컨대 덕업일치가 실패하는 루트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도 일하면서 많이 바뀌었지... 내게도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말야... 그때의 난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후... 너넨 이런 거 피지마라..." 뭐 이런 느낌. 주변에서 본 적 없으세요?


하하.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성격이든 취향이든 내가 하는 일의 기반을 이루는 건 맞지만, 언제나 '일하는 태도'가 그것들을 앞섭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되 성격에는 성격의 영역이, 취향에는 취향의 영역이 있듯 일하는 태도에는 일하는 태도의 영역이 있는 셈. 자, 마감도비 님은 어떤가요? 제가 보기엔 누구보다도 마감도비 님의 일에 적합한 '일하는 태도'를 갖고 계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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